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초반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4.5화를 보신 독자님들은 앞부분을 넘어가시면 뒤에 본편이 나옵니다!) 테이블에 모습을 드러낸 콘돔과 최이서를 번갈아 가며 보고 있자니 점점 술이 깨가는 걸 느낀다. 또렷해진 정신과 떡 벌어진 입. 방금 전까지 심란하던 감정이 현실을 직시하라고 뺨을 때리고 간 것 같은 충격 속. 여전히 포크를 입에 물고 있는 최이서는 손을 들어서 내 허벅지를 한 대 팍 때렸다. “아야!” 깜짝 놀라서 그녀를 쳐다봤으나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눈치 챌 수 있었다. 지금 최이서는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주먹질의 의미는 딱 하나. 뭐 하고 있냐고 재촉한 것이라는 걸 안 순간. 어느새 욕망에 잠식된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가 입에 물고 있는 포크를 뺏었고. 살짝 고개를 앞으로 내밀자, 생각보다 이르게 입술이 맞춰졌다. 서로 와인을 마셨기 때문일까. 진한 포도향이 머금어진 서로의 혀가 얽히는 순간, 이미 선을 넘은 걸 알 수 있었다. 어색해서는 다소 빳빳하며 조급해 보이는 최이서의 혀. 그녀의 등을 감싸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자 아쉬웠는지 입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최이서의 혀. “방금 마중 나오지 않았어?” 내가 생각했던 거보다 일찍 입술이 맞닿았다는 걸 언급하자 최이서는 당황해서는 뭔가 말하려 했으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나는 작게 속삭여주었다. “천천히, 침착하게.” 그리고 다시 한번 입을 맞춘다. 뭔가 분했는지 처음에는 나를 노려봤으나 곧이어 차분히 눈을 감았다. 혀의 움직임도 조급함보다는 오히려 다소 느긋하다 느껴질 정도로 느렸으나. 그게 딱 좋았다. * * * “주, 거어…….” 어느새 떠오른 태양. 밤을 지새웠던 시간이 드디어 끝나자 귀여운 독설을 날리며 쓰러진 최이서. 아까 아침 알람도 울렸으니 슬슬 골드원으로 갈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쿵쿵쿵! “야아앗! 전화 왜 안 받아!” 거센 노크와 함께 부르는 유아린. 뿐만 아니라. “아린이는 우진 씨 집 어떻게 알아?” “뭐야뭐야? 나 촉 되게 좋아!” 지난번에 PC방에서 봤던 서예린과 유아린의 고등학교 친구 둘의 목소리. 그렇다면 당연히. “예전에 같이 놀러 온 적이 있었어. 우리 말고 다른 애들도 다 같이. 그치 찬우야?” “응, 맞아.” 서예린도 포함되어 있었다. 쿵쿵쿵! “야아! 뭐하냐고!”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내 심장박동과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날카로운 유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가는 느낌을 받았으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어둠 속에서 전라로 엎드려 있는 최이서는 가쁜 숨을 흘릴 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뽀얀 엉덩이는 탐스럽기 그지없었으며 다시금 몸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고, 그냥 골드원 가지 말고 집에 있을까 같은 유혹적인 생각마저 들었으나. “아오, 미친놈.” 일단 정신을 차려야 했다. 욕망에 충실해서 살면 다음 학기에는 정말로 큰 형의 가랑이 사이를 기면서 돈 좀 보내달라고 애원해야 할 수도 있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오!” “아 왜! 일어났어!”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쾅쾅 문을 두드리는 유아린에게 소리치자 녀석도 반대로 짜증을 낸다. “이 자식아! 일어났으면 대답을 해야지! 골드원 안 가? 가서 돈 벌자고!” “알아서 일어날 수 있는데 왜 찾아왔어!” “뭐야. 마중 나와 줬는데 괜히 뭐라 그러네. 다 같이 가야 같은 버스에 탈 거 아니야.” 골드원에서 버스가 나온다고 듣긴 했다. 같이 가야 같은 버스에 탄다는 유아린의 말은 맞는 말이지만……. “이, 일단 가 있어. 나 씻어야 돼.” “뭔데. 지금 안 가면 늦어.” “택시 탈 거니까 걱정 마.” “흠.” 뭔가 미심쩍다는 유아린의 숨소리에 나도 모르게 현관문에 귀를 댄다. 어차피 이러지 않아도 들릴 소리는 다 들리겠지만 그래도 뭔가 긴장되어 이런 행동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 뭐. 그럼 우린 간다.” “어?” 그런데 너무나 뜻밖에도, 손쉽게 떠나겠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간다고. 얼른 택시 타고 와라, 알았지?” “으, 응! 알았어!” 냉큼 받아들인 다음 바로 집 안으로 들어간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정사의 향기. 일단 환기부터 좀 하려고 창문을 열자 추웠는지 최이서가 신음을 흘리며 살짝 움찔거린다. “아으, 이거 진짜 어떡하냐!” 일단 최이서에게 이불을 덮어준 다음, 간단하게 청소라도 할까 싶었는데. 주변에 널린 사용한 콘돔들을 치우고 싶어도 일단 가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이, 일단 씻자!” 샤워는 무리다. 머리 감고, 세수하고, 양치질만 해야겠다. 머리를 감으면서 동시에 세수하고, 양치질하면서 동시에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린다. 어차피 모자 쓸 거라서 스타일링은 신경 쓰지 않은 채로 밖으로 나오자. 이불로 몸을 가린 채 기어다니며 주섬주섬 다 쓴 콘돔을 정리하고 있는 최이서가 있었다. “아…….” “…….” 서로 눈이 마주친 우리. 어색하니 내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 최이서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가봐.” “아, 아니 그게…….” “가라고. 너 골드원 가서 돈 벌어야 하잖아.” “미……안.” “그러게 내가 그만하자 할…… 끄그윽!” 일어나려던 최이서는 순간적으로 하반신의 통증 탓에 인상을 찌푸리며 어정쩡하니 다시 엎드린다. 흐트러진 이불 사이로 보이는 최이서의 나체. 왜 그만하자고 하면서 계속 유혹하는 건지 모르겠네. “괜찮아?” “아, 아파…… 근육통보다 더 아파.” 아플 만하겠지. 최이서의 근처에서 어쩔 줄 몰라서 서성거리고 있자니 녀석은 나를 한 대 때렸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 집 열쇠 주고 가. 내가 여기 청소 좀 해둘게.” “감사합니다, 대이서 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면서 최이서에게 넙죽 절을 한 번 하자, 녀석은 그 틈에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웃는다. “너 없을 때 가끔 와도 괜찮아?” “상관은 없는데…… 와도 할 거 없는데?” 슬쩍 고개를 들자 최이서의 젖가슴이 눈앞에 예쁜 형태로 마중 나와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니 당연한 거겠지. 어제 저걸 물고 빨……. “뭘 봐.” 찌릿하고 쏘아보는 최이서의 시선에 냉큼 다시 고개를 숙인다. 팍 하고 뒤통수를 한 대 때리더니 냉큼 이불을 덮으며 매트리스에 눕는다. “그냥, 와서 가끔 네 생각하려고?” “…….” “두, 두 달 동안 못 보잖아.” 삐죽거리면서 입술을 내미는 최이서를 보고 있자니 진짜로 골드원 가기 싫어졌다. 최이서도 묘하게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는 걸 인지했는지 다급하게 말을 돌린다. “매트리스 엄청 축축해!” 누워있던 매트리스가 축축했는지 퍼뜩 일어나려다 하반신 통증 탓에 다시 쓰러진 최이서. 무슨 개그 하나 싶어 웃으며 덧붙였다. “그거 다 네가…….” 뻐억! 바로 얼굴로 날아온 베개 탓에 말이 이어지진 못했지만. 어쨌든 최이서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얼른 가. 짐은 다 챙겨뒀지?” “응, 진짜 진짜 고마워.” 다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쓴 다음 캐리어를 챙긴다. 마지막으로 현관문으로 나서며 슬쩍 뒤를 보자. 무슨 고양이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엎드린 채 최이서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끼이익. “근데 우진아, 이거 쓴 콘돔은 어떻게 정리해야 돼?” “아, 그거…….” 아무래도 좀 난해하겠구나 싶어서 대답해 주려는 순간, 현관문에서 찾아든 햇볕과 동시에 따가운 시선들. 인기척에 고개를 퍼뜩 돌리자. “…….” 거기엔 아직 가지 않은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이 멍하니 서 있었다. * * * “대, 대박 큰데? 그치?” 버스 줄을 기다리면서 나는 어색하니 텐션을 끌어올린다. 방긋 웃으면서 거대한 버스를 가리켰다. “주, 주희 선배는 다른 곳에서 버스 타신다고 했던가?” 옆에 있는 서예린에게 그리 말하자 녀석은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빤히 쳐다볼 뿐 다른 대답은 없었다. 나는 도망치듯 시선을 돌려서 반대편에 있는 유아린에게 웃으며 장난쳤다. “내가 안 늦는다고 했지?” “…….” 어쩌라는 듯 나를 올려다보던 유아린이 그대로 중지를 들어 올리면서 대꾸해 왔다. 흠, 평소의 유아린이군. 두 사람의 고등학교 동창인 디자인과와 연극영화과 친구분들 쪽으로 시선을 휙 돌리자, 둘은 어색한 대화하는 척을 뜬금없이 시작했다. “가, 가면 방 배정도 우리끼리 맞출 수 있겠지?” “그, 그렇겠지!” ‘아, 엿 됐다.’ 최이서와 나눈 대화까지 다 들렸겠지. 하필 그 타이밍에 문을 열어가지고. 두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일단 그나마 희망적인 찬우 쪽을 쳐다봤는데. “아, 아뇨. 저 친구들이랑 같이 왔어요.” “정말요?! 남자 분들이신가요?” “우와! 몇 명이요?” 벌써부터 버스 타는 대기 줄에서 헌팅 받고 있는 꼴을 보니까 뒤통수를 한 대 후려주고 싶었다. 쿡. “윽!” 그때 등을 찌르는 날카로운 무언가. 순간 섬뜩해서 뭔가 싶었는데 내 등에 바짝 달라붙은 서예린의 손가락이었다. 쿵. 이마를 내 등에 박으며. “좋았어?” 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속삭임으로 섬뜩한 물음을 이어가는 서예린. 쿵. “응? 어땠어?” 이마로 찍고,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섬뜩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아프진 않은데 뭔가 무서웠다. 쿵. “나랑 비교해서 어땠어?” 쿵. “그렇게 못 참았어?” 쿵. “차라리 날 부르지 그랬어.” 쿵. “응? 우진아.” ‘존나 무섭네, 진짜.’ 몸이 움츠러들어서 뭐라 말하고 싶어도 목소리가 안 나온다. 전신에 잔뜩 힘이 들어가자 이번에는 서예린의 손이 내 엉덩이에 툭 얹어졌다. “힘 풀어.” “……넵.” 천천히 힘을 풀자 말랑해진 엉덩이를 어루만지면서 다시금 머리를 냅다 박기 시작했다. “내 꺼잖아.” “그, 그건 아닌…….” 꽈악! “끄읍!” 엉덩이를 쥔 손을 갑자기 꼬집는 것처럼 힘을 준 탓에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쿵. “몇 번 했어?” 쿵. “나랑 섹프잖아.” 쿵. “혼자만 그렇게 즐길 거야?” 쿵. “진짜…… 우진이 큰일 나겠네.” 뭐가 큰일 난다는 건지. 정말 미치도록 무섭지만 그나마 버스 줄이 점점 줄어들면서 얼른 탈 수 있게 되었기에 서예린에게서 도망치듯 냉큼 버스에 탑승했다. 캐리어는 이미 버스 짐칸에 실었기에 텅 빈 손으로 앉을 곳을 고르고 있자니. 앞에서 먼저 가고 있던 유아린이 비어 있는 두 자리를 보고는 그대로 내 목덜미를 낚아채 안으로 집어넣었다. “우억!” 안쪽 자리에 강제적으로 앉게 되자 바로 옆자리에 냉큼 앉은 유아린. 뒤따라오던 서예린과 눈이 마주쳤는데 뭔가 소름 돋게 빤히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내 뒷자리에 앉는다. ‘모, 목 조르는 거 아니겠지?’ 무슨 살인사건 같은 거 일어날 것 같아서 옆자리에 앉은 유아린에게 작게 속삭였다. “야, 만약 내가 이 버스에서 죽으면…… 범인은 서예린이야.” 슬쩍 나를 본 유아린은 안전벨트를 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뭐가 글쎄야.” 왜 범인은 서예린이라니까 아닐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건지 난 정말 모르겠다. * * * 자신의 어깨에 슬그머니 얹어진 김우진의 머리를 보면서 유아린은 보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천천히 내렸다. 어제 별로 잠을 못 잤는지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곯아떨어진 김우진. 덕분에 뒷자리에서 꿍얼거리던 서예린도 다소 잠잠해졌다. 호들갑스럽던 방금 전이랑 달리 지금은 또 순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유아린은 복잡한 기분을 느낀다. 나체에 이불만 걸치고 있던 최이서가 콘돔 관련 얘기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어제 두 사람이 밤을 지새우며 뭘 했는지 알 수 있었는데. ‘짜증 나네.’ 그게 이상할 정도로 짜증나는 상황. 당장이라도 뺨을 후려갈겨서 김우진을 깨울까 고민하다가도.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만 푹 숙였는데. 그러자 눈에 들어온 봉긋한 본인의 흉부. 최이서보다 작은 편이긴 했으나 그래도 김우진이 좋다고 만지작거렸던 때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개자식.” 씩씩거리며 화가 난 유아린은 결국 뺨에 딱밤을 한 대 때렸음에도 살짝 몸만 떨 뿐 깨진 않았다. 두근거렸던 그날 밤. 자신의 가슴을 양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뭔가에 홀리듯 굴던 김우진의 모습. 유아린은 가슴 속에서 뭔가 찌릿하고 차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슬그머니 시선이 팔걸이에 놓인 그의 손으로 향했다. “…….” 어느새, 그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얹은 자신의 손. 손등을 간질이거나, 살짝 꼬집거나, 손가락을 하나하나 만지작거리고 비비듯 만져보는 등. 생각보다 듬직한 손이 자신을 훑었던 그날이 떠오르며, 몸이 달아오름을 느낀 유아린은 깜짝 놀라며 손을 뗐다. ‘정신 차려, 유아린!’ 저긴 전장이다. 서예린과 최이서라는 두 호걸들의 전쟁터로 함부로 끼어들 생각은 일절 없었다. 그렇기에 유아린은 심호흡하며 절제하듯 팔짱 껴서 양손을 모으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등을 만지작거리며 노는 걸 3번은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