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수선 일타강사 여무진은 말했다. 수선이란 초월이다. 그리고 초월이란 보충이다. 곧 태생적인 불완전함에 대한 보충이다. 몇 년이 지났지만, 그의 지론은 여전했다. 여무진이 말했다. “원영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잘 모르겠다면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도 좋겠지. 한번 생각해볼까. 연기기와 축기기를 거치면서 무엇을 얻었지? 연기기는 심신을 갈고닦는 경지라네. 그래서 무술을 단련해서 신체를 강건하게 하고, 명상을 통해서 자신을 알고 정신을 가다듬었지. 좋아, 일단은 심신을 빚어서 형태를 잡았군. 다음으로 축기기는 법력을 쌓는 경지라네. 영기를 법력으로 바꾸고, 끊임없이 정제했지. 그러면 그릇을 완성하고 빈 공간도 채운 셈이군. 여기까지 연기기와 축기기를 거쳐왔지. 비로소 초월을 위한 준비가 끝났어. 이제는 우리의 육신과 영혼이 허물을 벗을 차례군. 자네는 결단기에 도달해서 무엇을 얻었나?” 서란이 대답했다. “강인한 생명력입니다.” 여무진이 한 번 더 물었다. “맞아, 육신의 한계를 벗었어. 그렇다면 육체는 이미 초월했군. 이제 무엇이 남았지?” 심신의 조화, 연기기부터 중요시했던 요소다. “영혼이 초월할 차례인가요?” 여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르치는 재미가 있군. 영안술로 나를 보게나.” 서란은 곧장 법술을 사용했다. 영안술은 굉장히 중요한 법술이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천지에 흐르는 영기. 세상을 활보하는 괴력난신. 그리고 영적인 무언가. 영안으로 바라본 여무진의 존재감은 강렬했다. 그는 약 구백 년을 살아왔다. 지상에서 가장 하늘에 가까운 자들 중 하나였다. 압도적인 격차에 본능적으로 솜털이 곤두섰다. 호랑이와 조우한 토끼가 느낄 법한 공포였다. “참, 이러면 어떤가? 조금 보기 편한가?” 아차 한 여무진이 급히 힘을 갈무리했다. 그러자 짓누르는 듯한 압력도 다소 약해졌다. 서란의 표정이 편해지자 그가 말했다. “자네와 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지? 수선에 관련된 요소에서 말이야.” 차분해진 서란이 영안으로 여무진을 관찰했다. 중단전, 즉 심장에는 아른거리는 영근. 전신을 가득 채운 방대한 법력. 마지막으로 아랫배에 위치한 금단. 여기까지는 서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했다. 뭔가가 여무진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주먹 크기의 반투명한 물체였다. 마치 몸을 웅크린 갓난아기처럼 생겼다. 여무진의 원영이었다. “이게 바로 원영인가요?” “그렇지, 원영기란 영혼의 초월. 원영을 형성하는 것이 이제부터 자네가 목표로 삼을 경지라네. 물론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자네에게는 재능이 넘치니까 말이야.” 뚜렷한 목적지가 정해지자 막막함도 사라졌다. “목표는 영혼의 초월,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선 뭐부터 해야 할까요?” 서란의 물음에 여무진이 즉답했다. “수선에서 중요한 건 역시 심신의 조화겠지. 우선은 영혼을 단련해서 육신과 같은 높이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자네가 가장 먼저 수련할 건, 아무래도 이게 좋겠군.” 여무진이 서책을 하나 건네줬다. 표지에는 ‘분신술’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란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분신술! 설마 분신을 수천 개 만들어서 수천 배 증가한 효율로 수행하는 건가요?!” 여무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린가? 분신에게 자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조종은 자네가 하는데 효율이 왜 수천 배 증가하지?” 아쉽게도 효율 삼천 배는 아니었다. “그렇군요...” “도대체 왜 실망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군. 아무튼 자네가 이제부터 할 일은 간단하네. 바로 분신을 이용한 의식 분할 수련이라네.” 잠시 후, 서란은 책을 몇 권 더 챙겨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강의실로 향했다. ***** 금중패의 열정적인 일대일 강의가 끝났다. 강의 주제는 ‘토속성 공법에 관한 연구, 법기와 법술 간 효용성 차이의 관점에서.’였다. 결론은 법기 예찬으로 끝났다. 어쩐지 강연자의 주관이 다량 함유되어 있었다. “아시겠습니까, 류 수사?” 서란은 지나치게 길었던 강의를 다시 듣기 싫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럼요. 화속성이나 수속성처럼 동적인 속성은 법술에 적합하고, 목금토처럼 정적인 속성은 법기가 효율적이라는 내용이었죠? 확실하게 이해했습니다.” 금중패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불세출의 천재, 정확하십니다. 화수는 법술, 목금토는 법기. 이건 정말 상식입니다. 마찬가지로 법술보다는 법기가 우수한 것 역시 당연한 사실이죠. 고로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속성은 토속성과 금속성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어, 그러면 목속성 공법은...” 금중패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목속성이라, 글쎄요. 뭐, 영초를 재배할 때 정도는 유용하겠군요. 물론 영성이 생기려면 수백 년은 족히 걸리는 영초를 직접 기르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말입니다.” 결국 토금 속성 문파인 금작파 예찬이었다. 서란은 왠지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권각술 애호가 호혜문이었다. 이런 부류가 세상에 둘이나 있는 게 신기했다. 서란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러면 인형술은 어떤가요?” 연기술의 달인, 금중패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인형술이란 본디 법기를 만드는 연기술에서 비롯된 것, 굳이 비유하자면 연기술의 사생아라고 할 수 있겠죠. 비주류라는 사실이 다소 아쉽지만, 그래도 명예 법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결국은 도구의 일종이니까요.” 딱 서란이 예상한 답변이었다. “지극히 합리적이군요.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자칭 인형술사, 서란이 생각했다. 나의 인형술은 틀리지 않았어. 인형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역시 믿고 있었다고. 서란은 최근 들어서 토속성 법술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토속성 법술은 가망이 없었다. 처음에는 오죽문이 화수 공법 전문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토금 공법 전문인 금작파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었다. 토속성은 죄다 애매한 법술뿐이었다. 대요괴 퇴치용 갈고리 법술. 대지에서 솟구친 갈고리가 요괴를 묶는다. 처음부터 공격 법술로 맞혔으면 벌써 죽였다. 대지진을 일으키는 법술. 수도자는 보통 비행 법기를 타고 날아다닌다. 법력만 많이 빨아먹는 애물단지다. 지력을 북돋아 풍작을 부르는 법술. 휴경 농법을 쓰레기로 만들고 교나라 인구를 폭증시킨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전투 상황에서 비료를 도대체 어디에 사용하겠는가. 이제는 정말 인형술뿐이었다. 서란이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감동적인 강연이었습니다!” 금중패가 흡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구호 한번 외치고 수업을 끝내볼까요? 자, 우렁찬 목소리로, 제발 사람이면 도구를 씁시다!” 호혜문 앞에서는 절대로 외칠 수 없는 구호였다. “제발 사람이면 도구를 씁시다!” “좋습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수업이 끝나고 서란은 금중패에게 받은 물건을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선물 보따리가 꽤나 컸다. 법용술 수련에 쓸 연습용 법기가 한가득이었다. 심지어 갈고리 법술, 지진 법술, 비료 법술이 기록된 서책도 있었다. 비료 법술은 꽤 중요한 비전 아닌가? 이렇게 퍼 주면 뭐가 남을까? 여러분이 남나? 금작파도 다 생각이 있겠지 싶었다. 서란은 여무진에게 높이 올라가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금중패에게 토대를 넓히는 법도 배웠다. 이제는 오직 수련만이 남았다. 바로 분신술과 법용술 수련이었다. ***** 몇 년 전, 오죽문은 친선 대회로 시끌벅적했었다. 모두 자기가 최애하는 우상을 위해서 싸웠다.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개수작이 연신 오갔다. 그때 아귀다툼을 평정할 영웅이 나타났다. ‘그러면 누구 말이 맞는지 내기를 하죠?’ 백마 탄 초인, 바로 장옥기였다. 자기가 응원하는 대상에게 영석을 걸어라. 비공식 명칭, 인간 경마의 시작이었다. 예선전이 끝나고, 노름꾼들의 축제도 끝났다. 도박중독자들은 전두엽이 융해될 자극이 그리웠다. 결국 도파민 수용체가 망가진 불쌍한 이들을 위해서 초인 장옥기가 다시 한번 재능을 선보였다. ‘두려워 말라. 내 그대들의 갈증을 채워주리라.’ 장옥기는 곧장 들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토끼를 몇 마리 잡아서 돌아왔다. 경마에 반드시 사람이나 말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토끼 경마가 탄생했다. 토끼 경마, 초대박 안전 놀이터. 당신의 최애 토끼는 과연 몇 등? 지금 당장 영석을 걸고 확인하세요. 사설 도박장 운영자는 장옥기였다. 이번에도 당연히 무급이었다. 도박꾼 낙원은 그렇게 탄생했다. 수수료 전무. 운영자의 재능 기부로 유지. 인류 역사에 없던 사상 초유의 도박장. 경주용 토끼에 대한 세심한 관리. 경쟁 구도와 캐릭터성을 적극 활용한 스토리텔링 마케팅. 심지어 심심하면 찾아오는 이벤트 매치. 토끼 경마는 성황리에 번성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발각되었다. 사 년이나 지속되었으니 꼬리가 길었던 셈이다. 사건 담당자는 장옥기를 추궁했다. “얼마나 많은 부당 이득을 챙겼지?” 부당 이득은 전무했다. 애초에 수수료가 없는 도박장이었다. 장옥기는 무급으로 사 년을 넘게 일했다. 당연히 담당자는 믿지 않았다. “그런 건 장부를 뒤져보면 다 나와!” 장옥기는 꼬박꼬박 장부를 적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냥 장부 적는 게 재미있었을지도 모른다. 사건 담당자는 장서각의 회계 전문가들과 함께 수십 권이 넘는 장부를 감사했다. 회계 감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장옥기는 진짜로 무급으로 일했다. 담당자는 살짝 공포마저 느꼈다. “이봐, 장옥기. 왜 보수도 없이 도박장을 운영했지? 너도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그랬을 거 아니야.”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도대체 왜 무급이었냐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로 부당 이득을 수취할 경우, 오죽문 율법상으로는 명백하게 중죄였다. 원래라면 몇 년 이상은 지하 감옥에 수감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조금 난감했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는 성립한다. 하지만 ‘부당 이득’을 수취하지 않았다. 결국 장옥기는 중징계를 피했다. 장옥기, 가택 연금 삼십 일. 그리고 사회 봉사 육 개월. 참작의 여지가 있어서 경징계였다. 얼추 공연 음란죄 처벌 수위 정도다. 지옥 같은 가택 연금이 드디어 끝났다. 장옥기는 간만에 집밖으로 외출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똑같이 생긴 소녀 수백 명이 사방에 가득했다. 저마다 뭔가를 들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정체는 류서란이 만든 분신들이었다. 온 세상이 류서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