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 피곤해.” 서예린 때문에 새벽부터 A동에 있었다 보니 쉬는 게 좀 어설퍼질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그냥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내부 버스가 끊겼기에 직원 휴게실에 있기로 했다. 혹시 몰라서 유니폼을 이쪽에도 한 벌 가져다 둔 게 그나마 다행. 안에 있는 과자 몇 개 집어 먹은 후, 안마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자니 30분 정도 잠들었을까. “여기 있었네.” 익숙한 목소리에 잠긴 눈이 천천히 뜨였다. “으음?” 아까 영화 촬영할 때 입었던 젊은 재벌 스타일이 아니라 대한당 유니폼을 입은 서예린. 이쪽이 더 익숙하기도 했기에 친근감 있게 느껴졌지만 좀 당혹스럽기도 했다. “너, 왜 여기 있냐?”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1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촬영은 밤새서 이어질 거라고 했으니 아직 끝나려면 좀 남았을 텐데. “일찍 끝났지. 나는 애초에 장면도 별로 없고, 대사도 짧거든. 그리고 내가 재능충이잖아.” 내가 살면서 서예린의 재능을 인정할 때가 올 줄은 몰랐네. “그냥 살아있는 피규어였던 서예린 맞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잠긴 목으로 어찌어찌 칭찬했으나 아직도 피로는 가시지 않았다. 고작 1시간 잤으니까 다시 서서히 눈을 감으려고 하는데 서예린이 한 대 때려왔다. “아파!” 뭔가 싶어서 눈을 뜨자 서예린이 묘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모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손은 목뒤로, 한 손은 허리 뒤에 둔 채로 골반과 가슴을 강조하는 자세. 분위기적으로 단아한 대한당의 복장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묘한 배덕감이 들어찼다. “나 안 씻었어.” 일단 말은 해본다. “그래서?” 예상했지만 상관없다면서 웃는 서예린의 반응에 나는 슬쩍 입구 쪽을 확인했다. “누구 들어오면 어떡하게?” “이 새벽에?” 그것도 맞는 말이다. 지금 들어보면 마치 내가 하기 싫어서 이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반대였다. 이미 하반신에 힘이 꽉 들어찼고, 매력적인 여자가 앞에서 유혹하고 있다. 혹시라도 중간에 끊길 수 있는 가능성들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차단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배우에만 재능이 있는 게 아니야.” 다가오면서 슬며시 손을 하반신 쪽에 툭 얹는 서예린. 안마의자에 앉아 있었기에 일단 일어나려 했으나. 반대로 서예린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숨결을 불어 넣는다. “도련님, 부탁드려요. 더 이상하면 안 돼요.” “……무슨 컨셉이야?” “뭔가 이런 게 흥분되지 않아?” “말은 안 된다고 하는데 벗기는 건 너잖아.” “도련님께서 시키셨잖아요.” 도련님 소리 진짜 듣기 싫은데. 근데 의외로 또 흥분되기도 하네. “빨아.” 서예린의 장단에 맞춰서 턱짓하며 지시하자, 녀석의 볼이 붉어지며 바지를 벗기더니. “아, 도련니임.”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뜨거운 숨결을 담아 천천히 봉사를 시작했다. * * * “흐아아암. 야, 가져왔어.” 긴 하품을 흘린 유아린이 휴게실 문을 쿵쿵 두드린다. 1시간이나 일찍 출근했기에 사람이 거의 없는 복도. 평소였으면 좀 무서웠을 수도 있으나 지금은 졸렸기에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타앙! 쿠웅! “으음?” 그때 문 안에서 들려오는 거센 소음에 유아린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졸린 눈을 억지로 뜬다. “야, 뭔데. 네가 촬영하느라 깜빡하고 유니폼 안 가져왔다며.” “흐앗?! 아린아! 왔구나! 잠깐마안!” “뭐가 잠깐만이야. 휴게실 문은 왜 잠갔어. 열어봐, 나도 좀 자다 출근하게.” “기다려 봐! 잠깐!” ‘왜 저래.’ 문에 이마를 ‘콩’ 박은 채로 서서 졸던 유아린은 몇 분 정도 지난 후에야 문이 열리며 눈을 떴고. “아, 아린아! 왔구나! 저, 정말 고마워!” 거기에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서예린이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뭐야, 너 유니폼 있…….” 있지만 있다고 볼 수 없다. 하얀 와이셔츠가 축축하니 젖어서는 자세히 보면 안이 들여다보일 것만 같았으니까. 또한. 비치는 탓에 몸 이곳저곳이 눈에 들어왔는데 기묘한 자국들도 있었고. “나, 나는 탈의실에서 옷 좀 갈아입고 올게? 아린아 정말 고마워!” 마지막으로 서예린이 옷이 담긴 봉투를 들고 탈의실로 가는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다. 살짝 비틀거리면서도 벽에 손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로 걷는다. “…….” 싸함을 느낀 유아린이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자 환풍기가 켜져 있었고, 피톤치드 향이 과할 정도로 내부에 뿌려져 있다. 직원들 옷에 음식 냄새 배면 쓰라고 둔 탈취제 향이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가릴 수 없는 찐득하고 눅진한 공기. 안으로 더 들어가자 안마의자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코오오오오.” 코를 골면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니, 자는 척했다. “네가 왜 여기 계세요?” “코오오오옹.” “지금 숨길 생각으로 그러고 있는 거 맞아?” “코오오오오.” “죽여 버리고 싶어지니까 적당히 해라, 김우진.” “넵.”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이를 슬쩍 내려서 눈으로 인사한 김우진. 유아린은 이를 으득 물면서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둘 사이가 좀 괜찮아지게 도와주긴 했는데, 이렇게 급진적으로 좋아질 거라고는 예상을 못 했네?” “요즘 애들이 워낙 뭐든 빠르잖아.” “몇 시부터 했냐?” 슬쩍 시계를 확인한 김우진. “4시-.” “4시? 두 시간?” “-간 정도 한 것 같습니다.” “…….” 지금이 6시니까 새벽 2시부터 했다는 소리였다. 멍하니 김우진의 아랫도리를 보던 유아린은 이마를 ‘탁’ 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절제를 모르니? 너 일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할 수 있어.” 그러면서 벌떡 일어나는데 진짜로 크게 문제없어 보여서 좀 놀랐다. 엉거주춤하면서 갔던 서예린이랑은 확연히 다른 모습. “이쪽으로 근육이 발달된 건가?” “……홈트를 열심히 해서 그런 거임.” 여기서도 김우진은 쉬지 않고 홈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력적인 부분으로는 꽤나 괜찮았다. 아직 최이서를 상대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체력으로는 유아린이랑 비슷해지지 않았을까. “아, 근데 너무 피곤하다.” 다시 안마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눈을 감는 김우진. 오히려 당당한 모습이 황당하기 그지없다. “말을 이렇게 돌린다고?” 짜증 내면서 유아린이 한마디 하자 김우진은 본인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너도 여기 와서 앉아. 한 시간만 자고 가자.” “여기서 자라고? 너랑 예린이가 물고 빨고 한 여기서?” “진짜 너무 피곤해서 그래. 조금 있다가 혼날 테니까, 응?” 부탁하듯 콧소리까지 내는 김우진. 입술을 삐죽 내민 유아린은 터덜터덜 걸어서 김우진 옆에 앉았다. “손 줘.” “이 새끼 왜 이렇게 능숙하지? 엿 같게?” 팔걸이 위로 손을 내민 김우진. 짜증 내면서도 유아린은 그의 손을 잡았고 둘은 정적과 어둠 속에서 손의 온기만을 느끼며 짧은 숙면을 취하-. “우진아! 내 팬티 어디 있어?!” “아, 내 주머…….” 쾅! “아악! 자, 잠시만요! 아파요!” 쾅! 쾅! 쾅! “아, 아린 님! 아, 아프다고!” 잡고 있는 김우진의 손을 그대로 팔걸이에 내리치면서 씩씩거리는 유아린이었다. * * *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실로 당연한 거였다. 유아린이랑 손을 잡고 휴게실에서 1시간 정도 자고 다음 출근하자. 룸서비스 사무실이 광이 날 정도로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대리님들은 이미 전부 출근해서 긴장한 상태로 서 있었다. 룸서비스랑 연동된 주방에도 유난히 깔끔한 모습. “와, 왔구나! 우진아!” 주문을 받던 와중 나를 보고는 두 팔 벌리며 달려오는 과장님. 이찬송 부장이 업무를 못 하니 지금 룸서비스에서 가장 높은 게 과장님이신데. 이렇게 나를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반겨주는 걸 보니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모른 척하려고 일부러 우진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목소리도 떨리고 눈치를 살피는 걸 보니 내 정체가 알려진 모양. 하긴, 회장 아들이 알바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이쪽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모른 척하면서 최대한 잘해드리라고 이사들이 압박을 넣었겠지. “하암.”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 내 눈치 보면서 떨고 있는데 정작 나를 때린 유아린은 옆에서 느긋하니 하품이나 하고 있다. “손잡고 자니까 좋은데? 다음에도 또 할까?” “네가 내 손을 팔걸이에 찍지만 않으면?” “두들겨 패려던 거 참아낸 나를 칭찬해 줘.” 잘했다 개 같은 뇬아. 어쨌든. 배우는 소질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직장인분들을 고생하게 만들 수는 없기에. “그만둘게요.” 나는 깔끔하게 알바를 그만두기로 했다. * * * 헤어짐은 늘 갑작스레 찾아온다. 아직 골드원에 있어야 할 날이 일주일 정도 남았으나 의도치 않게 떠나게 되었고. 지금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서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제 성수기가 지나고 있는 추세였기에 나 하나 빠진다고 해도 문제없다는 것. 내가 갑자기 그만둔 것 때문에 혹시라도 남은 직원분들이 뭔가 부조리를 당할 수도 있기에 큰형한테도 그쪽으로는 따로 부탁을 해뒀다. “아쉽네.” 따로 방이 없이 거실에서 지내서 그런지 짐이 별로 없어서 금방 정리할 수 있었다. 그래도 룸메들 얼굴 정도는 보고 가야겠거니 싶어서 쪽잠을 잤는데. “우진아아!”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방안으로 우르르 밀려 들어오는 남정네들. 세신강대에 다니는 제갈재민과 민동건. 그리고 같은 대학이지만 나이가 좀 있으신 오대상 형님. 마지막으로 다급한 모습도 존잘인 정찬우까지. “아, 얘들아.”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이렇게 다급하게 찾아와서는 나를 반겨주는 걸 보면 내가 헛살진 않았구나 싶었기에. 양손을 쭉 뻗으며 앞으로 있을 이별을 슬퍼하려는 순간. 제갈재민과 민동건의 분노가 담긴 몸통박치기가 내게 적중했다. “어억!” 그대로 몸이 붕 떠 다시 소파로 날아간다. “개새끼야! 좋았냐? 응? 여자랑 하는 게 그리 좋드나?!” “시이바아알! 그래도 우진이보다는 먼저 동정 졸업할 줄 알았는데에에! 시바아아아아알!”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뭔 소린가 싶어서 어벙한 표정으로 묻자, 찬우가 뺨을 긁적거리며 답했다. “너 휴게실에서 여직원이랑 섹x하다가 걸려서 짤렸다며.” “……누가 그래.” 찔리는 건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에 다시 묻자 찬우는 살짝 고민하다 말했다. “아린이가.” ……. …………. 그래. 이렇게 나오셨다 이거지? 그럴 수 있다. 얘가 그만두는데 모기업 회장 아들이었다고 설명하는 건 귀찮으니까 오늘 있었던 일이랑 연관 지은 건 상관없다. 그럴 수 있지. “좋았냐?! 좋았어? 여자 살은 어때? 부드러웠어?” “마, 막! 막 쪼여와? 쫀득해? 맛있어?” “어휴, 얘들아. 그런 거 프라이버시야.” 그나마 나이가 많은 대상 형님께서 세신강대 듀오를 말리셨으나. “아뇨, 형님.” 나는 손짓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민들아, 냉장고에 남은 술 가져와라.” 오늘 내가 어른이 무엇인지 알려주마. * * * “떠나는구나.” 저녁 7시. 애들이랑 같이 마지막 이별파티를 한 다음 나는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애들은 하루 자고 가라고 했지만 이제 일하는 사람도 아닌데 괜히 직원 숙소에서 자고 가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여자애들 쪽에도 톡은 남겨뒀지만 그쪽이야 어차피 대학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 “후우.” 버스를 기다리며 골드원의 마지막 밤을 즐기고 있자니. 우웅! 톡이 하나 왔다. - 유아린: 우리 방으로. 뜬금없이 나를 부르는 유아린. 웃으면서 답장해 준다. - 김우진: 외로움ㅋ ? 나름 놀리듯 답장해 주면서 가벼운 분위기로 가려고 했으나. - 유아린: (영상) 유아린이 보낸 영상은. 불과 2시간 전의 내가 찍혀 있었다. - 얘를 수갑을 채웠단 말이지? 이렇게 침대에 엎드리게 만든 다음에 좀 억지로 쑥 집어넣은 거임. - 와아아! - 그럼 얘가 깜짝 놀라서 엉덩이가 파들파들 떨리는 게 보여. 응? 거기서 바로 허리 튕겨주는 거야. 그럼 신음을 참으려고 이불을 무는 게 또 꼴려. - 슬슬 적응됐다? 그럼 일부러 까치발을 들어서 위를 긁듯이 천천히 빼. 그럼 갑자기 위를 쑤시니까 엄청 느낀단 말이야? 참으려고 얘도 억지로 까치발을 들고, 딸려 오듯 엉덩이가 뒤로 빠지는 거지. - 그때 엉덩이 한 대씩 때려주면……! - 형님! 도대체 누구랑 하신 겁니까! - 그냥 야동 보고 썰 푸시는 거 아니죠?! - 이 새끼들아! 누구랑 했는지 알려줄 순 없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배워가라. 그러더니 이번에는 베개를 가지고 허리를 열심히 흔드는 걸 보여주는 내가 있는 게 아닌가. ‘흠, 미친 새끼였군.’ 술을 좀 마셔서 알딸딸하기도 했고, 섹x 해서 해고된 사람으로 만든 유아린이 좀 괘씸해서 익명을 보장하고 썰을 푼 건데. - 유아린: 내가 갈까? - 김우진: 아뇨, 제가 가겠습니다. 초코몽 사갈까요? - 유아린: 아무거나 먹을 거 좀 사와. 대신 딱딱한 건 사지 말고. - 유아린: 그거로 니 대가리 찍을 수도 있으니까. “…….” 버스가 왔지만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다시 호텔로 들어간다. 여기서 도망치면 나중에 진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 김우진: 우지니 바로 가욧! 일단 그렇게 톡을 해두고, 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똥게이 새끼야! 그걸 영상을 찍었어?!” - 게, 게이 아니야! 잘생긴 배신자, 정찬우에게 전화를 걸자 녀석은 당황하면서도 일단 설명을 시작했다. - 아, 아니. 아린이가 너 좋아하잖아? 그래서 네 성벽이나 하는 방식 같은 걸 알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구나. 근데 중요한 건 내가 풀었던 경험담이 유아린이라는 거야. 제일 말하면 안 되는 사람한테 알려줬구나. “고작 그거 때문에?!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어? 아냐고! 넌 친구도 아니야 이 새끼야!” 버럭 외치면서 찬우를 탓하자 저쪽도 지지 않았다. - 나도 너 때문에 힘들어! 이번에 썸 타던 여자애가 왜 나랑 헤어졌는지 알아?! 어디서 이상한 게이 소문이 돌아서 그런 거야! “…….” - 그리고 그때 아저씨 번호 알려준 것 때문에 대머리 아저씨한테도 한 번씩 연락 온다고! 번호 안 지워뒀냐면서! “…….” - 나 진짜 여자 좋아한다고! 근데 나 일하는 곳 가게 애들이 게이로 오해해서 안 만나주잖아아! “…….” - 김우진 뒤져! 제발 뒤져! 아린이가 영상 보고 너한테 정떨어졌으면 좋겠어! “미안하다. 나중에 연고 선물로 줄게.” - 뭔 연고. “엉덩이에 바르라고.” - ……. “발라주진 못할 듯.” - 제발 뒤져라. 두 번 뒤져라. 그냥 숨 쉬듯 선을 넘는 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