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00원입니다.” “네에…… 에?”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고기 몇 덩이 입에 넣었다고 이 금액이 나온다고? 여러모로 기분이 나쁜 상황이었다. 내가 사준다고 했고, 쿨하게 돈도 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손이 떨려온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내 계산을 받아주는 한강 선배가 환하게 웃고 있는 것까지도.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억지로 웃으려고 입꼬리를 씰룩이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내 반응이 아주 맛있는지 더욱 상쾌한 미소로 화답한다. “응, 좋은 일이 있네?” “……수고하세요.” 대충 대꾸하면서 밖으로 나온다.말은 안 하고 있지만 내 위기가 한강 선배에게는 좋은 일이라는 걸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서예린이랑 친한 내가 다른 여자랑 사귀고 있었다고 착각해서 기분 좋은 걸 수도 있었다. 어쨌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건 사실이니까. 밖으로 나오자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서예린과 최이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으나 눈치를 보면서 못 하고 있는 게 지금 우리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우웅! 우웅! 이런 와중에도 계속해서 울려오는 내 핸드폰. 유아린이 연락을 보내오는 거였는데 워낙 급박한 상황이었던지라 무음으로 바꿔두는 걸 까먹었다. “연락…… 오는 거 같은데?” 슬쩍 눈짓으로 서예린이 내 핸드폰을 가리킨다. 별거 아니라고 말해주려 했으나 이제는 전화까지 오고 있었기에. “잠깐 통화 좀.” 결국 나는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슬쩍 자리를 옮겼다. - 왜 지금 받아! “뭔데.” 지금 유아린 때문에 아주 더럽게 상황이 꼬여 있는데 막상 본인에게 전화를 받으니 언짢은 답을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유아린은 다급하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해 나갔다. - 지금 대나무숲 난리 난 거 안 봤어?! “어, 안 봤어. 네가 관리하기로 했잖아.” 어찌 보면 처음 있는 휴가인데 좀 즐길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 이 씨! 당장 대나무숲 좀 봐! 이거 해결 좀 해줘! “쉽다면서요. 별거 아니라면서요.” - 미안하다고! 지금 종교 동아리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난리 났다니까?! 게다가 나한테도 막 욕하고 장난 아니야! “어휴.” 예로부터 종교는 탄압하면 그에 따른 반발이 오지 않는가. 학교 종교 동아리에서 자신들의 글을 지우는 관리인을 탄압하는 빌라도 같은 걸로 생각했겠지. - 아, 제발 좀. 관리자님아 이거 좀 해결해 주세요오! “…….” - 사장니이임! 주인님아아아아! 솔직히 뭔가 이득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유아린이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이미 잠수를 타거나 못 하겠다고 통보만 내리고 가버렸을 텐데 말이다. ‘방법을 좀 알려주긴 해야 했는데.’ 너무 무작정 애를 던져놨다는 생각에 괜히 미안해졌기에 일단은 알겠다고 답하려 했으나. “우진아, 커피 마실래?”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최이서가 경고하듯 내게 물어왔다. 분명 평소에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말인데 아까 유아린 얘기가 나온 이후부터 꽤나 분위기가 냉랭하다. “어, 어! 아무거나!” “그럼 예린이랑 사 올게.” 그대로 쌩하니 가버리는 최이서. 잠깐 시간이 생겼으니 대나무숲 관리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 방금 이서야? 예린이랑도 같이 있어? 전화 너머로 최이서의 목소리가 들어간 모양이다. “어, 방금까지 밥 먹었어.” - 누군 개고생하고 있는데 누구는 여자 둘 끼고 밥 드셨어요? “그렇게 좋은 분위기 아니었으니까 괜한 말 마라.” 방금까지 있던 동정심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만 같으니까. - 그러게. 방금 이서 목소리가 썩 좋지 않던데? 무슨 일이야? “너 때문이잖아요.” 사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입단속 못한 내 잘못이긴 하지만. 그냥 일단 유아린 탓이다. 기억에서 잊지 못할 말캉거림을 선사하면 안 됐다. - 내 탓이라고? 대나무숲은 내팽개치고 나한테 꼬치꼬치 캐묻는 유아린.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간단하게 상황 설명을 했고. - 등신. 바로 욕을 얻어먹었다. - 가슴 만진 게 그렇게 좋으셨어요? “안 좋았어.” - 너 진짜 뒤지고 싶냐? 아니 그럼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하라고. “사실 좋았어.” - 변태 새끼. “이 씨브……!” 바로 욕을 꽂아 넣으려는 나였으나 핸드폰 속 유아린은 깔깔거리면서 웃음이 터져 버렸다. 한참을 웃었을까. 너무 웃어 눈에 눈물이 고였을 게 뻔히 보이는 유아린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 딜 하자. 네가 대나무숲을 해결 좀 해줘. 그럼 내가 네 상황을 해결해 줄게. “……해결해 준다고?” - 어, 위치 말해봐. 바로 갈 테니까. 뭔가 수상하게 느껴졌지만 유아린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 보니까 또 묘하게 믿음직스러웠다. “인백 앞에 있어.” - 스테이크 먹었어? 와, 갑자기 도와주기 싫어지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란스러운 걸 보니 옷을 갈아입는 중인 모양이다. - 너는 내가 가기 전에 대나무숲 해결 좀 해줘. 가능하지? “뭐, 어렵지 않지.” 게시판 개판 나는 거 몇 번을 봤는데 그 정도는 쉽다. 나는 유아린에겐 없는 권한이랑 요령이 있으니까. 전화를 끊고 곧장 대나무숲으로 들어가 본다. “우와.” 유아린이 말한 대로 개판도 이런 개판이 따로 없었다. - 익명77: JLY는 성서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이는 조금도 불순한 게 아니며 조금도 악한 것이 아닙니다. - 익명88: 나무아비타불. 오늘날의 이러한 고행들도 우리의 수행이니 화를 다스리고 참으세요. - 익명77: 성경을 통해 복음을 전합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깨어서 주께 나아가야 할 겁니다. - 익명88: 어지럽고 고행뿐인 속세를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허나 그것을 이겨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흘러가게 두십쇼. - 익명77: 대나무숲 관리인 1호에게 경고합니다. 더는 주님의 가르침을 방해하지 마세요. 그것은 죄입니다. - 익명88: 관리인 1호께서는 다소 감정적인 분이신 것 같습니다. 가르침을 받아들임은 자유이니 그것을 순리대로 두세요. “아주 난리 났네.” 주말이라서 대나무숲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 없다 보니 아주 종교 동아리에서 꽉 잡고 있다. ↳ 익명11: 이 씨발놈들아 대숲이 너희 꺼야? ↳ 익명11: 좆을 까세요 개새끼들아. 그 와중에 악플러로 유명한 익명11이 혼자서 아주 투지를 불사르며 대나무숲을 지키는 중이었다. ↳ 익명11: 나는 사탄이요, 장발 라커이니. 십자가랑 빠박이들 다 두들겨 패준다 오늘. “미친놈.” 좀 선을 넘는 말을 하는 느낌도 들었으나 사실 선은 저쪽에서 넘긴 했다. - 익명75: 근데 1호 일 진짜 못하긴 하네. ↳ 익명137: ㅇㅈ함. 관리자는 뭐함? 짬 때려놓고 놀고 있나? ↳ 익명198: 지금 1호 일 못해서 체벌 중인 거 아님? 1호 묶인 채로 신음 ㅈㄴ 흘리는 중. ↳ 익명85: ㅅㅂ? 개꼴린다. 누가 남자임? ↳ 익명198: 본인 취향으로는 1호가 여자라서 엉덩이 맞으면서 비는 거임. 죄송하다고. 그러면 바로 관리자가……. - 익명243: 님들 ‘최고의 어른’ 본 사람 계신가요? 솔직히 저는 이 작품에 다소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왜냐면 일본의 아이돌과 한국의 아이돌에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 익명11: 씹덕 새꺄, 낄 때 껴. 지금 종교 탄압 중인 거 안 보여? “진짜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네.” 특정 몇 명이 계속 글을 올리면서 게시판이 활성화 되어 있으나 많이 더럽다. 이런 경우에는 딱 하나. “물갈이해야겠네.” 그냥 오늘 적힌 글들 다 지워버리면 된다. 물론, 그 전에. 익명77, 88 그리고 11까지 전부 하루 정지를 먹여줬다. 글들을 싹 정리하고 간단하게 하나 적어준다. - 관리자: 도배하던 애들, 싸우던 애들. 다 정지했습니다. - 관리자: 특히나 JLY랑 불교수행회는 눈치 보면서 올리세요. 동아리 홍보는 괜찮은데 도배는 안 됩니다. - 관리자: 주말에는 나도 쉽시다. 그러자 바로 밑에 달리는 글들. ↳ 익명289: 드디어 관리자가 돌아왔다. ↳ 익명75: 어디 갔었어 보고 싶었잖아. ↳ 익명243: 관리자님 제 애니 리뷰도 삭제됐는데 복구해 주세요. ↳ 익명85: 243아 어차피 아무도 안 봐. ↳ 익명165: 뽑뽀해 주고 싶네 그냥. 대략 정리됐다. 당연히 1:1 문의로 나한테 따지고 드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규칙을 들먹이며 답해주자 금방 조용해졌다. “뭐 하고 있어?”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 왔는데 괜찮지?” 때마침 돌아온 서예린과 최이서. “아, 그럼 좋지.” 나는 비위를 맞추려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커피를 받아 든다. 둘은 나름대로 얘기를 나눴는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게 내게 이로울지는 지켜봐야 했다. ‘생각해 보니까.’ 지난번에 유아린이 자기 프로필 사진을 우리 집으로 해놨던 탓에 더 오해하기 쉬운 상황이었다. 사실. 유아린이랑 뭔가가 있었다는 건 오해가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가슴을 만졌으니까. ‘……근데 왜 내가 쩔쩔매고 있지.’ 막상 유아린이랑 대화를 하고 대나무숲을 정리하니까 다시 차분해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얘네랑 사귀는 것도 아닌데 그런 눈치를 볼 필요는 없겠지. 서예린이랑 최이서도 그런 부분 때문에 막상 궁금해도 꼬치꼬치 캐묻지 못하는 거고. “우진아.” 하지만 결국 입을 연 건 최이서였다. “아, 아무리 외로워도 아무하고 막 하고 그러면 안 된다?!” 얼굴이 붉어져서는 눈이 팽팽 돌아가고 있는 게 인상적이다. “맞아! 아린이가 이상한 애는 아니지만 그, 그래도 둘이 사귀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관계는 좀……!” 서예린도 곧장 끼어들며 덧붙인다. 사귀지도 않는 그냥 친구 사이에서 할 수 있는 나름의 조언.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겠으나. ‘아, 젠장.’ 우리 집에 와서 누워있던 것도 진짜고, 가슴 만진 것도 진짜다. 사실상 섹x만 안 했지 얼추 비슷한 걸 했다고 봐도 무방했기에. 무작정 부정하기 어려웠는데. “얘들아!” 그때 뒤에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유아린. 커다란 후드티를 입고, 블론드 머리를 흩날리며 급하게 달려오는 중이었다. “아린이?” 당사자가 이렇게 등장하자 당황한 두 사람. 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유아린이 어떻게 해결할지 보려고 했는데. 핸드폰으로 톡이 와 있었다. - 유아린: 나 다 왔거든? 내가 너한테 관심 있는 척하면서 들이댈 테니까 너는 철벽 치면 됨. - 유아린: 그럼 네가 나 만진 것도 애들이 이상하게 안 볼 거야. - 유아린: 원래 이런 성격 아닌데. 나 때문에 괜히 오해받기도 했고, 오늘 도와줬으니까. - 유아린: 누나가 특별 서비스다. - 유아린: (이모티콘) 마지막으로 고양이 이모티콘까지. 대충 유아린의 계획을 알 것도 같았다. 나를 일종의 피해자로 만들 생각인 모양. “안녕! 우진이 좀 데려가도 될까?” 아주 대놓고 나를 데려가겠다고 유아린이 말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움찔 떤다. “왜?” 지난번에 유아린이랑 기 싸움을 벌였던 최이서가 팔짱을 끼며 냉랭하니 묻자. “그야 우진이 집에 가서.” 자신의 뺨을 손가락을 꾹 누르며 장난스럽게 선언했다. “섹x 하려고.” “당장 가자.” 순간적으로 누군가 끼어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사람은 없었고, 다른 세 여자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어머나 시발.” 이제야 방금 ‘당장 가자’라는 말을 내가 했다는 걸 깨달았고. “쓰읍.” 입 주변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잠시 고민해 보지만. “저거 그냥 등신이야.” 혐오감 넘치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는 유아린에게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