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밖에는 흡연장이 있기 때문에 눈에 띈다. 아예 가게 옆 골목으로 들어선 최이서의 등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다. 우웅! - 유아린: 잘 가고 톡으로 온 유아린의 작별 인사. 뭐라 답해줘야 이 앙큼한 녀석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최이서가 걸음을 멈췄다. “우진아.” “넵!” 고드름이 맺힐 것 같은 싸늘한 목소리. 바로 빠릿하게 대답했음에도 최이서의 기분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는지 표정이 굳어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으면. 아린이랑 예린이?” “……그, 네엡.” “언제? 어디서?” 취조당하는 기분. 오윤지 때 이런 걸 자주 당해봤기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상반된 분위기. 오윤지는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며 나를 당장이라도 잿더미로 만들겠단 분위기였는데. 최이서와의 대화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조금만 삐끗해도 크게 다칠 것 같다. “골드원에서…….” 대답을 듣고 한숨을 내쉬는 최이서. 그러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단 표정으로 묻는다.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해?” 질문을 받긴 했으나, 솔직히 나도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분위기를 탔고, 어느새 우리는 셋이서 하고 있었다. 물론, 뒤에는 따로 얘기가 안 나오는 걸 보면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그날의 일은 없던 걸로 넘기고 있었으나. ‘유아린 진짜.’ 하여간 저건 언제 어디서든 나 골리려고 노력하는 게 어이가 없다. 본인 이미지도 좋지 않아질 텐데 그냥 나 엿 한 번 먹이겠다고 거리낌 없이 손가락 접는 거 봐라. “어떻게 가능하냐고.” “그,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서. 실은 나도 잘…….” “네가 왜 셋한테 고백했는지 알겠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거구나?” “…….” 어쩜 이렇게 잘 맞추지. 만약 셋이서 한 경험이 없었으면 이번 MT에서 셋한테 고백했을지 잘 모르겠다. 그건 내게 있어, 일종의 가능성이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야.” 솔직하게 대답하며 심호흡 이후, 최이서를 또렷하게 쳐다본다. 울상이 된 최이서를 보는 건 가슴이 아팠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미 나는 결정했다. “나는 이미 정했어. 셋 다 사랑할 거야.” “씨이! 그게 말이 되냐고!” “너희가 떠나는 걸 잡지는 않을 거야. 애초에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걸 알고 있으니까.” 동시에 사귀는데 떠나는 것까지 못 가게 막으면 그건 좀 문제 있는 놈이지 않은가. “하지만 자신할 수 있어. 네가 누구를 만나도, 나랑 있을 때보다 행복하진 않을 거야.” 당당함에 말문이 턱 하고 막힌 최이서. 황당해하는 그녀에게 천천히 손을 뻗어 뺨을 쓸어준다. “그렇게 될 수 있게.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말이야.” 웃으면서 최이서에게 천천히 키스하려는 순간. 뻐억! 기다려왔던 주먹이 바로 명치를 때리고 들어왔다. “끄억!” 방금까지 분위기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복부를 얻어맞은 나는 그대로 몸을 웅크렸고 내 등을 때리기 시작한 그녀. “미친 소리를! 어딜! 어딜 그딴 개소리를 하고 있어!” “때려! 그래 맘껏 때려! 네가 그래서 풀린다면!” 대양 같은 남자. 왕관을 쓰려면 무게를 견뎌야 하듯. 세 여자를 탐하려는 나는 그 무게를 견뎌야-. “어걱!? 자, 잠시만!” 너무 아파서 깜짝 놀라며 몸을 뒤로 빼자, 최이서가 씩씩거리며 달려온다. “넌 꼭! 꼬오오옥! 마음에 들려고 할 때마다 이렇더라?!” 내 옷깃을 잡고는 확 잡아당기는 최이서. 주먹이 매워서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가드를 잡은 후에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잠시만 이서야! 뼈, 뼈 맞은 것 같아! “그냥 맞아!” 그대로 때리기 시작한 최이서. 주먹질은 묵직한 무게감이 담겨 있었으나, 정작 목소리에서는 떨림이 잔뜩 묻어나오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미안해!” “닥쳐! 듣기 싫어!” “그럼 사랑해!” “너 진짜 죽었어!” 더 화를 내면서 때려대는 최이서. 어느새 투덕거림 정도로 변한 주먹질에 지친 최이서가 숨을 고르면서 뒤로 물러선다. “후우! 후욱!” 가쁘게 숨을 쉬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등을 얼마나 두드려 댔는지 뜨겁게 달아올랐으나, 입은 쉬지 않고 말을 내뱉는다. “이서야, 생각해 봐.” “뭘!” “대학 졸업하고, 일도 안 해도 돼! 내가 우리 아빠한테 가서 돈 뜯어올 거야!” 원래 셋째는 한량이다. 필요 없다고 한 다음 나왔지만, 애들을 위해서라면 바로 가서 무릎도 꿇어줄 수 있다. “그럼 우리 그냥 즐기면서 살면 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내가 그걸 두고 볼 것 같아?! 결혼해도 무조건 일은 해야 돼!” 원래 그러려고 했다. 그냥 지금 설득하려고 말해본 거였는데 의외로 최이서는 내가 일하는 게 더 좋은 모양. “가만히 있으면 사람이 망가질 수밖에 없어. 가정에서 한 사람은 무조건 일해야 돼.” “오케이! 내가 할게.” “성적 생각하면 내가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너 군대도 다녀와야 하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우리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으음, 군대 전역하고 바로 하면 되잖아.” “바보야, 군대 전역해도 대학은 졸업해야 할 거 아냐. 그거 기다리면 최소 3~4년은 내가 일하고. 그때면 직장에서 자리 잡을 테니까. 넌 천천히 직장 알아보면 되는 거야.” “아하.” “요즘은 맞벌이가 대세니까.” “그건 그렇지. 그럼 집은 좀 좋은 걸로 해달라고 해볼까?” “……아마 결혼하면 무조건 애는 낳을 테니까, 학교들이 밀집된 곳으로- 아니, 잠깐만.” 퍼뜩 정신 차린 최이서가 이마를 탁 치면서 한숨을 내쉰다. “결혼 안 할 건데?! 너 안 좋아해 이제!” “이서야, 우리 방금 좋았잖아! 우리 이진이를 생각해!” “이진이가 누군데!” “우리 딸이잖아!” “닥쳐! 애 이름 혼자 짓지 마! 애들 이름은 원래 양가 부모님들이랑 상의해 보고 짓는 거야!” “많이 낳을 거니까 하나쯤은 아빠 꼴리는 대로 해도 되는 거 아냐?!” “나 직장도 다녀서 많이는- 아니, 잠깐만. 결혼 안 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정하는 최이서. 이미 애들 이름까지 생각한 내 입장이 뭐가 되는가. “하아, 이서야 상상해 봐.” 이제는 내가 이서에게 다가가서 어깨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벌써 내 눈에는 우리의 미래가 보였다. 꿀꺽. 최이서도 내 말에 홀린 것처럼 침을 삼키며 멍한 눈이 된다. “밤늦게, 맥주 한 캔 당길 정도로 피곤한 시간. 야근해서 늦게 퇴근한 너를 내가 차 타고 마중 나가는 거야.” “…….” “조수석에서 시원한 맥주 마시라고 너한테 주고, 뻥 뚫린 밤길을 달려. 중간에 대교도 하나 지나면서 밤바람 싹 맞으면서 집에 도착해.” “…….” “그럼 우리 돌아왔다고 애들이 반기면서 마중을 나오는 거야. 우리 이진이랑-.” “서우.” “……그래, 서우. 이진이랑 서우가 막 반겨주는 거지. 이 토끼 같은 녀석들, 오늘은 안 싸웠냐고. 유치원에서 잘 지냈-.” “잠깐만.” 슬쩍 고개를 돌린 최이서가 나를 보며 묻는다. “애들이 이제 유치원생인데 집에 혼자 둬도 되는 거야?” 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준비해 둔 게 있다. “괜찮아. 예린이랑 아린이가 집에 서 애들 봐- 커우얽?!” * * * 골목길에 버려진 채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인생사 참으로 다사다난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닌가, 그냥 내가 힘들게 사는 것 같기도 하고.’ 최이서 설득에 실패한 나는, 욱신거리는 몸을 애써 일으킨다. 슬쩍 시간을 확인하니 10시. 닭갈비 집으로 가보자 2차를 갈 생각인지 다들 얘기를 나누고 있으며. 최이서랑 유아린은 애들이랑 멀찍이 떨어진 구석에서 서로 뭔가 열띤 토론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최이서가 뭔가 따지듯 유아린에게 캐묻고 있는데, 유아린은 괜히 피하려 고개를 틀다가 나랑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야, 이리 와.” 가기 진짜 싫은데. 그래도 일단 터벅터벅 걸어간다. 중간에 영문과 애들이 이쪽을 보며 수군거렸으나, 유아린이랑 최이서는 이미 해탈했는지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째릿 노려보는 최이서와 답답하다며 가슴을 치는 유아린. “네가 설명해 봐.” 대뜸 설명하라는 유아린에게 나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되묻는다. “뭘.” “왜 우리가 셋이 하게 됐는지 말하라고. 나는 피해자라고 해도 안 믿어주잖아.” 음? “그게 뭔 개소리야. 네가 왜 피해자야.” 굳이 그날 밤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자면 엄밀히 피해자는 나였다. “나는 묶여 있었고, 너희끼리 다투다가 결국 둘이 같이한 거잖아.” 황당하다며 그리 대꾸하자, 유아린이 노려보며 소리친다. “그때 원래 우리 둘이 하는 거였는데 예린이가 끼어든 거였잖아! 그럼 나는 피해자 아냐?!” “……아니, 그걸 피해자라고 하는 건 좀.” “후우, 그럼 절충안으로 예린이가 가해자인 걸로 하자. 솔직히 걔가 생태계 교란종이었잖아.” “그건 인정. 서예린 잘못임.” 조금 더 있으면 최이서 또 폭발 할까 봐 고개를 끄덕였으나. “근데 냉정하게 가장 즐긴 건 너였으니까 네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닌데?” 유아린이 다시금 내 등에 칼침을 꽂아 넣었다. “맞잖아. 그때 네가 제일 즐겼잖아.” 최이서와 유아린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혀 들어온다. 얼른 해명해 보라는 눈동자에 나는 이마를 한 번 쓸어 넘기며 변명해 본다. “도대체 어느 남자가 셋이 하는데 안 즐길 수 있냐?” “와.” “쓰레기…….” 두 사람의 시선이 바로 짜게 식었지만 나는 당당하다. “아냐? 아니냐고! 도대체 누가 그걸 참아! 서예린한테 박으면서 유아린 엉덩이 때리는걸! 어?! 도대체 누가 참냐고!” “야, 야 이 새끼야! 닥쳐!” 깜짝 놀란 유아린이 다급하게 내 입을 막으려 들었으나, 몸을 뒤로 빼면서 저항한다. “평소에 성격 지랄 맞고! 남 엿 먹이는 거 좋아하고! 초코몽에 그냥 미쳐서는 초코몽만 마시는 애가! 엉덩이 때리면 존댓말 하면서 얌전히 기다리는데 그걸-!” 이건 마약을 강제로 흡입했는데, 왜 그걸 즐겼냐고 하는 꼴이지 않은가! 어느새 내 등에 올라탄 유아린이 양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는다. 다행인 건 영문과 놈들이 최이서가 손짓해서 2차를 가버렸다는 거겠지. “으부브부븝!” “진짜 목 꺾어버리고 싶네!” 지난번에 MT에서 한 번 업어주긴 했는데, 또 이렇게 유아린이 등에 매달리는 날이 올 줄 몰랐다.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진 유아린이 씩씩거리면서 내 입을 막았고. 최이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며 이마를 짚고 휘청거린다. “그, 그래서. 셋이서 진짜 했다는 거잖아 결국.” “부브붑.” “……그렇지.” “아, 어지럽네. 왜 내 상식이 너희한테는 통하지 않는 거야?” “이 새끼 문제임.” 턱으로 내 정수리를 찍으며 짜증 내는 유아린. 억지로 녀석의 손을 떼어낸 후, 가까스로 제안한다. “우리 그냥 따로 2차 가서 얘기나 좀 더 해볼까?” 내 제안에 잠시 머뭇거린 최이서. 하지만 유아린이 바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 새끼 취하게 한 다음에 모텔 끌고 가려는 거임. 가서 자기 딱총으로 우리 협박하려는 거야!” 어떻게 알았지. “딱총 아니고 샷건이라고!” “닥쳐, 딱총!” 어제 서예린처럼 좀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얄팍한 새끼, 예린이가 다 말해줬다.” 배신 했구나 서예린. 자기 말고 다른 애랑 하는 거 견제한 게 분명했다. 근데 아까부터 유아린 진짜……. “아까부터 참았는데 넌 진짜 안 되겠다. 가서 혼나야겠어.” 뒤에 매달린 상태였기에 아예 허벅지 쪽을 잡아서 고정시킨 후, 그대로 모텔이 있는 쪽으로 달려간다. “어? 어? 어?! 야, 자, 잠깐만! 안 돼! 최이서 이거 막아! 이 새끼 막으라고!” 달리는 내 머리를 팍팍 때리는 유아린과 기괴한 상황에 몸이 굳은 최이서. 됐다, 이대로 유아린을 호텔로 데려가-. “뭐 하니.” 길을 막아선 용점퍼의 여포. 아니, 주대장님. 흡연장에 아직 남아계셨는지 우리 대화를 전부 듣고는 나를 막아 세우셨다. “그, 선배. 그게 아니락푸앍” “내려줘엇!” 아예 귀를 깨물고, 내 입에 손을 넣어버리는 유아린 때문에 결국 변명도 하지 못하고 내려줄 수밖에 없었다. “2차 갈 거면 애들이랑 같이 가고. 보니까 지금 같이 안 가면 애들이 이상한 오해하겠더라.” 연기를 내뿜고, 담배케이스로 불을 끄신 선배의 제안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