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충. 노예 1호. 검치검팬. 뒤를 이어서 인간도살자라는 칭호까지 획득하게 된 유아린과 함께 나는 국밥을 먹는 중이었다. 국밥집은 주말이라 그런지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이 많았는데 다들 술잔을 기울이면서 이것저것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국밥만 열심히 먹고 있는 우리 둘. 기대하진 않았는데 생각보다 맛있어서 나름 만족하며 먹고 있는데 유아린이 계속 내 쪽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걸까 싶어서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우리 사이에 진한 시선이 오간다. 마치 서로의 마음을 탐닉하듯 조심스럽고 매우 천천히 눈동자에 담긴 진의를 쫓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 뭔지 알겠어?” 같은 생각을 했는지 유아린도 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 방금 전 표진호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려던 때. “깍두기 왜 혼자 다 먹냐.” 유아린은 인상을 확 찌푸리면서 텅 비어있는 깍두기 그릇을 턱으로 가리킨다. “깍두기 안 먹는 거 아니었어?” “한 입 먹을 때마다 하나씩 퍼먹는 거면 국밥을 먹는 게 아니라 깍두기를 먹는 거라고 봐야 하는 거 아냐?” “……여기 깍두기 맛집이네. 직접 담그시나.” 어색하니 일어나서 셀프바에서 깍두기를 퍼온다. 그러자 이제야 유아린도 깍두기를 먹으면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깍두기 맛집 맞네.” 아삭아삭하는 소리와 함께 국밥을 계속 먹는다. 24시 국밥집이라고 해서 맛에 자신 없는 건가 했는데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소주 시킬까?” 그때 슬쩍 물어오는 유아린. 너무 뜬금없기도 했고 굳이 마실 필요가 있나 싶었기에 되묻는다. “왜? 마시고 싶어?” 갑자기 웬 소주인가 싶었는데 유아린은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이마를 쓸어 넘기며 끄덕였다. “어, 솔직히 좀 마시고 싶네.” “하긴 사람을 반 죽여 놓고 제정신이면 그게 이상한 거긴 해.” 생각해 보니까 반 정도는 말로 살인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소주 정도는 마셔줘야겠지. “그…….” 안 죽였다고 대꾸하려고 입을 열었던 유아린이 별말 못하고 다물었다. 다시 생각해도 표진호를 반 죽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모양이다. “네가 판 깔아줘서 그런 거잖아. 솔직히 너 일부러 내가 거절할 수 있게 그렇게 굴었던 거지?” “그게 아니면 그 사람은 너 포기 안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남자친구라고 말했으면 나중에 나한테 찾아왔을 것 같은데?” 유아린이랑 헤어지라고 말이다. 그럼 나는 졸지에 사귀지도 않는 애랑 헤어져야 하는 사람이 되는 거다. “그건…….” 이 역시 부정하지 못한 유아린. “에휴, 시킬 거면 시켜. 소주 마시고 기분이 좀 풀리면 그게 좋은 거지.” “사실 기분은 아까 풀렸어.” “…….” 하긴. 그렇게 쏟아냈는데 기분이 안 풀렸으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니겠는가. 시원스럽게 웃으면서 금방 나온 소주를 마시는 유아린. 나한테도 한 잔 따라줬으나 다음부터는 자기 혼자 쭉쭉 마셔댄다. “너무 혼자 달리는 거 아니냐?” “넌 별로 마시고 싶지 않잖아. 그냥 분위기만 내라고 준 건데?” 이런 눈치는 또 기가 막히게 빠르다. 딱히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기에 벌컥벌컥 마셔대는 유아린만 멍하니 볼 뿐이었다. “아, 조타.” 무작정 달렸다 보니 벌써 혀가 살짝 풀린 유아린은 몽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조타고.” “그래, 술 마시니까 기분 좋겠지.” 나한테 호응을 바라는 그녀에게 대충 대꾸하자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젓는다. “푸념할 수 있는 시간이라 좋은 거야. 술 마셔서 제정신도 아니고, 내가 뭐라고 말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들어주는 네가 여기 있고.” “…….” “찬우한테 차였을 때, 이유가 뭔지 알아?” 안다. 왜냐면 아까 유아린이 고백을 거절하면서 다 말했으니까. 하지만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였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고. 히죽 웃은 유아린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진호 선배가 나를 좋아해서였어. 웃기지 않냐? 본인도 나 좋아했으면서 다른 선배가 나 좋아한다고 물러난 거야.” 그건 물러났다는 게 아니라. 무서워서 도망친 거라고 봐야겠지. 하지만 찬우를 무작정 욕할 생각도 없었다. 그 나이 또래에는 원래 선배들이 그렇게 무서운 법이니까. 아마 찬우도 몇 번이나 그때를 후회했을 거다. “그런 다음 선배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정찬우랑 예린이가 딱 어울리는 커플 아니냐면서 애들한테 소문 퍼트리더라. 나중에는 둘이 사귄다고까지 말 나왔어.” 유아린은 서예린이랑 친구다. 그런데 유아린이 고백한 정찬우랑 서예린이 사귄다는 이야기가 나돌면 당연히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마련. 표진호가 거기까지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냥 가장 강력한 라이벌을 치우고 싶은 마음에 저지른 일이겠지. 소주가 가득 담긴 잔을 내려다보면서 유아린은 쓰게 웃어 보였다. 당시를 회상하는 건지 아니면 지금의 본인이 우스운 건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질투가 나더라.” 유아린이 그동안 보였던 기이한 행동들이 어렴풋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헛소문인 게 당연한데. 그때는 눈 돌아가서 그런 것도 모르고 내 소꿉친구인 찬우랑 예린이가 사귄다는 게 질투가 났어.” “…….” “아, 추하다 유아린. 어쩜 이렇게 등신 같냐.” 다시 한 잔 쭉 들이킨 유아린이 고개를 휘적휘적 저으며 중얼거린다. “이렇게 쉬웠는데. 그냥 꺼지라고 말하면 그만이었는데 그때는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눈치나 보고 다녔던 걸까.” “학생 때는 원래 그런 거 알잖아.” 대학교에 들어오고, 성인이 되면서 본인에게 생각 이상으로 여러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상 지금 우리는 성인으로 넘어가는 아이들. 몸은 컸으나 아직 마음만큼은 학생을 완전히 벗지 못한 반푼이. 그러니까 이 시기에 여럿 배워가고 있는 거겠지. “이렇게 하나씩 어른이 되는 거겠지.” 자신을 괴롭힌 일진이, 커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유아린과 정찬우도 표진호라는 남자가 사실 생각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을 뿐이다. 딱 그 정도인 사건이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내가 그리 말하자 유아린은 멍하니 나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뭘?” “그냥, 이것저것.” 아직 놓기에는 너무 이르다. 특히나, 소꿉친구로서 어렸을 때부터 키워온 예쁜 사랑 같은 경우는 말이다. 내 말을 들은 유아린은 숨을 깊게 내쉬며 꿍얼거렸다. “예린이한테 또 질투 나려고 하네.” “질투할 게 뭐 있나.”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하자 유아린은 키득거리면서 잔에 소주를 채워 넣는다. “야, 우리 처음 PC방에서 만난 날 기억하냐?” “기억하지.” 덕분에 영화 각본도 짜고, 주희 선배랑 술도 마시지 않았던가. 그리고 최이서 집에 두 사람을 데려다줬었지. “그때 나 안 취했었다.” “음?” “취한 척 연기한 거라고. 너 떠보려고.” “……나를 왜 떠봐?” 유아린이 금방 깨서 집에 돌아갔다는 건 이미 최이서에게 들었다.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던 걸까? “네가 어떤 놈인지 알고 싶어서. 예린이는 그때부터 은근히 너한테 관심이 있었거든.” “…….” “그래서 알고 싶었어. 예린이가 어떤 놈한테 관심을 가졌나.” “왜?” “질투하고 있었으니까.” 술을 마셔서 그런 걸까. 새벽이 와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나라서 그런 걸까. 아까부터 시작해서 유아린은 계속해서 자신의 속마음을 후련하게 털어놓고 있었다. 다소. 어두운 부분까지도. “네가 나쁜 놈이길 바랐어. 예린이가 잘못되길 바라진 않았지만 그냥 네가 나쁜 놈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 “딱 거기까지였어. 그냥, 살짝 아픈 사랑 정도를 하고 그치는 정도? 아마 순진한 애가 푹 빠질 것 같았으면 어떻게든 뜯어말렸겠지.” “이런 말 좀 그런 거 아는데. 서예린은 사실 단순 피해자잖아.” 서예린의 편을 든다고 생각할까. 하지만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했기에 언급하자 유아린도 인정한다며 끄덕였다. “알아, 그러니까 내가 존나 추한 년인 거야. 근데 어쩌냐, 찬우도 뺏기고, 이상한 새끼가 매일같이 들이대고. 나도 제정신은 아닌 채로 어른이 된 거겠지.” 스스로 반성하고 있는 유아린에게 굳이 더 뭐라 한마디 하고 싶진 않았다. 그건 내가 아니라 전부 알게 된 이후, 서예린의 선택이겠지.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그래서 어땠는데?” 분위기를 풀듯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유아린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였고. 그런 나를 빤히 보던 유아린은 실소를 흘리며 답했다. “예린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 “좋은 놈이야.” 고개를 슬며시 숙이며 눈을 피한 유아린. “우진아, 너 좋은 놈이라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몸에 긴장이 풀렸다. “고마워라.” 인정받았다는 게 기쁜 게 아니라 저런 속마음까지도 다 털어놓는다는 게 기뻤다. “아아.” 입 밖으로 쓰라린 탄식을 흘리며, 살짝 고인 눈물을 다소 부자연스럽게 숨기곤. “왜.” 억지를 부리듯 유아린은 슬퍼했다. “좋은 사람인 거야.” 마치, 그것이 문제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