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메뉴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아무래도 맛이 좀 너무 무난해.” 조교실 앞. 팔짱을 낀 채로 이것저것 설명하고 있는 민주희 선배. 그 앞에 서 있는 1학년 주방팀. “혹시 만들어서 먹어본 사람 있니? 나는 어제 기숙사에서 애들이랑 해봤는데.” 당연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주방팀이라고 해도 어제 메뉴가 정해졌는데 어제 바로 해봤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저 해봤습니다.” 최이서가 굳이 직접 집까지 와서 해준 내가 아니면 말이다. 슬쩍 손을 들어서 답하자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린다. 설마 해봤을 줄 몰랐다며 놀라는 표정이기도 했으나, 축제를 얼마나 기대했냐며 조롱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민주희 선배는 당연하게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역시 이쁜이 마음에 들어.” 이번에는 더 놀란 반응으로 나와 민주희 선배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1학년들. 설마 주희 선배가 나를 좋게 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땠니?” “선배 말대로 무난했어요. 솔직히 굳이 또 먹고 싶진 않네요.” 최이서가 해준 게 아니었으면 아예 안 먹고 남겼을 거다. 막상 만들었던 최이서도 미묘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치? 작년에 쓴 레시피인데 좀 바꿀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여기서 본인이 요리 좀 친다 거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걸 본 민주희 선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조금 더 질문의 폭을 넓힌다. “너튜브 보고 요리 자주 따라 하는 사람, 찌개까지는 끓일 수 있는 사람, 자취하는 사람 거수.” 자취하는 사람까지? 일단 저렇게 물어보니 몇몇 사람이 손을 들었고 민주희 선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나랑 같이 메뉴 좀 바꾸자. 오래 걸리진 않고 너튜브 보고 대충 변형해서 한 번만 만들어 보고 끝낼 거야.” “그럼 남은 사람은요?” 손을 번쩍 들고 기대감에 찬 여후배에게 민주희 선배는 웃으며 답해줬다. “짐 날라야지.” “…….” “주방 기구들 같은 거 너희가 가져오는 거야. 그리고 천막 설치부터 시작해서 너희가 다 해야지.” 요리 못 한다는 걸 핑계로 빠지려고 했던 자들에게 내려진 주든 렘지의 철퇴. 지금이라도 요리 쪽으로 빠지고 싶다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이미 늦었다. “뭐, 당장 할 건 아니고. 일단 이렇게 알아만 두라고. 그리고…….” “저기, 주희야?” 등지고 있던 문이 열리며 고개를 빼꼼 내민 조교님. “여기서 애들 군기 잡는다고 우리 쪽으로 연락 왔어.” “엥?” 무슨 소리냐며 바로 후배들을 쳐다보는 주희 선배. “내가 너희한테 뭐 했냐?” “아뇨! 전혀요!” “아닙니다!” “…….” 이러니까 정말 더 똥군기 잡는 느낌인데. 그래도 조교님도 민주희 선배 성격을 잘 알아서인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는다. “어차피 지금 해산하려고 했어요. 금방 끝낼게요.” “그래, 부탁할게.” 그대로 안으로 다시 쏙 들어간 조교님. 민주희 선배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심드렁하니 말했다. “교수님이 부탁하셔서 하는 거긴 한데. 내가 하면 좀 제대로 하는 편이거든? 괜히 내 눈에 밟혀서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그냥 잘하자.” “네에!” 깔끔하게 이야기가 끝나고 다들 해산하는 도중, 민주희 선배가 손가락을 까딱하시며 나를 부르셨다. “네, 선배?” 힐끗 주변을 보시더니 작게 물어 오신다. “내가 무섭게 말했니?” “엥? 그런 것도 신경 쓰세요?” 전혀 신경 안 쓰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니, 옛날 버릇 때문에 말을 좀 세게 할 때가 있긴 해도 애들한테 나름 친절하게 말하지 않았나?” “……친절의 범위가 굉장히 넓으시네요.” 사실상 거의 통보라고 봐도 무방했지만. “원래 이런 일 할 때는 친절하기보다는 좀 강압적으로 하는 게 맞아요. 아시잖아요.” “그치, 그렇게 안 하면 안 움직이는 애들이 있으니까.” 주희 선배의 말이 좀 찔렸다. 만약 주희 선배가 아니었으면 사실 나도 안 움직이는 애 중 하나였을 테니까. “뭐, 괜찮으면 됐어. 축제 끝나면 본격적으로 단편영화 촬영할 거야. 그거만 알아둬.” “넵, 알겠습니다.” 경례하며 배웅하자 주희 선배는 피식 웃어주었다. “군대도 안 간 놈이.” “…….” 바로 의지가 팍 식어버렸다. * * * “그래서 내가 딱 말했지. 그냥 해도 된다고.” “미쳤네 미쳤어! 너 그러다가 큰일 나!” “그렇게 쉽게 안 생겨!” “와, 인생 걸고 도박하네.” 쫍쫍. 친구들의 적나라한 하룻밤 얘기를 들으면서 커피를 쫍쫍거리고 마시고 있는 서예린. 고등학교 때부터 이어온 네 명의 친구와 함께 커피숍에 있었는데 남자친구가 생긴 둘이 꽤나 하드한 이야기를 이어가는 중이었고. 관심은 있지만 부끄러워서 대화에 끼지 못하는 중이었다. “내 남자친구는 갑자기 얼음 물고 하자고 하더라.” “얼음?!” “어, 그래서 입에서 입으로 얼음 주고받으면서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괜찮아. 흥분되고 좋았어.” “나도 나중에 해보자고 할까?” “해봐, 은근 좋음.” “흐아.” 옆에서 작게 숨을 토해내는 서예린. 분명 차가운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도 머리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적당히 해라 이것들아. 예린이 부끄러워하잖아.” 맞은편에서 빨대를 입에 문 채로 짜증 내는 유아린. 그러자 다른 둘은 어깨를 으쓱거린다. “예린이는 좀 들어야 해.” “맞아, 애가 너무 순진해서 탈이야. 남자 좀 만나봐야 한다니까?” “…….” 그 말에는 유아린도 동의하긴 했으나. 지금 서예린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남자를 생각해 봤을 때, 썩 추천하고 싶지는 않았다. “꼭 연애를 해야 하냐? 예린이가 하고 싶을 때 하면 되는 거지.” “이 시기에 먼저 만나봐야 한다니까?” “맞아. 예린이는 특히나 인기가 많으니까 미리 남자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고.” 그러면서 두 친구는 곧장 서예린에게로 타깃을 옮겨서는 조잘조잘 거리기 시작했다. “예린아, 이번 축제에서 남자 하나 만나봐. 무조건 우리한테 면접 보게 하고.” “이상한 놈이면 우리가 걸러줄게. 혹시 지금 호감이라도 좀 있는 사람 있어?” “……아니.” 순간 누군가 떠오른 느낌이 든 서예린이었으나 재빠르게 부정하면서 말을 돌린다. 하지만 오랜 친구였던 둘은 서예린의 심경에 뭔가 변화가 있다는 걸 빠르게 눈치채고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예린아 우리가 그냥 밝히는 게 아니라 너도 이런 식으로 남자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해.” “맞아. 그래야 진짜 좋은 남자가 왔을 때 알아챌 수 있다니까?” “나, 나 말고 아린이도 있잖아!” 결국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서예린은 조금 치사한 방법으로 화살촉을 돌렸고. 다른 두 친구 역시 유아린을 쳐다봤으나. “쟤는 뭐.” “찬우가 있잖아.” “걔랑 나 엮지 말라고 했지.” 바로 미간을 찌푸리면서 확 짜증 내는 유아린. 고등학교 친구들이라 당연히 정찬우도 알고 있었기에 유아린에 대해선 두 사람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순애보잖아.” “소꿉친구가 배우 뺨치는 존잘남? 어디 인소에 나올 법한 내용 아니냐?” “하아, 그렇게 좋으면 너희가 데려가라.” 진심으로 정찬우에게 관심이 없다는 반응의 유아린에게 두 친구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그 얼굴을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지.” “난 진짜 찬우가 고백하잖아? 그날 바로 옷 벗고 찬우 침대로 돌진한다.” “미친년들.” 대화할 가치가 없다며 그냥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리는 유아린. 정찬우만 언급하면 날 선 반응을 보이는 유아린 때문에 결국 둘은 다시 서예린 쪽으로 주제를 옮기려 했으나. 서예린은 나름대로 이것저것 고민하는 중이었다. ‘내가 너무 보수적인 걸까?’ 당장에 두 친구들은 남자친구와 찐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하나는 선섹후사라는 개방적인 문화를 겪었다. 유아린 같은 경우도 장난삼아 김우진에게 가슴을 만지게 해줬다는 걸 지난번에 들었다. 그게 기분이 썩 나쁘긴 했으나 자신이 봤을 땐 김우진과 유아린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거나 하진 않았다. ‘이번 기회에 좀 적극적으로 나가봐야 하는 걸까?’ 대나무숲에서 섹x좌로 불리고 있으나 현실에서는 그냥 바보인 서예린이었기에. 이번 기회가 좀 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으음?” 핸드폰을 보던 유아린에게 묘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미간을 찌푸리는가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의아하단 반응을 보이자 다른 두 친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는다. “왜 뭔데.” “이년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 그럴 의도는 없었는지 머쓱해하며 유아린이 슬쩍 핸드폰 화면을 보여준다. 거기엔 가현대 대나무숲이 있었는데 한창 난리가 난 게시글이 하나 있었다. - 익명90: 섹x좌 익명69의 정체를 밝힙니다. “이거 뭔데?” 대나무숲을 잘 보지 않는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다른 친구 하나가 자세하게 답해준다. “대나무숲에 섹무새 하나 있거든. 매일 섹x하고 싶다고 꾸준히 올려.” “그 노력으로 여자 사귀면 진즉에 했겠는데.” “리얼.” 둘의 얘기에 유아린도 동의했으나 문제는 그 밑에 이어진 글이었다. - 익명90: 매일 하나씩 힌트를 드립니다. ‘영어영문과’ 학생임. “우리 과라니까 궁금하네.” “영문과 수준.” “너희는 대나무숲 가지고 진짜 재밌게 논다.” 킥킥거리면서 흥미로운 화젯거리에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한 세 사람이었으나. ‘……어라?’ 여기서 유일하게. 웃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