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는 어디로 갔나 싶었는데 아담하니 작은 포차였다. 사람도 거의 없고, 분위기도 잔잔하니 나쁘지 않았으나. 영문과 학생들이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호들갑스럽게 떠들고 있는 게 밖에서도 들려왔다. ‘들어가기 싫어.’ 솔직히 안에 들어가서 무슨 소리랑 시선을 받을지 뻔하지 않은가. 셋이서 하는 게 흔하지 않고, 내가 유아린이랑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건 다들 알고 있으니까. 나랑 유아린 그리고 남은 하나가 누구냐고 신명 나게 추리하고 있겠지. ‘서예린이 안 와서 다행이네.’ 걔가 와서 손 접었으면 그대로 특정되는 거 아닌가. 앞장서서 들어가는 주희 선배의 뒤를 따라 최이서가 들어가고. “뭐해, 들어가.” 내가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자니, 유아린이 등을 떠밀면서 억지로 안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넌 괜찮아? 애들이 우리 가지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을 텐데?” 나 말고 유아린을 가지고도 얘기하고 있을 게 뻔한데 굳이 저길 들어가야 하나 싶어 묻자. 녀석은 히죽 웃으면서 대꾸한다. “잘됐지. 괜히 너한테 찝적거리는 애들한테 확인사살 하는 거니까. 쓰리썸 하는 애한테 누가 들이대겠니.” “그건 그런데…… 나 같은 애한테 들이대는 애가 있을까?” “세 사람한테 사귀자고 고백한 새끼가 뭐라는 거임.” “…….” 그건 또 그렇네. “나 의외로 괜찮-.” “아, 닥치고 들어가라고. 대학에서 보는 놈들이 뭐가 문제야. 어차피 졸업하면 다 헤어질 것들이야.” 얘가 왜 이렇게 대담해졌지. “너 도대체 무슨 성장을 한 거냐.” 옛날에 표진호 때문에 끙끙 앓으면서 힘들어하던 유아린이랑 동일인물이 맞나. 정찬우 피해 다니면서 어색한 사이라 불편하다고 궁시렁거리던 여자가 맞나. 남들 눈치 조금도 보지 않는 호탕한 포부에 놀라고 있자니, 녀석이 찡긋 윙크해 온다. “재벌 집 사모님 되는데 이 정도 깡은 있어야지.” “난 이름만 재벌인데.” “어쩌라고. 나도 네가 돈을 왕창 벌어올 거란 기대는 없어. 그냥 해본 말이야.” “…….” “정 안 되면 내가 인방이라도 하지 뭐. 지난번 쇼츠 때문에 아직도 연락 와. 인방 말고 방송사에서도 관심 보이더라.” “아, 그건.” 묘했다. 서예린이야 본인이 이미 그쪽으로 진로를 확실히 정했으니까 그렇다고 치는데. 막상 유아린이 모르는 애들 앞에서 애교 부리고, 아양 부릴 생각하니까 속이 언짢다. 특히나 내가 인터넷 방송 관련으로 지난번에 조폭들이랑 같이 있으면서 여러 심연을 들여다봤기 때문일까. 성희롱이나 선 넘는 발언을 심심치 않게 하는 시청자들에게 유아린이 돌려질 걸 생각하니 기분이 더러워진다. “그, 방송 쪽은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은데.” 나름 이런 감정을 티 내지 않고 유아린에게 슬쩍 말해봤으나. “흐.” 녀석의 입꼬리가 늘어지며 미소를 짓는다. “짜식, 독점욕을 부릴 거면 셋한테 고백하지 말고 나한테만 고백했어야지.” “크흠.” “아오, 이기적인 새끼. 하여간 지는 공유되면서 나는 공유되지 말라는 거 보면 애새끼야 애새끼.” 말은 그러면서도 술집으로 들어가라고 미는 손길에는 애정이, 목소리는 살짝 올라간 걸 보면 기분 자체는 좋아 보였다. “그럼 다른 걸로 일을 좀 찾아봐야겠네.” “아직 우리 2학년이잖아.” “2학년부터 준비하는 애들도 많더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가자 영문과 애들이 길게 테이블을 이어서 얘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니, 진짜로 쓰리썸을 했다고? 아린이가 접은 거 보고 그냥 구라 치는 거 아냐?” “근데 그렇다기엔 아린이가 김우진이랑 친하게 지내긴 하잖아.” “와, 충격이네 진짜. 왜 다들 나 빼고 어른이 되냐.” “이서는 뭐야? 이서랑 썸 타는 거 아니었어? 나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니까 데려간 거겠지. 무슨 말인지 설명 좀 해보라고.” “셋이면 누구일까? 아린이 빼고 누구임? 아님 반대로 아린이가 그…… 누구지? 건공과 훈남이랑 했을 수도 있잖아.” “찬우? 맞네. 남자 둘에 아린이 하-.” “선 넘네.” 짜게 식은 눈으로 녀석들을 쳐다보고 있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 바로 입을 꾹 다문다. “와, 왔어?” “어서 와!” 애써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대화가 뚝 끊겨 고요해진 술집. ‘잘 왔네.’ 그걸 보고 주희 선배 말대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왔다가는 이거 소문이 어떤 식으로 부풀었을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설마 찬우를 끼고 셋이서 했을 거라고 생각했을 줄은 몰랐네. 2학년한테는 나름 이미지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조진 모양. 3학년들이야 뭐, 원래부터 나 싫어했으니까 이미 뒷담을 계속하는 중. “어쩜 저렇게 뻔뻔하냐.” “지가 뭐라고…… 에휴, 저런 애들이 게임이나 애니랑 현실 분간 못 한다니까?” “그냥 애들이 놀아주는 거 아냐? 부모님한테 돈 빌리고 영끌해서 애들한테 명품 하나씩 쥐어주면서?” “와, 나 그런 거 들은 적 있어. 여자 붙잡으려고 돈 펑펑 쓰면서 결국 사채까지 끌어다 쓰는 새끼들.” “딱 일회용이지. 나중에 장기 팔릴 듯.” 와. 무슨 속사포 랩 하시는 줄 알았네. 디스가 그냥 숨 쉬듯 쏟아지는 걸 보면서 혀를 내두르고 있는데. “저 씨발 년들이.” 방금 자리에 앉았던 유아린이 벌떡 일어난다. 당장이라도 달려들겠다는 유아린을 말린다. “야, 야. 참아. 그냥 참아.” 내 말에 최이서와 주희 선배까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본다. “네가 이럴 때 제일 잘 싸우잖아.” “웬일이니 우진아.” 내게 붙잡힌 유아린도 입술을 꽉 깨물고 격하게 짜증 냈다. “저 개소리를 그냥 들어줄 거야? 장난해 지금?” “그럼 가서 네가 싸우면? 괜히 네 이미지만 안 좋아진다.” “이미지가 뭔 상관이야. 솔직히…… 나 때문에 지금 네가 욕먹는 거잖아.” 그런 쪽으로 생각한 건가. 자신이 괜히 실수해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유아린의 손을 꽉 잡아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 있으니까 괜찮아.” 어차피 여기서 싸워봤자 아무 의미 없다. 내가 몇 번이나 이런 걸 해봐서 아는데. 앞에서 깽판 치듯 싸워봤자 결국에는 자기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깔 거 다 깐다. 내가 작년에 선배들이랑 싸우고 했는데 결국 나한테 돌아온 건, 1학년들의 혐오스러운 시선이지 않은가. 소문이란 그런 거다. “네가 참는다니까 나도 가만히 있긴 하는데…….” 갸웃거리는 주희 선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시는 게 꽤나 위협적이다. “…….” 최이서도 마음에 안 든다면서 선배들 쪽을 빤히 노려보는 와중. “다 하는 법이 있어. 기다려 봐.” 나는 벌떡 일어나서 선배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왜.” “뭘 야려.” “아, 창남 냄새.” 남녀 할 것 없이 바로 나한테 욕을 박아대는 선배들. 원래부터 나를 싫어했으니,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해서 쌍욕을 쏟아내는 건데. “음.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쭉 훑어본 후, 그대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막상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가자 저쪽에선 더 열과 성을 다해서 욕을 쏟아냈고. 우리 쪽에선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한다. “테이블 엎는 줄 알았는데.” “때리면 어쩌나 걱정했어.” 유아린과 최이서의 걱정에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라. 나도 이제 아내랑 애가 있는 사람이야.” “저 새끼 죽여.” “진짜 좋게 보는 게 5분을 안 가네.” * * * 다음 날 오후. 대나무숲이 난리가 났다. - 익명46: 세상 참 불합리하다. 어떤 쓰레기 같은 놈은 여자들 데리고 장난치면서 당당히 대학 생활하고 있네. 올라온 글은 의도가 너무 뻔했고. 익명46은 지난번 곱창집에서 나를 저격했던 영문과 선배의 번호라는 걸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장작이 들어오니 대나무숲은 당연하게도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 익명83: ? 누구? ↳ 익명54: 팝콘 가져와야징. ↳ 익명276: 이번 년도 대나무숲 시즌 1호 저격. ↳ 익명46(작성자): ㅇㅁㄱㄱㅇㅈ ↳ 익명175: 영문과네. 영문과는 어떻게 잠잠한 날이 없냐. ↳ 익명88: 엄마, 저는 다음 생에 태어나도 절대 영문과는 안 가요. ↳ 익명69: 섹x? ↳ 익명31: 어제 술 마시고 쓰리썸 접어했는데 접은 새끼? ↳ 익명249: 쓰리썸? 씨이발 너네 왜 나 빼고 좋은 거 하냐. ↳ 익명361: 와, 대학 오면 ㅈㄴ문란해진다더니 진짜네. ↳ 익명46(작성자): 걔 맞음. ↳ 익명408: 근데 왜 나는……. ↳ 익명11: 이 정도면 영문과 새끼들은 그냥 학교 자퇴해라. 이젠 어지럽네. ↳ 익명243: 무슨 애니인가요? 제목 좀 알려주세요. ↳ 익명44: 싱글벙글 가현대 쓰리썸 괴담- ‘오랜만에 아주 열심히들 대나무숲에 글 쓰고 있네.’ 확실히 글이 리젠 되는 속도도 빠르고, 관련해서 내용이 올라오는 것도 장난 아니다. - 익명198: 와, 내가 사람 부러워해 본 적 없는데 이건 진짜 부럽다. ㅈㄴㅈㄴㅈㄴㅈㄴ부럽다아! - 익명427: 저분 이름이 뭔가요? 저 가서 연애 좀 배우고 싶은데. - 익명26: 그냥 씹 쓰레기네 - 익명7: 익명46 님. 실제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 익명31: 혹시 저 글 주인공? - 익명243: 현실에 하렘은 없어서 애니로 왔다. 허나, 내가 착각하고 있었어. 이상향, 그곳은 존재했구나. ↳ 익명11: 애니 그만 보고 사람답게나 살아라 이 새끼야. - 익명435: 진짜 모르겠어서 그런데 뭐가 문제임? 그냥 지들끼리 물빨한 거 아닌가? 남의 사생활에 뭐가 그리 관심들이 많음? - 익명90: 섹x 하고 싶다아앗! ↳ 익명309: 쟤는 진짜 하고 있다. - 익명402: 누군 남친 하나 만드는데 개지랄을 떨어도, 누군 남자 둘 끼고 섹x 하고 있네. ↳ 익명315: 저거 남자 아님? ↳ 익명402(작성자):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케암. - 익명69: 사실 확인 제대로 한 거 맞나요? ↳ 익명44: ? ↳ 익명198: ?? ↳ 익명354: ??? ↳ 익명90: ?????? ↳ 익명11: 뭐야 시발. 섹x 안 붙이고 말할 수 있었음? - 익명407: 익명 커뮤에서나 지랄발광하는 인생 족친 새끼들이 뭘 또 개소리를 싸놓고 있네. 저걸 믿냐? 병신들. ↳ 익명113: 또 이러네. ↳ 익명39: 먹이금지. ↳ 익명11: 그걸 익명 커뮤에서 말하고 있는 스스로를 좀 봐라. 지 얼굴에 침 뱉고 있네. 멍하니 핸드폰을 보면서 있자니, 유아린한테도 톡이 왔다. - 유아린: 저거 보고 있지. 어떡할 거야. 싹 밀어? - 김우진: 밀지 마. 계속 둬. 알아서 할게. 처음 저격한 익명46부터 시작해서 그쪽 애들이 계속해서 내 욕을 하면서 떡밥을 뿌려주고 있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 가는 걸 심드렁하니 보고 있자니. “공부한다고 해서 데려왔는데 왜 안 하고 딴 짓 하냐.” 맞은편에 앉아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최이서가 못마땅하다며 쳐다본다. 공부하겠다고 말해서 겨우 만나준 거다. “이서야, 나 잠깐 폰 좀 주라.” “핸드폰?” 솔직히 받는데 좀 고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최이서는 별 신경 쓰지 않고 핸드폰을 건네준다. “다 괜찮은데. 톡만 보지 마. 네 욕한 거 많으니까.” “……대나무숲 앱 아직 안 지웠네?” 다시 깔아야 하나 했는데. “음? 아, 깜빡했네.” 별다른 반응 없이 다시 공부에 집중한 최이서. 이미 영구정지는 풀어뒀고. 나는 그걸로 글을 하나 적는다. - 익명287: ㅇㅁㄱㄱㅇㅈ 대기업 회장 아들이란 소문 있던데. 이거 저격 감당 가능? 당연하게도 반응은 폭발적. ↳ 익명11: ? 인실좆이네. ↳ 익명198: 와, 저거 어캄. 대나무숲은 글삭되나? ↳ 익명337: 애초에 쓰리썸이면 지들끼리 합의한 거 아닌가? 남이 왜 지랄임. ↳ 익명7: ???? ↳ 익명161: 얼른 글삭 해라. 저거 캡쳐 뜨면 진짜 엿 된다. ↳ 익명245: ㅋㅋㅋㅋㅋㅋ 와, 개꿀잼이네 그냥. ↳ 익명417: 저격글 다 내렸네. 소름 돋게 빠르다. 실제로 내려간 저격글. 하지만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다시 내 핸드폰으로 돌아와 1:1 문의로 연락을 남긴다.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익명46님. 방금 전에 법무팀 팀장이라는 분이 연락 주셨는데요. 관리자 계정으로 말했으니 이게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니라는 건 바로 알아챘겠고. - 익명46: 네? 법무팀이요? 아니, 이렇게 빨리요? - 관리자: 그래서 저도 좀 당황스럽긴 해요. 근데 저쪽에서 그냥 넘어갈 생각 없다고. 이거 무조건 재판으로 넘긴다고 하셔서. - 익명46: 근데 제가 뭐 고소당할 말했나요? 어이없네. - 관리자: 그건 저도 모르고요. 일단 저쪽에서 요구하시는게-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니 인생 엿 됐다고 알려준다. 웃기지 않은가. 익명 뒤에 숨어서, 하고 싶은 말 아무거나 막 싸질러 대는 놈들이. 아무렇지 않게 말이라는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 같은 것들이. 현실로 나와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덜덜 떨기 시작한다. ‘익명은 자신을 숨기는 가면 같은 게 아니야.’ 자신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얼굴이지. 결국 본인이기에, 책임 역시 짊어질 수밖에 없다. ‘제대로 알려줄 필요가 있어.’ 정면에서 싸워봤자 그냥 해프닝으로 그치지만. 체급 차이를 알려주면, 더 이상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하겠지. 물론, 문란한 아들을 둔 기업회장이라며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 있지만. 그건 유능한 아버지랑 형이 알아서 하지 않겠는가. 아빠 말대로. 나는 이기적이니까 말이다. “진짜 공부 안 해?” “하지. 자, 핸드폰. 배경화면 나로 바꿔뒀어.” “……실수로 핸드폰 부술 것 같은데.”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받아든 최이서. 배경화면을 힐끔 보곤 억지로 미소를 참은 그녀가 다시 공부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