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서비스.” 노크와 함께 외치자 문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익숙해진 업무. 이젠 긴장도 없이 멍하니 기다리고 있자니 문을 열고 나오는 가운을 입은 금발의 여자. “들어오세요.” 속옷 한 장 안 걸치고 가운만 입고 있었으나, 별다른 반응 없이 안으로 카트를 끌고 들어갔다. 여기서 괜히 힐끔거리거나 움찔 떨면 안 되니까. “식사 끝내시고 카트를 문밖에 두시면 수거해 가겠습니다.” 침대 앞에 카트를 놓은 후, 간결하게 설명해 주고 냉큼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편하게 있었다고 해도 헐렁한 가운만 입고 저렇게 밖으로 나올 줄이야. 의도치는 않았지만 처음 문밖으로 나왔을 때 가슴골이 노골적으로 빤히 보였다. ‘진짜로 있구나.’ 대리로 일하고 있는 선배들이랑은 꽤 친해졌기에 그쪽에서 여러 썰을 듣긴 했다. 아예 속옷만 입고 나오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고, 야간에는 밤일을 즐기시는 분들 소리가 밖으로 다 나온다고 한다. 왜냐면 문 아래로 틈이 있기 때문. 화재 같은 게 났을 때를 대비해서 일부러 문 아래 살짝 공간이 있다는데 그것 때문에 신음이 적나라하게 들린다고. 야간 타임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때 어떨지 직접 보고 싶었다. 흥얼거리면서 지하로 내려오자 이제 막 주문이 들어왔는지 주방에서 음식 나오는 걸 기다리고 있는 삼인방과 대리님들. “왔어? 바로 가야지.” “짬 때리시는 겁니까?” “내가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는 말이야…….” 웃으면서 대꾸하자 대리님들도 꼰대 느낌의 장난을 치셨다. 솔직히 나이가 엄청 차이 나는 건 아닌데 묘하게 개그 센스가 맞물리지 않는다. “아참, 그러고 보니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대리님들 개그 듣기 싫어서 방금 있었던 일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금발 미인 여성분께서 개방적인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셨다는 얘기를 했더니 대리님들이 바로 흥분하면서 달려들었다. “오오옷!? 거기 몇 호야?” “다음에 또 주문 들어오면 내가 간다!” “넌 클리닉 쪽에 여친 있잖아. 일단 들어오면 가위바위보부터…….” 다들 호들갑 떨면서 얘기하고 있는 걸 보니 결국 나이가 들고, 직장 생활해도 다들 비슷하다는 생각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러게…….” 뒤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한봄과 이세아는 혀를 내두르며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작 본인들도 자기들끼리만 있으면 섹드립을 막 쳐대지 않았던가. “…….” 그런 와중에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유아린. 분명 아까까지는 나름 기분이 괜찮아 보였는데 또 왜 이러나 싶다. “왜 그러시는데요.” 슬쩍 다가가서 엉기면서 묻자 유아린은 때마침 주방에서 나온 음식을 카트에 세팅하면서 나한테 밀어준다. “얼른 가.” “내 차례 아니거든?” 때마침 대리님 중 한 분이 오셔서는 냉큼 카트를 받아 가셨다. 다시 덩그러니 놓인 우리. 한봄과 이세아는 대리님들이랑 수다를 떨고 있고, 유아린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야, 나 팁 받았는데 끝나고 이걸로 편의점에서 플랙스 할까?” 슬쩍 만원을 꺼내 들며 묻자 유아린이 팔짱을 끼더니 새초롬하니 눈을 뜬다. “그것도 아까 쭉빵한 금발 누님이 주셨니?” “아니, 이건 다른 객실에서 받았는데.” “……그럼 좋아.” “금발 누님이 주신 돈이었으면 싫었어?” 갸웃거리며 묻자 유아린은 별다른 대답하지 않았다. 얘가 골드원에 오고 나서부터 뭔가 이상해진 게 맞긴 하다. 평소였으면 그냥 털털하니 말을 걸어오거나 괜히 장난치곤 했는데 최근에는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으니까. ‘쩝, 뭔가 그렇네.’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거리를 둔다니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서로 자주 투덕거리긴 했어도 그걸 나는 하나의 우정으로 여겼으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장난이 사실은 싫었던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힐끔 쳐다본 유아린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이서랑…… 연락해?” 뜬금없이 최이서? “으음.” 대답하기 어려웠다. 왜냐면. “안 받던데?” 요즘, 최이서가 연락을 안 받고 있었으니까. “안 받는다고?” 어깨가 살짝 들썩이며 뭔가 눈이 반짝거리는 게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유아린. “어, 연락이 안 돼. 무슨 일 있나 걱정돼서 걔 친구한테도 연락해 봤는데 친구 쪽도 안 받더라?” 민지한테 연락해 봤는데 따로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걱정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연락 안 된다고 여기 일을 버려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구나아.” “왜? 기쁘냐? 내가 똥볼 차고 있다니까?” “됐고, 편의점이나 가자. 어차피 주문도 안 들어오는데.” “사준다니까 바로 기분 좋아졌네.” 편의점이 호텔 1층 로비에 있어서 여기서는 다녀오는 데 5분도 안 걸린다. 어차피 주문도 없겠다 선배들한테 말해두고 잠깐 다녀오려고 했는데. “아린아! 이거 봐!” 연영과 이서아가 본인 핸드폰을 들고 우리한테 냅다 들이밀었다. 확인하니 SNS에 올라온 좋아요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글 하나. - 골드원 빵집 ‘대한당’ 직원 직촬. 거기엔 앞치마를 두르고, 빵을 진열하고 있는 서예린이 찍혀 있었다. “와.” “이거야 뭐.” 좋아요 숫자가 살벌하게 계속 올라가고 있으며 밑에 댓글들도 장난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대박이라고 난리를 치겠으나 오히려 우리는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예린이 이러는 게 한두 번이겠는가. “진짜 예린이는…….” 하지만 이서아는 달랐다. 나중에 연극배우나 뮤지컬 배우 쪽으로 가고 싶다고 들었는데 단순히 빵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주목받는 서예린이 부러운 모양. “괜한 거 부러워하지 마. 쟤도 그만큼 피곤하게 살고 있을걸.” 그런 친구에게 나름의 조언을 건네는 유아린. 정찬우와 관련해서 본인도 겪어봤던 일이라 그런지 꽤나 심금을 울리는 말이었다. “응, 그래야지.” 이서아 역시 유아린의 조언을 받아들여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걸 본 나는 고개를 저으며 꿍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서예린을 부러워 할 수가 있지.” 내 입장에선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정말 예쁜 거 원툴인데.” “그걸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옆에서 삐죽거린 유아린이 슬쩍 나를 쳐다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근데 너는 예린이랑은 별로 잘해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음?”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었으나. “너, 예린이랑도 했잖아.” “…….” “먹버야?” “미친년아!” “흐흐흫.” 뭔 소리냐고 바로 대꾸하자 유아린이 피식 웃는다. 선 넘는 발언이긴 했으나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선 취급도 못 받았다. “아니, 근데 맞잖아. 이서랑 한 다음에는 뭔가 걔랑 사귈 것처럼 굴고 있는데. 예린이랑 한 다음에는 별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 “모두가 염원하는 서예린이랑 했는데도 반응이 심심해서.” 뭐, 그때는 좀 과하게 취했던 경향이 있긴 했지만……. “나름 이유가 있어.” 내가 서예린을 그런 식으로 보기 힘든 이유가 좀 있었다. 이유가 있다니 궁금했는지 유아린은 더욱 캐물어 왔으나 나는 딱 선을 그었다.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서예린을 사귄다는 식으로 생각할 일은 없을 것 같아.” “흐음.” “왜? 못 믿겠어?” “어, 못 믿겠어. CC 안 한다고 오지랖 부려놓고 막상 이서랑 사귈까 고민하고 있어서 더 못 믿겠는데?” “그건…….” 할 말이 없네. 뭔가 대꾸할 말을 찾았으나 유아린은 다소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 * * 문득, 사람이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안 좋았다. 객실에 올라가서 금발 미녀의 가운 차림을 보고 왔다는 걸 무슨 업적처럼 자랑하고 있는 김우진이 꼴사납기도 했으며, 듣기 싫었으나. 막상 자신에게 다가와서 눈치를 보거나, 팁 받았으니까 같이 편의점 가자고 꼬시는 걸 보고 있자니 불편하던 마음이 조금씩 풀려갔다. 그러면서도 중간에 최이서가 연락이 안 된다는 점, 서예린과 연애적인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짚으면서. 유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점점 좋아진다는 걸 느꼈다. 입꼬리가 느슨해진 채로 편의점에서 뭘 사야 저것을 골려줄 수 있을까 고민도 해본다. “오늘 우리 방에서 파티해도 되냐?” “만 원 받았다고. 딱 그 안에서 사라고.” 짜증 내면서 말하는 김우진을 보자 히죽 웃음이 흘러나왔다. 애가 저렇게 짜증 내는 모습이 은근 귀여운 게 놀리는 맛이 있었다. ‘최근 괜히 이상한 말들을 들어서 그랬던 거야.’ 정찬우나 서예린이 자신이 김우진을 좋아한다는 말을 해버리는 탓에 뭔가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정작 지금처럼 친근하게 지내고 있자니 유아린은 연애적인 감정과는 좀 다르지 않나 생각이 들었고. 그런 식으로 확신이 점점 들기 시작하자 기분이 또 좋아졌다. “흐흥, 아이스크림 사서 다 나눠드릴까?” “왜 내 걸로 네가 생색내는 거냐고.” “쫌팽이.” “이 개……!” 뭐라 하려던 와중, 김우진의 핸드폰이 울려왔다. 룸서비스에서 주문 들어왔으니 얼른 오라는 건가 싶었으나. “나 통화 좀. 대충 네가 대리님들이랑 애들 것까지 좀 다 골라봐.” 냉큼 전화를 받으러 편의점 밖으로 나간 김우진. 약간 신나 하는 모습에 뭔가 싶어서 편의점을 전전하는 척하며 입구 쪽으로 다가가자. “어, 이서야.” 누군지 바로 알 수 있는 이름이 김우진의 입에서 나왔다. “…….” 뭐랄까. 설레하는 목소리가 괜히 듣고 싶지 않아졌기에 아이스크림을 고르러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 부스럭. 부스럭. 힘없이 아이스크림들을 휘적이고 있으나 정작 시선은 바깥으로 향해 있다. 웃으며 통화 중인 김우진.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걸까.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걸까. “하.” 이런 말을 해봤자. 사실 자신도 똑같다는 걸 알고 있다. 고작 몇 마디에 기분 나빠했고. 고작 몇 마디에 기분 좋아했다. “진짜.” 양손으로 얼굴을 폭 감싼 유아린은 오늘도. “짜증 나.” 자신의 감정을 부정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