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타닥. 고기를 굽고 있었다. 고기 굽는 기계가 된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정말 고기만 굽고 있다. 이게 굽는 데 집중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정신적 충격 때문에 제대로 사고가 돌아가지 않아서 그랬다. ‘뭐지.’ 분명 나는 거절하지 않았나? 앞으로의 관계를 그만두자고 말했던 거 같은데 결과적으로 최이서는 키스하고 사랑한다고 말한 다음에 가버렸다. 지금도 애들 사이에 껴서는 내가 구운 고기를 먹고 있는데. 힐끔 고개를 들어 테이블 쪽을 보자, 최이서와 눈이 맞았고. 녀석은 살포시 웃으면서 얼른 와서 먹으라고 손짓했다. 못 본 척하고 다시 고기를 굽는다. ‘내가 말을 잘못 전했나?’ 그건 아니었는데. 근데 왜 이렇게 된 걸까. ‘하, 일단 최이서는 미뤄두자.’ 다시 분명하게 내 의견을 말해야 할 듯싶었다. “말하셨어요?” 그때 빈 접시를 들고 슬며시 다가온 규아. 녀석의 접시에 고기를 얹어준다. “어, 말했어.” “이서 선배 선택했어요? 이서 선배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 힐끔 최이서 쪽을 쳐다본 규아. 마침 이 복잡한 기분을 누군가에게 좀 풀고 싶었기에 입을 벌렸으나. 잠깐 뜸을 들인 후. “꺼져.” 숨을 내쉬면서 내쫓는다. “뭐야, 도와주려고 해도 그러세요?” “어, 가라. 너한테 도움받을 일 딱히 없을 것 같다.” “선배 제 취급이 좀 너무하지 않아요?” “네가 다른 남자들 취급을 더럽게 하니까 나라도 이렇게 해줘야지. 인생 만만하지 않다, 규아야.” “……제일 만만하게 사시는 게 선배 같은데.” 할 말이 없네. “얼른 가라.” “아, 진짜 도와드리려고 왔잖아요.” 빈정 상해서 표정을 찌푸리는 녀석. 딱히 별 관심은 없지만 도와준다는 말은 걸렸다. “도와준다고?” “네. 아까 아린 선배 보니까 게임 지셔서 편의점 간다고 하셨어요.” “여기서 편의점 겁나 먼데?” “그니까 벌칙이죠. 이미 출발하셨으니까 지금 뛰어가시면 되겠네요.” “……고맙다.” 최이서는 일단 보류로 넘어가더라도. 다짐한 일은 끝내야겠지. “자, 여기.” 고기 굽던 집게와 장갑을 건네준다. “……이것까지 예상하진 않았는데요.” “다녀온다.” 그대로 규아를 내버려두고 대로변 쪽으로 달려가자, 뒤에서 안현호를 부르는 규아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왔다. 산길 도로를 쭉 달리고 있자니 날도 추운데 반바지를 입은 채로 후드집업을 걸친 유아린이 보였다. 이어폰을 끼고 있었기에 내가 바로 뒤에 다가왔어도 알아채지 못한 녀석. “야.” “둠칫둠칫.” 뭔 노래를 듣는 거야. “야, 유아린.” “둠칫둠칫 투칫투칫.” 갑자기 리듬에 맞춰서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춘다. 혼자서 잘 노는 게 인터넷 방송인 안 한 게 아까울 정도로 천직 아닌가 싶다. 어깨에 손을 툭 얹으며 다시 한번 불러본다. “야, 유아린!” “어머, 씨벌! 깜짝이야!?” 제자리에서 통 튀듯 화들짝 놀라며 이제야 나를 쳐다본 유아린. “놀랐잖아!” 이어폰을 빼면서 나한테 땍땍거린다. “너야말로 밤중에 이어폰을 끼고 다니냐. 위험하게.” 특히나 여긴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그냥 도로이지 않은가. 자칫 잘못했다가는 진짜 큰일 날 수도 있었다. 할 말이 없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곤 주제를 돌린다. “왜. 너도 뭐 사다줘?” “아니, 얘기 좀 하려고.” “얘기? 아하, 주희 선배 관련이구나?” 뭐, 그것만 관련된 건 아니긴 한데. “그래, 무슨 얘-.” 바스락! “흐익?!” 갑자기 옆에 있는 나무에서 들려온 풀 소리.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흔들린 모양인데. 유아린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겁에 잔뜩 질려서는 몸이 움츠러든 게. ‘아…….’ 그러고 보니 옛날에 무서운 얘기를 제일 싫어한다고 유아린이 했던 게 떠올랐다. “아, 씨잉!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그래서 일부러 노래 들으면서 온 거라고 개우진 김색갸!” “이게 내 잘못이야?” “돼, 됐고. 할 말 있으면 이어폰 꽂고 노래 들으면서 들어도 돼?” “그냥 안 듣는다고 해라.” 바스락! “히익?!” 이제는 바짝 쫄아서 나한테 엉겨 붙은 유아린. 울먹이면서 주변을 휙휙 둘러보는 모습을 보니 품고 있던 긴장감이 확 사라진다. “에휴, 야. 귀신 그런 거 다 가짜야.” “네가 봤어 이 새끼야?! 개 무섭다고!” “싸움은 그렇게 잘하면서……. 일단 편의점이나 가자.” 아무래도 얘기할 거면 빛이 좀 있는 곳에 가는 게 맞을 듯했다. 얘가 이렇게까지 바짝 쫄아 있을 줄은 몰랐다. 과일소주를 마셨는지 몸에서 풍기는 과일향. 눈물이 찔끔 나온 채로 내 팔에 꽉 달라붙어 있는 걸 보면 진짜 무서웠나 보다.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아, 진짜아아앗!” “바람 부는 거라고. 바람 부니까 나무가 흔들리는 거잖아.” “바람이 불긴 뭐가 불어! 아무것도 안 부는구만!” “그게 뭔…….” 손을 살짝 들어본다. 정말 바람이 불지 않고 있었다. 근데 나무랑 풀은 왜 흔들렸지? 유아린 때문인지 몰라도 나도 섬뜩함을 느끼는 순간. 파사삭! 수풀을 헤치고 튀어나온. 야생 고라니 한 마리. “끼아아아악!” “고라니야! 고라니! 알아서 지나갈 거야!” 이제 아예 나한테 매달린 유아린을 진정시키면서 고라니를 빤히 쳐다본다. 보통 고라니들은 겁이 많아서 금방 도망친다고 들었는데. “……저 새끼 왜 안 가.” 고라니가 그냥 멍하니 우리 쪽을 보면서 도로변에 서 있었다. “쟤 뭐야?” “몰라. 보통 도망가지 않나?” 귀신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좀 나아졌는지 내게서 내려오며 유아린이 주먹을 쥔다. “내쫓아볼까?” “그랬다가 덤비면 진짜 큰일 날 수도 있어. 일단 기다려보자.” 5분 정도 기다렸을까. 놈은 장판파의 장비처럼 멀뚱히 우리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저 새끼 왜 저러는데.” 답답함에 유아린이 투덜거렸으나, 그렇다고 저걸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때. 등 뒤를 비추는 헤드라이트. 차 한 대가 도로를 달리며 우리를 지나치는 순간. 휙! 고라니가 도로를 지나기 위해서 달려들었고. 쿵! 그대로 차에 박으면서 몇 바퀴 구르더니 혀를 내밀고 죽었다. 운전자가 당황해서는 차를 멈추고 한숨을 푹 내쉬는데. “……저 새끼 큰 결심했는데?” “숲에서 왕따라도 당한 거 아냐?” 길을 지날 거면 아까 지나갈 것이지 저 새끼는 왜 차가 지나갈 때 지나가서 뒤지는 건가. “고라니가 차에 많이 치인다고 듣긴 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당황스럽네.” “또라이 같아.” 고라니가 사라진 덕분에 우리는 다시 편의점으로 갈 수 있었다. 뭔가 엄청난 일이 있었던 탓에 방금까지 진지한 얘기를 하려던 게 전부 흐지부지되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누가 나를 방해하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으나. 그래도 할 건 해야겠지. 편의점에서 애들한테 부탁받은 물건들을 사고 나온 유아린. 나는 밖에서 멍하니 주변을 보면서 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면 사실 지금 말하면 안 될 것 같지만. 팬션에 가면 둘이 따로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없겠지. “뭐 보냐. 주변 다 어두컴컴한데.” 풍경을 본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말 그대로 주변이 어두워서 뭐가 보이진 않았다. 허시 초코우유를 건네 온다. 받아 든 나는 굳이 뜯지 않고 편의점 앞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뒀고.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인지했는지 유아린도 편의점 봉투를 테이블에 올리고 나를 쳐다본다. “할 말 있다고 했지?” “응, 맞아.” “그래, 얼른 해라.” 아까 최이서 때가 떠오른다. 용기 내어 했던 말들이 생각한 것처럼 결과를 내지 못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단호하고 강하게 말할 필요가 있겠지. 최이서한테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에 무거운 돌이 얹어진 듯했으나 나는 유아린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이별을 선언했다. “사귀는 건 힘들 것 같아. 이런 복잡한 관계는 끝내고, 서로 다른 사람 찾아가자.” “좆 까.” ……. …………. ………………음? 내가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어벙하니 유아린을 쳐다보고 있자니, 녀석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할 말 그게 끝이야? 별거 아니네.” “방금 내가 제대로 들었나? 아니면 고라니한테 맞고 지금 꿈속에 있는-.” 뻐억! “아아악!” 그대로 어깨를 때린 유아린.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아프지? 꿈 아냐. 귀도 이상한 것 같으면 귓방맹이 한 대 쳐줘?” “아뇨아뇨. 괜찮습니다. 다 알아들었어요. 저한테 좆 까라고 하셨잖아요. 바지 벗어서 깔까요?” “알아먹었구나. 저거 봉투는 네가 들어라. 주희 선배한테 고백 받은 벌임.” “넵.” 그대로 돌아가려는 유아린의 등을 멍하니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아니, 잠깐만! 이거 장난 아니라니까?! 농담으로 하는 말 아니야!” “하아.”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푹 내쉰 유아린이 몸을 돌린다. “그래, 들었어. 들었다니까? 그만하자고. 그래서 말했잖아, 싫다고.” “아니…… 그게.” “왜? 네가 말하면 다 들어줘야 해? 나는 네 말 들어준 적보다 무시한 적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아린아, 진지하게 얘기하는 거야. 미안한 말이라는 거 알아. 하지만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못 버티겠어.” “…….” “여기서 그만하는 게 맞아.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너희를 위해서도.” 지금의 관계가 다소 문란하면서도 비정상적이라는 건 알지 않은가. 당장은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 결국 우리 모두에게 상처가 되는 결말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 말에 점점 진지하게 표정이 변해간 유아린. 그러더니 허리에 손을 얹으며 대꾸했다. “좆 까라고.” “……야.” “네가 힘들다고? 그거 내가 알빠인가?” 말문이 막혔다. 너무 당당한 모습에 오히려 내가 더 당혹스러웠다. “이기적인 새끼야. 니만 이기적일 줄 알았어? 언제까지고 네 좆대로 움직여 줄 거라고 생각했어?” 뻔뻔한 미소가 유아린의 입가에 자리 잡는다. “끝내는 건 네가 정하는 게 아냐. 내가 정하는 거지.” 척척 걸어와서는 내 멱살을 낚아챈 유아린. 그대로 본인에게 휙 잡아당기며 놀리듯 웃어준다. “그니까 닥치고 가만히 있어. 내가 사랑하는데 방해되니까.” 나도 모르게 입술이 벌려졌는데. 그 틈에 녀석이 입을 짧게 맞춰왔다. 뇌가 정신 없이 난타를 당한 것만 같은 기분. 얘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본인도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유아린은 더 이상 할 말 없다면서 내 멱살을 놓아주고 봉투에 있는 초코몽을 하나 꺼내서 빨대를 꽂는다. “얘기 끝났냐? 그럼 가자. 늦으면 애들이 고기 다 먹는다.” 최이서와 대화한 다음이랑 똑같은 감각이었다. 그녀의 단호한 고백에 나는 멍하니 봉투를 들고 터덜터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목에 목줄이 채워진 기분이 들었다. 이기적으로 사랑하겠다는 유아린의 발언이 그만큼이나 나를 속박해 왔으나. “쓰읍, 너무 심했나?” 밤길을 걷던 와중. 유아린이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너무 끌고만 다니는 건 좀 그렇긴 하지. 그니까 시간을 정하자.” “뭔 소리야.” 이번에는 또 무슨 신박한 소리를 지껄일까 궁금해서 쳐다보자. 유아린은 히죽 웃으며. “낮에는 내 꼴리는 대로 할 테니까.” 아무도 없음에도 은밀하게 속삭였다. “밤에는 맘껏 져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