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끊기고 나는 멍하니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큰형이 말했던 '또'라는 말이 귓가에 아른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형한테 찾아가고 싶었지만. 오히려 이런 것도 형의 작전이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드니 괜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형이 윤지에 대해 알고 있다.' 내가 사귄 건 대학에 들어와서였고, 대학에 들어온 뒤로는 따로 집안사람들이랑 연락하지 않았다. 한 학기 사귀고 금방 헤어지기도 했으니 이미 꽤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는데. “후우.” 쓰라린 탄식과 함께 다시 자리에 앉았다. 뒤통수가 쿡쿡 찔리는 게 기분이 나빴다. 특히나. ‘혹시’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뭔데, 왜 갑자기 진지한데.” 내가 갑자기 정색하며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자 뭔가 의아함을 느꼈는지 갸웃거리는 유아린. 형이랑 서로 욕을 주고받으니 친한 사이인 줄 알고 장난을 쳤던 것 같은데. “에휴, 잘했다.” 반대로 유아린의 장난이 없었으면 형이 나와 오윤지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걸 몰랐을 거다. 유아린의 톡톡 튀는 개성……이라기보다는 그냥 미친 짓이 우연찮게 맞아떨어졌다고 봐야겠지. “형한테 어깨 으쓱거릴 수 있는 거 아님?” 장난치듯 웃는 유아린. 사과할 준비 하며 눈치 보던 주제에 내가 괜찮다고 말하니까 바로 기고만장해진 게 우습게 느껴졌다. 뭐, 우리 집안 문제는 그냥 집안으로 넘기면 되는 거고. 지금 해야 할 건 유아린이 아까 했던 말에 대해서였다. “야, 아까 뭐야. 찬우가 나 여기 있는 거 알려줬다는 거.” 한숨을 내쉬며 신발을 벗고 의자 위에서 아빠 다리로 앉은 유아린이 심드렁하니 답했다. “멀 뭐야. 말 그대로지. 찬우가 나한테 네가 여기 있는 거 알려줘서 그냥 온 거라고.” “그걸 찬우가 왜 알려줘.” “내가 어떻게 아냐고!” 이렇게 계속 대화해봤자 영양가 있는 대화는 나누지 못할 듯했다. 그냥 나중에 찬우한테 솔직하게 물어봐야지 그게 속 편할 듯했다. “……근데 찬우가 알려줬다고 왜 와?” 그냥 넘기려다가 한마디 덧붙이자 유아린은 의자를 휙 돌리며 짜증 낸다. “너 편집 잘하고 있나 보러 왔다. 꼽냐?” “편집 잘했고. 주희 선배가 다 보시고는 잘했다고 칭찬도 해주셨음.” “……그 정도라고?” 유아린에게도 내가 편집한 영상을 보여주자 녀석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랐다. “뭐야, 잘했네?” 이 녀석조차 이렇게 솔직하게 칭찬할 정도면 진짜 잘하긴 했구나. ‘차라리 편집자 같은 걸 해볼까?’ 이미 캠핑은 진즉에 때려쳤고, 이번 겨울을 지내기 위해 알바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너튜버 편집 같은 경우는 건별이라고 들었으니 제대로 배운 다음 편집자로 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음? 아린이도 왔니?” 그때 탈취제 냄새를 풍기면서 다가온 주희 선배. “선배, 안녕하세요!” 둘이 같이 조잘거리며 떠들기 시작했고, 나는 컴퓨터로 구직 사이트를 슬쩍 둘러보기 시작했다. * * * 생각보다 PC방에 오래 있었다. 유아린은 따로 게임을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고스톱에서 돈을 다 잃고 포커로 넘어가신 주희 선배랑 같이 게임을 하게 된 탓에 오래 있게 되었다. 주희 선배는 이런 게임으로는 퍽 재능이 없어 보였지만 유아린은 잘하는 게 좀 의외였다. 어쨌든. 저녁도 PC방에서 먹었겠다 딱히 볼 일도 없어서 슬슬 일어나는데. 사탕을 입에 문 채로 멍하니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 유아린. 왜인지 이제는 윷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너 뭐하냐. 안 감?” 슬쩍 부르자 유아린은 내 쪽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좀 있다 갈게.” “…….” 말투와 분위기가 평소랑은 달랐다. 이제 곧 찬우의 알바 시간이 끝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마 찬우랑 끝나고 얘기를 좀 하다가 갈 생각인 걸로 보였다. “그래, 잘해라.” 의자 등받이를 툭 쳐주곤 주희 선배랑 같이 밖으로 나간다. “끄으응! 시원하다!” 기지개를 켜면서 후련하게 소리치는 주희 선배. PC방 내부가 난방이 잘 되어 있던 덕분에 살짝 더웠는데, 밖으로 나오니 상쾌할 정도로 시원한 게 기분이 좋았다. “우진이는 자취방으로 바로 가냐?” “네, 피곤해서 슬슬 가려고요.” “그려, 어휴. 나는 지긋지긋한 기숙사로 다시 가봐야지.” 스트레칭하듯 몸을 이리저리 푼 주희 선배가 그대로 인사하며 가려고 하셨는데. “선배, 기숙사 어때요?” 아까 이런저런 알바 관련해서 알아보면서 든 생각 중 하나가 바로 기숙사였다. 큰형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마 금방 들어오는 돈이 끊길 거다. 당장에는 모아둔 돈이 있으니 문제없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알바하면서 학비와 월세를 부담하는 것보다는, 2학년에는 기숙사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내 질문에 선배는 갸웃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으신다. “뭐야, 2학년부터 자취 안 하고 기숙사 들어오려고? 힘들 텐데.” “힘들어요?” “우리 대학 기숙사가 좀 커서 다른 학교에 비해서 경쟁이 좀 적긴 하거든? 게다가 근처에 원룸들이 싸게 많잖아.” 그건 맞다. 가현대는 근처에 원룸이 상당히 많은 덕분에 학생들이 지내기 좋은 대학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근데 보통 1학년들은 다 들어오고 2학년부터는 거의 지내던 사람만 받아줘.” “아아.” 3, 4학년 같은 경우가 기숙사를 쓴다는 건 거의 못 듣긴 했었다. 진심으로 아쉬웠기에 탄식을 흘리자 빤히 보시던 주희 선배가 슬며시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셨다. “선배한테 잘할 거야?” “네?” “이번 과제, 편집 똑바로 잘할 거야?” 뭔가 일부러 이유를 붙여주고 있는 주희 선배에게 나는 바로 호들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넵! 당연하죠!” “흐흐흐.” 뺨을 꼬집으시며 내 등을 치시더니 그대로 끌고 가기 시작하셨다. “가즈아. 놀랍게도 4학년인데 아직도 기숙사에서 죽치는 누님이 한 분 계신다.”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몰러. 알아서 잘 버티는데 뭐 어때. 그 누님한테 가서 기숙사 신청하는 꿀팁이라도 좀 들어보자.” 그래 주면 나야 고맙긴 한데. “근데 언니 아니에요?” 선배가 누님이라고 부르는 게 너무 잘 어울려서 나도 모르게 그냥 넘어갈 뻔해서 묻자. “누님이든 언니든 뭐가 문제야.” 역시 대장님이시다. “아참, 가면서 뭐 먹을 거라도 좀 사가자. 그 누님이 좀 많이 까다로운 사람이거든.” “……4년 동안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으면 그럴 만하죠. 뭐 좋아하는 게 있으시려나.” “대충 에너지 드링크 같은 거 몇 개 사 가면 좋아하지 않을까? 가뜩이나 최근 바쁘다고 축 늘어져 있던데.” “4학년이면 졸업 때문에 바쁘긴 하죠.” 끄덕거리며 답하자 주희 선배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교랑 대학원 동시에 간다는데? 미친 줄 알았잖아.” “아하……?” 뭐지. 왜 같은 상황인 사람이 하나 바로 떠오른 거지. “혹시 그 사람 물치과에 키가 좀 작고, 안경 쓰고 다녀요?” “어? 맞아. 아는 사이야?” “아, 그렇구나. 뭐 사 갈 필요 없겠네요.” 편의점은 개뿔. 그냥 바로 기숙사로 돌격하면 될 듯했다. * * * 김우진과 민주희가 PC방 밖으로 나가고 30분 정도 지났을까. 지긋지긋한 윷놀이를 멍한 표정으로 하고 있던 유아린은 옆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슬쩍 눈을 흘긴다. 일이 다 끝났는지 코트를 걸치고 있는 정찬우. 일부러 정찬우를 보겠다고 이곳, 제로PC방까지 오는 여자들의 시선이 앙칼지게 유아린에게 꽂혀 들어왔다. “끝났냐.” “응, 가자.” 사탕은 이미 다 먹고, 아까 산 쭈쭈바를 입에 물고 있던 유아린은 컴퓨터를 끄면서 벌떡 일어섰다. 시기 어린 시선들이 유아린에게 쏟아지면서도 또 반대로,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포기하는 사람들도 몇 보였다. PC방 밖으로 나와 찬 공기를 마시면서도 묘한 기분이었다. 이상하게도 답답한 느낌. 단순히 분위기나 바람 때문이 아닌, 함께 있는 사람 때문이라는 걸 유아린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집에 데려다줄게.” “그려.” 할 말을 정리하고 싶은 걸까. 자신을 데려다주겠다는 정찬우의 호의를 굳이 거절하진 않았다. 예전에는. 그래, 예전에는 분명 이런 식으로 같이 집에 가는 게 불편하지 않았는데. 집으로 가는 골목을 거닐며 유아린은 힐끔 정찬우를 쳐다봤다. 배우를 해도 충분한 잘생긴 외모. 비율도 좋아서 코트 하나만 덜렁 걸쳐도 충분히 잘 꾸민 것처럼 보이며. 매너도 훌륭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조심성이 있기도 했다. 잘생긴 걸 알지만 잘생긴 걸 티 내지 않는다. 좋은 애였다. 찬우도. “표진호 선배한테 얘기 들었어.” 기껏 입을 연 찬우가 내뱉은 건 표진호에 대한 이야기였다. “거절했다며. 그것도 엄청 세게. 그래서 진호 선배가 꽤나 충격을 받으셨나 봐.” “그럴만했지.” 과하게 말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마음은 후련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로 돌아가면 해주고 싶은 말이 좀 더 있었다. “대단하네. 나는 아직 선배가 무섭던데.” “무서울만하지.” 설렁설렁 답하는 유아린을 보며 찬우는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우진이가 도와줬어?” “…….” 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유아린은 걸음을 멈추고는 찬우를 쳐다봤다. 여러 의미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찬우는 어색하니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린다. “그냥, 그냥 궁금해서.” “도와줬어. 안 도와준 척하고 있지만 도움받았어.” 김우진은 유아린의 촌철살인에 자신은 조금도 지분이 없다고 말하겠으나, 유아린은 알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와 흐름을 만들어준 게 바로 김우진이라는 걸. “아린아.” “왜.” “우진이 좋아해?” “…….” 그 말에 유아린은 미간을 팍 찌푸리면서 정찬우를 노려본다. “미쳤니? 아니거든?” “…….” 발끈하며 소리치는 유아린을 멍하니 쳐다보는 정찬우. 그런 정찬우가 무슨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유아린은 쏘아붙이듯 외쳐댔다. “걔 좋아하는 애가 얼마나 많은지 아니? 그거 지금 끼어들면 자살행위야. 왜 내가 폭사하러 거기에 껴들어야 해.” “그래?” “예린이랑 영문과 과대 최이서도 있어. 미안한데, 나는 자살행위에 취미 없어.” “그렇구나.” “그니까. 오늘처럼 갑자기 김우진 위치 같은 거 알려주지 마라. 답지 않게 돕겠다고 지랄하지도 말고.” “알았어.” 힘없는 대답에 유아린은 정찬우를 노려보면서 가슴팍을 주먹으로 팍 때렸다. “알아들은 거 맞아?” “응, 알아들었어.” “에휴, 애가 매가리가 없냐. 됐다, 난 그냥 간다.” 그리 말하고 황급히 길을 따라 달리는 유아린. 그녀의 등을 보면서 정찬우는 추억에 잠겼다. 유아린은 알고 있을까? 고등학교 때, 똑같은 질문을 했다는 걸. ‘너 나 좋아하냐?’ ‘미쳤니? 아니거든?’ 그리고 당시의 자신에게 했던 대답과 똑같은 답을 했다는 걸. 고등학교 시절 이 길을 걸어가던 두 사람은 늘 같은 표정이었다. 풋풋하고, 설렘이 담겨 있었다. 서로 좋아하지만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하는 게 오히려 더욱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사람은 서로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이 길을 걸었었다. 시간이 지났고. 여러 사건이 있었으며.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낀 찬우의 고개가 떨어졌다. 무서웠기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줬고. 무서웠기에,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고백했었다. 어느새. 이 길을 걷는 그녀의 표정이, 예전과는 달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풋풋하고, 설렘이 넘치는 사랑을 하는 자신과는 다르게. 이미. 망가졌으나. 다시 일어난 그녀는. 덤덤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아마 다시는. 그때의 표정을 보지 못하겠지. “지랄하고 있네.” 펑펑 쏟아내던 눈물 탓에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보이는 건 금발의 소꿉친구였다. 팔짱을 낀 채로 삐딱하니 노려보고 있는 유아린과 눈을 맞춘 정찬우는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런 정찬우에게 유아린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독설을 쏘아낸다. “아파? 나도 아팠어. 너한테 차이고, 예린이랑 네가 사귄다는 소리 들었을 때.” “…….” “여기서 똑같이 울었어.” “아…린아.” “참 좋아했던 거 맞아. 진짜 없으면 안 될 것 같던 것도 맞는데.” 우습지 않은가.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 지금에 와서는 밈처럼 여겨지고 있으나. 그건 꽤나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꿰뚫는다고 봐야했다. “표진호를 무서워했던 거랑 똑같아. 내가 너를 좋아했던 것도, 네가 나를 좋아했던 것도.” 결국에는. “시간이 지나니까 생각보다 별거 아니더라.” 같은 맥락의 실수를 또 반복할 거냐고. 유아린은 정찬우에게 묻고 있었다. 표진호가 무서워서 움직이지 못했던 예전처럼, 지금도 그냥 앉은 채로 슬퍼하다 힘들어할 거냐고. “좋아했었어.” 마치 따라 해보라는 듯 유아린이 씩 웃으며 말하자. 머뭇거리던 정찬우는 다급히 눈물을 닦고, 허리를 세우며 답했다. “좋아……했었어.” “그래, 그럼 됐어.” 따끔한 청춘을 보냈다. 덕분에 알싸한 성장을 해냈다. “가자, 친구야.” 명백하게 선을 긋는 유아린에게. “그래, 친구야.” 정찬우도 새어 나가는 눈물을 억지로 닦아내며 답했다. 둘은 여전히 골목길을 걸어간다. 고등학생 때도 그랬고. 대학생인 지금도 그렇고. 사회인이 되어서도 그럴 수 있겠지. 풋풋하고 설렘이 느껴지던 분위기는 둘 사이에 이제 없었다. 그때의 분위기와 표정은, 다시는 서로에게 향하지 않겠지. 하지만. 둘은 여전히.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