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 왜 안 나와아!” 남자 탈의실 밖. 뭣도 모르고 내 이름을 우렁차게 부르고 있는 한봄. 옷 갈아입은 다음 밖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오지 않으니까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우진아, 거기 있긴 하지?” “…….” 이번에는 이서아가 걱정스럽게 나를 불렀다. 하도 안 나오니까 뭔가 문제가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냥 아무 말 없이 숙소 갔다고 구라칠까.’ 핸드폰으로 몸이 안 좋아서 먼저 숙소로 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리더기에 30분 일찍 퇴근한 걸로 찍혔다는 소리였다. 밖으로 나가기 싫어서 어중간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나를 위협으로 몰아넣은 원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짧고 간결한 한마디. 섬뜩하다 못해 묘한 열기마저 뿜어져 나오는 듯한 유아린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시간 끌면 더 피곤해져.” “……안 때린다고 했잖아.” 작게 쪼그라드는 목소리로 저항해보자 호흡이 길게 뿜어져 나온다. “안 때려.” 저걸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탈의실을 쓰고 있는 다른 직원 분들의 의아한 시선이 쏟아져 왔기에 결국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나랑 유아린 사이에 분위기가 싸하다는 걸 인지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 두 사람. 어색하게 웃으면서 인사하자 유아린은 냉큼 내 팔에 팔짱을 끼면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가자.” “어, 어어.” “뭐야뭐야?” 한봄과 이서아가 이상하다면서 우리를 쳐다봤으나, 녀석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그냥 끌려갈 뿐이었다. “진짜 화 안 났음?” 팔짱을 끼고 있는 유아린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손에 힘을 준다. “화났지.” 역시 그러시군요. “그러니까 오늘 잘해. 뒤지기 싫으면.” “그런 식으로 넘어가주는 거야?” “너 하는 거 봐서?” 그럼 또 열심히 해야지. 때릴 명분이 있는 유아린에게 함부로 대들었다가는 정말 뒤지게 맞을 테니까. ‘내가 싸움을 좀 잘했어야 했는데.’ 여자한테 맞고 다닌다고 어디 가서 말하는 건 쪽팔리지만, 그게 태권도 선수 출신인 유아린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질 만하지 않은가. 어쨌든 남은 시간 동안 간단하게 호텔 내부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호텔을 돌아다닌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골드원은 호텔 내부에 음식점이나 옷가게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가게들이 즐비해 있었다. 주변이 무엇 하나 없는 산골짜기라서 오히려 자신들이 스스로 모든 걸 충당한다는 느낌. 아예 저녁까지 여기서 먹을까 고민해볼 만큼 확실히 음식점들이 많았으나. 정작 메뉴판의 가격을 보면 그냥 직원식당에서 밥 먹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대한당 가볼까?” 그때 서예린이 일하는 대한당으로 가보자고 제안하는 이서아. 다들 동의하면서 이동하는 와중 아까 자연스럽게 팔짱을 풀었던 유아린이 다시금 내게 달라붙어 왔다. 이서아와 한봄은 앞장서서 걷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따가운 시선을 받진 않았지만. “……너무 노골적이잖아.” 대한당에 있는 서예린을 겨냥해서 일부러 팔짱을 껴온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괜스레 한마디 해본다. “읏.” 대놓고 짚을 줄은 몰랐는지 머뭇거린 유아린은 잠시 고민했지만. “악!” 내 허리를 꼬집으면서 선언했다. “대한당 들어가면서부터 팔짱 풀기만 해봐.” “…….” “진짜 가만 안 둔다?” 섬뜩한 경고에 나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고, 그런 내가 만족스러웠는지 입가에 옅은 미소와 함께 살짝 기대어왔다. “흐.” ‘이런 걸 보면 좀…….’ 귀엽긴 한데. 어쨌든 대한당으로 들어가자 당연하게도 서예린이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주었다. 빵 모자에 앞치마. 오늘도 SNS를 보고 찾아온 수많은 손님들을 상대했는지 살짝 지쳐 보이는 서예린. “얘들아 안…….” 바로 우리에게 인사하려다 말고, 팔짱을 끼고 있는 나와 유아린을 빤히 쳐다본다. “지난번에 말해줬던 버터크림치즈빵 아직 남아있어? 나 그거 진짜 먹어보고 싶은데!” “예린아, 그 복장으로 나랑 사진 한 장만 찍자.” 영 옆에서 달려드는 한봄과 이서아 탓에 순간 시선이 돌아가 둘을 챙기는 서예린이었으나 묘하게 불안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흐, 효과 직빵이네.” 손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웃음을 참는 유아린. 만족스러워 하는 모습이 앙큼하다. 그때. “우, 우진아! 빵 사려고? 내가 추천해줄게!” 두 친구를 다른 알바들에게 맡긴 다음 그대로 반대편 팔에 달라붙어온 서예린. 주변 손님들이나 다른 알바들은 평소랑 다르게 접촉이 과한 서예린을 눈으로 흘기면서 놀라는 상황. ‘와, 이거 뭐임.’ 솔직히 남자로서의 자존감이 하늘을 뚫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느슨해졌는데. “억!” 허리가 너무 강렬하게 꼬집혀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고개를 틀어 유아린을 노려보자 녀석은 심통이 난 듯 입을 꾹 다문 채로 눈을 맞췄고. “크, 크흠. 예린아? 사람들 보잖아. 너무 달라붙는다.” 나는 억지로 서예린의 팔짱을 떼어내며 유아린의 편을 들어주었다. “…….” 내가 자신을 피했다는 걸 조금 늦게 인지한 서예린은 멍하니 자신의 팔을 보더니. “씨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거기서 그냥 끝났으면 참 좋았겠지만 반대편에 있는 유아린은 마치 승자라도 된 것처럼 서예린을 향해 브이 자를 내밀었고. “씨이이이이이!” 서예린의 펀치가 내 어깨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유아린에 비해서 솜방망이였기도 하고 솔직히 크게 아프진 않았지만. “사람들 보잖아.” 너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광경이었던지라 결국 대한당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서아랑 한봄은 그대로 빵을 고르고 있고, 나랑 유아린만 밖으로 나온 상황. “뭐지, 짜릿한데?” 옆에 있는 유아린은 만족감을 느끼면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용서.” “넌 쟤랑 친구 맞냐?” 드디어 풀린 팔짱. 나는 뻐근함을 느껴 돌리면서 묻자 유아린은 심통을 부리듯 짜증낸다. “친구랑 싸우기도 하고, 경쟁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건 맞지만……. “예린이한테 이런 걸로 처음 이겨봄.” “승패가 있는 거였어?” 내 질문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유아린이 흥얼거리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서아랑 한봄이 나올 때까지 잠시 밖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내 핸드폰에도 진동이 울려왔다. - 서예린: 대한당 뒷문으로. “…….” 뭔가 선배들한테 끌려가서 얼차려 받는 기분인데.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말한 다음 유아린을 두고 대한당 뒤에 도착하자. “우진아?” 심기가 매우 불편하신 서예린께서 팔짱을 낀 상태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크흠,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까지 했니?” 이거 미친 건가? “아니, 사정이 있다고.” “아, 그 사정…….” 착각했다는 걸 깨닫고는 머쓱해진 서예린.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진 감이 있었다. “아, 아린이는 팔짱 껴도 되는 거고 나는 안 돼?” “사정이 있다니까?” “왜 계속 사정사정 거려? 쌓였어? 지금 할까?” 무슨 애한테 밥 주는 것도 아니고. 바로 가슴부터 풀어젖히려는 서예린을 막는다.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일부러 계속 성적인 부분으로 이야기를 넘어가려는 느낌이 들어 한번 찔러봤는데.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닌가. 고개를 휙 돌리면서 모르쇠 하는 녀석. “적당히 해라. 여기 밖이야.” “왜 내 팔짱은 풀어?”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막상 설명하자니 말문이 막혔는데. 유아린 팬티 가지고 놀리다가 두들겨 맞기 싫어서 그런 거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내가 가슴도 더 큰데.” 본인 가슴을 밑에서 받치면서 어필하는 서예린. 눈동자에 담긴 순수함이 묘하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만져 봐.” “이미…… 크흠, 만져봤잖아.” 지난번에 만지고, 물고, 빨고 다 했는데 뭘 더 하라는 건가. 하지만 서예린은 내 손을 잡아서는 자신의 가슴에 툭 얹었고. “오, 오오…….” 뭐야 이거. 손바닥에 풍만하게 잡혀오는 가슴. 아니, 서예린의 가슴이 내 손을 파묻는단 느낌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고. 어느새 양손으로 만지작거리는 내 자신이 있었다. 눈이 떼지지 않는 걸 보면 뭔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했다. “우, 흐읏, 진아…….” 느낀 거야? 조금 더 손을 거칠게 움직이려던 순간, 서예린이 작게 물어왔다. “아린이가 관리인이지?” “……넵?” 머리가 차갑게 식어간다. “손 놓지 말고.” 내 양쪽 손목을 잡은 채로 서예린은 계속하라는 신호를 주면서도. “아린이가 1호기 맞지?” 이미 확신하고 있는 서예린. 가슴의 풍만함과 더불어 그녀의 목소리가 내게 얼른 진실을 고하라며 유혹하고 있었다. “맞잖아? 대나무숲에 쓴 거 보면 확정이지.” “아.” 생각해보니까 그렇다. 관리자인 내가 방학 기간인 지금 1호랑 노닥거린다는 걸 대나무숲에 적었다. 내 정체와 우리 관계에 대해 알고 있는 서예린이라면 유아린이 1호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겠지. “나도 2호기 시켜줘.” 그리고 서예린의 제안은 너무 뻔했다. “…….” “응? 계속 만지고 싶으면 나 2호… 흐웃!?” “…….” “소, 손 잠깐 놔봐.” “아, 미안.” 그냥 무작정 만지고 있던 터라 나도 모르게 집중해 버렸다. “읏?… 노, 놓으라니까?” 뒷문에 기댄 채로 몸을 배배 꼬면서 분명히 느끼기 시작한 서예린. 끈적한 숨결이 손등에 닿는 순간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거 버그 걸린 것 같아.” 손이 놓아지지 않아요. 뭔가 버그가 걸린……. “버그 고치러 왔습니다.” 김우진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그래, 그런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나는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그대로 바닥을 굴렀고. “개새끼가아.” 씩씩거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아린과 눈이 맞은 순간, 녀석은 다시 나한테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억! 자, 잠시만요!” “닥쳐어어!” 파운딩에 들어가 바로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한 유아린. 손이 얼마나 매운지 아까 서예린과는 비교도 안 될 지경. 예전에 최이서한테도 이런 식으로 맞아본 적이 있었는데 내가 봤을 때 최이서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다. “진짜 아파! 미친! 진짜 아프다고!” “너! 이, 씨이! 죽어! 그냥 죽어!” “어억!”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막아봤으나 결국 이겨내지 못한 나는 축 늘어지고 말았다. “씨이!” 그나마 다행인 건, 가드가 풀리니 공격이 멈췄다는 것. 쟤가 태권도를 해서 그런지 그나마 최소한의 선수로서의 양심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야, 서예린!” 그러곤 나를 밟고 벌떡 일어나서는 서예린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 * * “야, 서예린!” 서예린에게 다가간 유아린은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어지러울 정도였다. 술이라도 마신 것 같은 감각 속에서 차오르는 질투심과 분노는 서예린과 김우진 둘에게로 쏟아지고 있었기에. 단순히 김우진을 두들겨 팬 정도로 마음이 후련해질 수 없었다. 그렇기에. “쟤, 오늘 내 팬티 가져갔어.” 유아린은 아예, 공격적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서예린이 그렇게까지 여유롭다면.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넘치기에 경쟁 같은 미적지근한 소리나 하고 있다면. “그걸로 나 가지고 놀면서 즐겼어.” 그렇게 여유 부리다간 큰일 난다는 걸 알려줄 생각이었다. 서예린의 시선이 쓰러진 김우진에게로 향했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넋이 나간 듯했다. “그리고 오늘, 저 새끼랑 섹x 할 거야.” “……?!” 김우진을 보고 있던 서예린의 시선이 바로 유아린에게로 돌아간다. 유아린 역시 그녀와 눈을 맞추면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놀다가 만족하고 끝날 줄 알았지만. 서예린의 가슴을 쪼물딱거리고 있던 김우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뜨거워, 되는대로 내뱉는 중이었다. 경쟁심과 승부욕이 타오른다. 한 번은 질 수 있어도. 유아린은 두 번은 질 수 없었으니까. “우리 방 사람들한테 나 외박한다고 말해. 그럼 간다.” 바로 김우진을 데리고 가려 유아린이 몸을 틀었다. 서예린, 네가 어디까지 여유를 부리면서 말할 수 있나. 한 번 보자는 심정이었는데. 탁! 손목을 낚아챈 서예린. 손에 워낙 힘이 들어가 깜짝 놀란 유아린이 살짝 당황하며 서예린을 바라봤는데. “그, 아, 아린아?”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표정의 서예린이 그곳에는 서 있었다. “지, 진짜 할 거야아?” 이전까지 당당하니 경쟁하자고 말하면서, 서로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자던 서예린이. “그…… 이, 있잖아. 우진이가 오늘 몸이 안 좋아서어어.”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이었다. “꼬, 꼭 해야 할까? 아, 아니…… 내가 하고 싶고 그런 건 아니고오. 우지니 의사도 생각해야하고!” “…….” “그리고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오.” “……” “나, 남자는 한 번 하면 쌓여야 한다고 하는데…… 하, 한 지 얼마 안 돼서 지금은 힘들 거야! 응! 히, 힘들 거야!” “…….” “내, 내가 나중에 알려줄게! 우진이랑 확인해 보고……!” “예린아.” “으, 응?! 저, 절대 내 꺼라고 생각해서 막 그러는 건 아니야! 우, 우리 선의의 경쟁! 하기로 했으니까! 질투하고 그런 거 아니야!” 추했지만. “……귀엽네.” 그래, 솔직히 유아린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우진이랑 잔다니까 어쩔 줄 몰라서는 울상이 된 서예린의 모습이 귀여웠고. ‘똑같네.’ 자신이랑 똑같이, 여유 따위 없이 질투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뭔가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