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먹자.” 아직도 내 매트리스에 누워 있는 유아린이 핸드폰을 보면서 중얼거린다. 정말로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갈 생각인 것 같은데……. “우리 집 저녁은 라면이다.” 미안하지만 치킨 같은 음식은 우리 집 저녁 메뉴에 들어가지 않는다. 치킨을 엄청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도 하고 굳이 사먹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까. “아, 뭔 라면이야. 회식하자니까.” “나중에 서예린이랑 최이서 그리고 찬우까지 불러서 그때 회식하자.” 나름대로 머리를 쓴 거였는데 그게 바로 읽혔는지 유아린이 발끝으로 내 등을 툭 친다. “너 그거 지난번에 술 취했을 때 집 데려다준 거 퉁치려고 그러는 거지.” 예리한 년. 이전에 나 술 취해서 집에 데려다줬던 거 고마워서 밥 사는 거랑 겸사겸사하려고 했는데. “아! 치킨! 치킨 먹자고오!” 계속 발로 등을 두들기는 유아린. 얼른 꺼져줬으면 싶으면서도 좋은 냄새가 나는 게 괜히 남자로서 두근거린다. ‘아, 씨.’ 아까 유아린이 이상한 짓하면서 유혹하는 것만 아니었으면 저 녀석을 이렇게 보는 일은 없었을 텐데. “적당히 해라.” “아니면 애들 다 불러서 같이 먹을까?” “일 크게 벌리지 말고.” 살짝 고민한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일어선다. 마침 밖에 갈 준비도 다 했겠다 주말이니 외식을 해볼까. “어디 가게?” “밥 먹자며. 저녁이니까 가자, 내가 사줄게.” “치킨 먹자니까?” “무슨 치킨이야. 그냥 나가서 밥이나 먹자.” “에휴! 사준다니까 따라간다. 뭐 먹을 건데?” 매트리스에서 드디어 일어나서는 다시 스냅백을 쓰고 따라오는 유아린에게 심드렁하니 답한다. “김밥천국.” “다시.”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선 유아린이 팔짱을 끼면서 나를 노려본다. “다시 말해.” “김밥천국 갈 거라고.” 가서 치즈 돈까스랑 참치김밥 먹을 거다. “너 여자 친구 있었다고 하지 않았냐?” “왜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냐.” “아니,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센스가 이렇게 없어? 지금 나 데리고 김밥천국을 가겠다고?” “네가 내 여자친구야?” “그래도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잖아.” “너 김밥천국 무시해?” “그건 아니지만 메뉴가 많은 대신 맛이 무난하잖아.” 해당 메뉴만 파는 전문점보다 맛있을 수는 없다는 건 분명 사실이지만. “그래도 김밥천국만의 매력이 있어. 먹기 싫으면 집에 가고.” “아, 진짜.” 투덜거리면서 결국에는 따라올 수밖에 없는 유아린이었다. 김밥천국은 집에서 좀 거리가 있었기에 슬리퍼를 신은 채로 걷고 있자니. “야.” 유아린이 핸드폰을 보면서 걷다가 전봇대에 부딪칠 뻔한 걸 내 쪽으로 잡아당겨 구해준다. “뭐해. 길에서 핸드폰 하지 마.” “아, 미안. 이게 생각보다 재밌어서.” 뭔 소리하는 건가 했는데 유아린의 핸드폰에 떠오른 건 대나무숲. 아까보다는 좀 식긴 했으나 여전히 대나무숲에서는 관리인1호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내 얘기하고 있는 게 뭔가 재밌네.” “관종이구나?” “그런 듯?” 생각해 보니까 나는 유아린 때문에 핸드폰도 제대로 확인을 못 했다. 거리에서 핸드폰 하지 말라고 방금 말했는데 꺼내는 것도 이상하니까 김밥천국까지 갔다. “나는 치즈 돈까스에 참치김밥 먹을 거야. 넌 뭐 먹을래?” “으음, 오므라이스. 그리고 쫄면 시켜서 같이 먹지 않을래?” “……그래.” 원래 나눠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전 여친이 워낙 나눠먹는 걸 좋아했던지라 일종의 노이로제가 걸렸다고 볼 수 있었으나. ‘돈까스에 쫄면은 또 못 참지.’ 양이 많아서 쫄면은 못 시키고 김밥만 시키려고 했는데 이러면 쫄면까지 먹을 수 있으니까 좋다. 주문한 이후, 이제야 핸드폰을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유아린 쪽에서 오히려 핸드폰을 넣으며 턱을 괸다. “근데 너는 왜 대나무숲 관리자야? 너도 나처럼 전대 관리자를 찾아낸 거야?” 아무래도 대나무숲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는 모양이다. “아니, 나는 그냥 아는 선배가 와서 해보라고 해서 한 거야.” 딱히 엄청난 이야깃거리는 되지 않는다. 애초에 커뮤니티 관리하는 귀찮은 일이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나는 물을 홀짝이며 가볍게 조언한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쉬엄쉬엄하는 게 좋아. 어차피 대학 커뮤니티라 선 넘는 건 잘 안 올라와.” “그렇구나아.”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 유아린이 조금 신기했다. 곱창집에서처럼 노발대발하면서 달려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적성에 맞는 애를 뽑은 건가? 자기한테 관심 주는 것도 좋아하는 것 같고, 평소 심심하다고 입에 달고 살곤 했으니까. 다시금 유아린이 대나무숲을 확인하는 걸 보고 나도 핸드폰을 꺼내든다. 지난번부터 하던 모바일 게임을 할 생각이었는데. “음?” 조금 뜬금없는 사람한테 톡이 와있었다. ‘서예린이네?’ 무슨 일로 주말에 톡을 했나 싶었다. 어제 곱창집 사건은 정찬우가 서예린 데려간 다음에 있었던 일이라 모를 텐데. “왜? 왜?” 뭔가 재밌는 냄새를 맡았는지 고개를 빼꼼 내미는 유아린. 바로 이마를 손으로 밀어낸다. “서예린한테 연락 와서.” “예린이한테?” “응, 뭐하냐고 묻네. PC방 가자는 건가?” 최근 같이 게임 안 한 지 좀 되긴 했다. 주말이라 심심하기도 하니까 같이 갈까 했는데. “흐음? 예린이가?” 뭐가 재밌는지 교활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살짝 거슬린다. “역시 예린이가 네가 꽤나 마음에 드나봐.” 그러더니 뜬금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응? 뭔 소리냐.” “내가 알기로는 예린이가 남자한테 먼저 이런 문자 보내는 건 처음일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네가 서예린이야?” 어이가 없다고 답하자 유아린은 혀를 차면서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야, 예린이가 톡 보내면서 뭐하자는 거 보면 은근 관심이 있다는 건데 그걸 놓치는 남자가 있겠어?” 근데 지금까지 서예린은 모태솔로니까 이런 문자를 보내는 게 처음일 거라는. “소설을 써라.” 아주 개소리를 그럴듯하게 지껄이고 있는 걸 듣자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그럼 최이서도 나한테 관심 있네? 운동하자고 방금 톡 왔는데.” “…….” 내 말에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한숨을 내쉬더니 그대로 자기 핸드폰을 다시금 보기 시작한다. ‘운동이냐 PC방이냐.’ 마음 같아서는 PC방이긴 했는데 앞에 유아린이 있다는 게 거슬린다. “야, 찬우 오늘도 알바 하냐?” “걔 주말에는 PC방 풀로 할걸?” “그럼 지금 가면 서비스 받나?” “…….” 정찬우가 있는 곳으로 간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나를 노려보는 유아린이었으나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끄덕인다. “주겠지. 나랑 같이 가면 더 줄 거고.” “너는 오지 마. 너랑 같이 PC방 가면 찬우가 오해하잖아.” “……좋은데?” 좋긴 뭐가 좋아. 두 사람에게 약속을 하나로 통합해서 게임 속에서 운동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대답을 보내려고 했는데. 우웅! [주대장] 민주희 선배의 전화였다. 중간고사도 끝났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단편영화 촬영에 들어가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빠르게 진행하는 건가? 바로 전화를 받자. - 우진아. 낮게 깔린 민주희 선배의 목소리에는 적나라한 살의와 짜증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게 나를 향한 건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향한 건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네, 선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바로 빠릿하니 대답하자 민주희 선배는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묻는다. - 어제 곱창집에서 뭐 했니? “……왜 그러십니까?” 어제 민주희 선배는 곱창집에 없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수밖에 없겠지만. 뜬금없이 그걸 묻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 여자애들이 단체로 과제를 드랍한다네? “아…….” - 그리고 그게 네 탓이라는데? 어제 곱창집에서 네가 지랄해서 못 하겠다고. “서, 선배! 이거 제가 설명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다급하니 말하자 민주희 선배는 심호흡하며 말한다. - 우진아, 나는 너한테 화가 난 게 아니야. 너랑 2학년 여자애들, 둘 중 어느 쪽이 잘못했는지 나는 전혀 궁금하지도 않고 흥미도 없어. “…….” - 근데 말이야. 침이 꿀꺽 삼켜졌다. 평화롭던 주말에 폭풍이 몰아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과제를 드랍 해?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앞에 놓은 김밥과 돈까스 그리고 쫄면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병사에게 주는 마지막 만찬처럼 느껴졌다. - 하하, 드랍? 드랍…… 그래, 그럴 수 있지. 그치? 우진아, 과제 드랍할 수 있어. 조별과제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진짜 무섭다. - 아, 그럴 수 있고말고. 과제 드랍할 수 있어. 근데……. “그, 근데요?” - 내 과제는 드랍하면 안 돼. 드랍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 “…….” - 우진아, 지금 뭐하니? “김밥천국에서 밥 먹고 있습니다!” - 그거 먹고 나랑 같이 과제 드랍한 년들 본진에 드랍하지 않을래? 아. 민속게임으로 치면 울트라랑 마린 한 마리가 상대 본진으로 드랍십 타고 떨어지는 건가. “바로 따라 가겠습니다. 마침 제 곁에 성격 더러운 여자애 하나 있거든요? 곱창집에서 상황도 본 애입니다.” “어디? 성격 더러운 여자애가 어디 있지?” 고개를 휙휙 돌리며 성격 더러운 여자애를 찾는 시늉하는 유아린. 평소였으면 대꾸라도 해줬겠으나 지금은 주대장님께서 배신자들을 처단하러 가겠다면서 살기등등했기에. - 30분이면 먹을 수 있지? 내가 거기로 간다. “알겠습니다!” 뚝. 전화가 끊기고. “후.” 한숨을 내쉬며 나는 곧장 서예린과 최이서에게 각각 답장을 보냈다. - 김우진: 오늘 바빠서 안 될 듯. * * * “와, 그러면 과제 내던진 선배들 찾으러 가는 거야?” “어, 만나기로 하신 것 같던데.” “재밌겠다!” 시킨 오므라이스를 먹으면서 유아린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흥미를 느꼈다. ‘얘랑 있으면 일이 계속 재밌어지네.’ 정찬우랑 엮어주려는 건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제 곱창집에서부터 시작해서 대나무숲 게다가 지금은 여자 선배들이랑 싸우러 가는 것까지. 주말에 심심했는데 김우진의 집으로 온 건 꽤나 좋은 선택이었다. ‘잠깐만.’ 치즈 돈까스를 허겁지겁 먹고 있는 김우진을 보면서 유아린은 슬쩍 떠본다. “그럼 예린이랑 이서도 합류하는 거야?” “미쳤냐? 걔네 둘한테는 일이 있어서 못 만난다고 했지.” “흐응.” 그걸 듣는 순간, 유아린은 더 재밌는 생각이 났다. 지금도 지루하지 않지만 나중에도 지루하지 않을 폭탄을 심어두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곧장 핸드폰을 두들기는 유아린. “밥 빨리 먹어. 주대장님 금방 오신다.” “알았어, 잠시만.” 유아린이 한 건 메신저 상태메시지와 프로필 사진의 변경이었다. 아까 전에 김우진의 집에서 찍었던 셀카를 프로필 사진으로 둔다. 매트리스 위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그냥 평범하게 집에서 찍은 줄 알겠지만. 김우진의 집을 아는 사람이 본다면 유아린이 지금 김우진의 집에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가령. 김우진의 집에서 잤던 최이서나 서예린 같은 사람들 말이다. “흐.” 게다가 상태 메시지에는 ‘친구집에서 뒹굴 거리는 중.’이라고 적어뒀다. “흐흥.” “왜 빠개냐. 대가리 쪼개고 싶게.” 실실 웃는 유아린을 향해 김우진이 바로 험한 말을 내뱉었으나. “봐줭.” 월요일에 김우진에게 찾아올 시련을 상상하며, 유아린은 혀를 날름 내밀고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