"어우 피곤해라." 거의 새벽 4~5시쯤에 잠들었다 보니 피로감은 여전했다. 커피만 벌써 3잔째. 이제는 입에서 커피 찌꺼기가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제 늦게 잤니?" 대리님들이 보기에도 피곤하다는 게 딱 보였는지 가서 쉬고 오라는 말을 오늘 입에 달고 사셨다. 이런 배려는 평소에 일을 열심히 했던 보상이라면 보상이겠지. 덕분에 나는 직원 휴게실에서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당연히 진짜로 잘 수는 없고 안마의자에 앉아서 마사지를 받는 동안만. "움?"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뜨면서 슬쩍 앞을 확인한다. 거기에는 휴게실에 놓인 과자들을 한 움큼 챙기고, 입에는 막대 사탕까지 물고 있는 서예린이 있었다. '아, 씨.'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1순위의 여인. 유아린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고 있을 테니까 만나는 게 좀 껄끄러워서 못 본 척하려고 했는데. "우진아!" 저쪽은 반대로 기다렸다는 것처럼 반기면서 다가왔다. "휴게실 과자 도둑이세요?" 괜히 어색함에 장난스럽게 묻자, 서예린은 자신이 품에 안고 있는 과자를 내려다보더니 부끄러워하며 외쳤다. "아, 아냐! 여기서 다 먹고 가려던 거였어!" "살…… 아니다." "안 찌거든! 열심히 조절하면서 먹는 거야!" 품에 있는 걸 보니까 저걸 조절이라고 해야 하나 싶었지만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쨌든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어제 일 때문에 서예린이 화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또 아니다. '진짜 섹프 정도로 생각하는 건 아닐 텐데.' 지난밤에 서예린의 정열적인 고백을 받았었으니 그렇게 넘기고 싶어도 쉽지 않다.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척하려고 했는데 서예린은 옆 안마기에 자리 잡고는 내게 과자를 건넨다. "같이 먹자." "……점심 먹은 게 아직 소화가 안 됐는데." "그래도 같이 먹자. 원래 뭐든 같이 먹으면 맛있어." 계속해서 나한테 과자를 내민 탓에 결국 한숨을 내쉬며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근데 또 막상 먹다 보니까 맛있어서 술술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흐응."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녀석. 왜 그러냐고 물어볼까 싶었지만 그냥 안 묻기로 했다. 들으면 귀찮을 것 같았으니까. "우리 이제 한 달도 안 남은 거 알아?" "응, 알아. 생각보다 시간이 금방 가네." 이제 곧 연말이다. 골드원에 온 이후로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던지라 시간이 금방금방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도 이제 2학년이네?" "뭐가 달라지겠니." "1학년 때 MT 안 갔지?" 아삭. 초코과자를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에는 윤지랑만 다녔으니까 사실상 학과 행사는 다 빠졌고, 사람들이랑 같이 어울리지도 않았다. "MT뿐만 아니라 그냥 대부분 행사에 참여를 안 했지." 그러자 몸을 옆으로 틀어 나를 보며 서예린이 방긋 웃었다. "이번에는 같이 가자. MT 가서 같이 놀자." "……2학년이 가도 되는 거야?" 보통 MT는 신입생들이 주로 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에이, 2학년도 갈 사람은 가도 될걸? 굳이 1학년들한테 관심 가지지 말고, 우리끼리 노는 거지." 저 우리에 도대체 누가 들어가 있을지 모르겠어서 좀 무섭다. "응? 어때? 어때? 괜찮지 않아?" "……생각해 보고." "기대된다!" 2학년이 MT에 따라가면 좀 싫어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눈을 반짝거리며 기대하고 있는 서예린을 보니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서예린이라면 아마 환영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쪽에서 먼저 제발 와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아참, 우진아! 이번에 여기서 영화 찍는다는 거 들었어? 카지노 배경으로 찍어서 배우들 막 온다더라." "아, 들었어. 정작 카지노에서는 촬영이 불가능해서 그냥 입구 쪽에서만 찍는다던데." 카지노 이용객이 몇 명인데. 하루 벌이를 포기해서 영화 촬영을 하게 해줄 정도로 골드원에 메리트가 딱히 없었다. 애초에 썩 좋은 이미지로 나오는 것도 아닐 테니까 말이다. "구경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 그러게." 지난번에 영화 촬영할 때 보니까 배우 쪽에 서예린이 관심을 가지는 걸 봤으니까. 그날 이후부터 착실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서예린이 배우가 되는 것도, 이런 가벼운 대화들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굳이 표현하자면 분위기가 좋다는 거려나. "섹x 할까?" 분명 방금 전까지 좋다고 생각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멍한 표정 서예린을 쳐다보자 그녀는 방금 전의 순진무구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야." "히히, 나도 농담이야 농담. 여기서 하면 소리 때문에 힘들잖아. 다들 퇴근한 저녁이면 모를까." 이상한 전재 조건을 붙여서 가능하다고 말하는 게 진짜 생각해 봤다는 걸로 느껴져서 섬뜩하다. "아니면 내가 빨아주는 정도면 가능할 것 같은데…… 해줄까?" 슬쩍 서예린의 손이 내 하반신으로 향한다. 어제 그렇게 열심히 사용했음에도 시간이 좀 지났다고 다른 여자 손에 바로 반응하는 것 좀 보라. "흐흥, 아린이가 너 이제 일주일은 못 한다고 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네." "……." 얘네는 좀 과할 정도로 친한 게 아닌가 싶었다. 도대체 나 없을 때 무슨 말을 주고받고 있는 건지. "어때? 하고 싶어?" "……." 확실히 서예린은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여자 중에 가장 성적인 지식이 많은 편이었다. 야동을 몇 편을 독파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상황에 남자가 흥분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판타지적 상황을 충족시켜 주고도 남는 외모까지. 도대체 누가 그녀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겠냐고 중얼거리며 나름의 변명을 해본다. 바지 지퍼를 열기 직전, 마지막으로 나는 서예린에게 솔직하게 답해주길 바라며 물었다. "너, 일부러 먼저 섹x 하자고 말했지." "……." "내가 먼저 섹x를 거절할 걸 알고 일부러 그다음에 진짜로 하고 싶은 거 말한 거지?" 솔직히 합리적인 의심이지 않은가 싶었고, 빙그레 지어진 서예린의 미소가 정답이라고 말해왔다. 지이익. 지퍼가 벗겨지고. 팬티는 어떻게 하나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능숙하게 벗겨낸 서예린. "뭐야, 방금 뭐한 거야?"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묻자, 서예린은 별말 없이 안마 의자 앞에 무릎 꿇고 앉는다. "마사지 시작할게요?" 그러고는 천천히 내 물건을 꺼내들려는 순간. "야, 김우진! 도대체 몇 분을 쉬는 거야! 나도 좀 쉬자!" 찡얼거리면서 휴게실 안으로 들어온 유아린. "어? 너만 못 잤어? 나도 못 잤어! 애초에 내가 더……!" 우리를 딱 마주친 상황. 그나마 유아린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머리에 차가운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미쳤지 그냥.' 서예린의 유혹에 빠져서 순간적으로 현실 감각이 무뎌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유아린에게 걸렸다는 점과 아직 내 것이 밖으로 꺼내지지 않았다는……. 쑤욱. "……?" 분명 유아린이 들어온 걸 봤으면서 서예린은 일부러 내 물건을 꺼내서 손에 한 번 쥐고는 웃었다. "아린이라 다행이야." 마치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들이 미쳤구나!? 여기 휴게실이야!" "그러게.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다." 내가 바지를 추스를 수 있게 한 걸음 물러나 준 서예린. 지퍼를 올리면서 느껴지는 유아린의 시선이 뼈가 시리게 차갑다. "다음부터?" 뭔가 여운이 남는 말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였으나, 유아린의 게슴츠레한 눈동자에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하아, 예린아 너 일찍 퇴근한다며." 한숨은 나를 향했는데, 부르는 건 서예린이라는 점에서 나한테는 말하는 것도 포기했다는 기분을 들게 했다. "퇴근했는데? 너 퇴근하는 거 기다리고 있었어." "……." 순간 입을 꾹 다문 유아린. 힐긋 내 쪽을 쳐다보고는 뭔가 부끄러웠는지 머뭇거리고 있는데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알았어…… 이제 한 시간만 있으면 퇴근이니까 좀만 더 기다려." "응, 알았어." 방긋 웃는 서예린. 둘이 약속이 있는 모양인데 순간적으로 동떨어진 사람이 됐단 느낌이 들었다. "뭔데?" 둘이 뭐하나 싶은지 궁금했기에 묻자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동시에 쏘아진다. 야릇하니 숨을 고르는 서예린과 팔짱을 끼고 얼굴을 붉힌 채 노려보는 유아린. "너도 낄래, 우진아?" "무, 무슨 말이야! 안 돼! 너 일이나 하러 가!" "뭐야. 너희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가냐?" "일하러 가라고!" 결국 유아린에게 밀려나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안에서 둘이 뭔가 얘기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끼어들어선 안 될 것 같았기에 그냥 자리를 비켜줬다. * * * '진짜 가버렸네.' 미리 퇴근해서 서예린이랑 같이 가버린 유아린. 솔직히 어제 그런 일도 있었으니 나랑 시간을 좀 보내지 않을까 싶었는데 둘이 꽤나 다급해 보였기에 잡지는 않았다. '뭐지 이게.' 버려진 개처럼 되어버린 처량한 신세에 머쓱함을 느끼며 퇴근하는데. "우진아!" 다급하게 달려온 연영과 이서아. 보통 얘가 이렇게 나를 찾는 경우는 썩 좋은 일이 없었는데 예상한 그대로였다. "혹시 연말에 시간 있어?" "뭐야, 근무 시간 바꿔 달라고?" 남자친구도 있는 애가 이런 걸 물어보는 거라면 당연히 그런 쪽의 부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나랑 같이 연극 보러 가자." "연극?" "응, 원래 남자친구랑 가기로 했었는데 그 새끼가 못 간다고 해서." "……." "응? 부탁이야. 나랑 같이 가자. 가서 사진 한 장만 찍자." 하아. "내가 지난번부터 말했지. 네 남친이랑 기 싸움하는 거 나 끼지 말라고." "하, 하지만……!" "유아린도 뭐라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거 유아린은 알고 있냐?" "……." 입을 꾹 다물고는 입술을 쭉 빼는 이서아. 아무리 남자친구랑 분위기가 좋지 않아도 저런 식으로 질투심을 유발하는 건 사귀는 관계에 있어 썩 좋은 방향성은 아니었다. "남친이 동아리 모임 때문에 못 온다고 했단 말야." 그런 내게 이서아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애원하듯 부탁해 왔다. "응? 제발. 들어보니까 동아리 대부분이 여자야! 나 진짜 초조해서 안 될 것 같아!" "……." 얼마나 남친을 좋아하는지 이러고 있는 걸 보니 좀 애처롭기도 했다. 이미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해서 남친 쪽에서 막나가는 중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는데. "하아." 울상이 된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이 약해지진 않고 이걸 어떻게 거절할까 싶던 순간. "약속 있어요."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건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자. "걔, 저랑 약속 있어요." 베이지색 코트에 하얀 스웨터. 목에 두르고 있는 목도리는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포근함을 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짙은 푸른 머리카락과 단아한 미소. "최, 이서……?" 나도 모르게 그녀를 부르자, 최이서는 손을 살짝 들며 인사해 왔다. "콘서트 보러 가기로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