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금단 류서란이 돌아왔다. 대수림 심층부에서 보낸 십 년. 폐관수련 끝에 도달한 원영기. 가을 강좌 개설 예정. 이 소문은 삽시간에 대수림 전역으로 퍼졌다. 대수림 표층부에는 태본곡 말고도 수많은 중립도시들이 존재했다. 그곳에도 이름은 다를지언정 배움의 거리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배움터가 있다. 어떤 중년이 친구를 재촉했다. “자네 지금 뭐하고 있나! 어서 짐을 싸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태본곡으로 가야지! 신성금단 류서란이 십 년만에 돌아왔는데!” 친구가 물었다. “아니, 강사 한 명 복귀한 걸 가지고 왜 그리 호들갑인가? 어차피 축기기를 대상으로 한 강의라며? 결단기 수사를 몇 명씩 배출한 건 대단한 일이지만 솔직히 연기기인 우리 입장에서는 남 일 아닌가.” 중년은 답답한 마음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연기기 수사를 위한 강좌도 개설할 예정이라네! 자네는 어찌 그리 세상사에 어두운가!” 친구는 읽던 책을 내팽개치며 일어났다. “당장 출발하지!” 비슷한 일이 대수림 전역에서 벌어졌다. 심지어 경지 고하에 관계없었다. 신성금단 류서란이 연기기용 강의, 축기기용 강의, 결단기용 강의를 모조리 개설한 탓이었다. 태본곡의 인구 밀도가 폭증했다. ***** 서란은 영석 때문에 강사가 됐다. 동대륙의 인형술이 배우고 싶은데, 전송진을 밟고 날아온 터라 가진 게 없어서 돈벌이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하는 기분으로 시작했다. 물론 건성건성 가르쳤다는 뜻은 아니었다. 서란은 분명 강사로서 최선을 다했다. 강단에 올랐을 때만. 실제로 투자 성공한 다음부터는 강의를 안 했다. 반면에 지금은 진심이었다. 그야말로 진심 서란. 경지별로 강의를 세 종류나 개설한 이유였다. 영석을 효율적으로 벌고 싶다면 축기기 대상 강의만 개설했을 것이다. 숫자가 많은 연기기는 영석이 없고, 영석이 많은 결단기는 숫자가 적다. 하지만 이점도 있었다. 연기기를 대상으로 한 강의는 돈은 좀 안되지만, 인지도를 쌓을 수 있다. 숫자가 가장 많은 집단이기 때문이다. 신입 강사들이 괜히 무료 강연을 하는 게 아니다. 결단기를 대상으로 한 강의는 서란이 최초였다. 서란이 유명 강사들의 선생이 되는 셈이다. 그들이 가진 영향력이나 권위를 일부나마 흡수하는 게 결단기용 강좌의 목적이었다. 어느새 찾아온 가을. 넓은 공간에 연기기 수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수강생이 너무 많아!” “제대로 가르칠 수나 있는 거야?” “아, 수강료 아깝게...” 고개를 아무리 돌려도 보이는 건 군중뿐이었다. 도저히 강의를 진행할 상황이 아니었다. 모두가 웅성웅성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서란이 등장했다. “다섯 명씩 조를 짜주세요! 다섯 명!” “강사를 중앙에 두고 원형으로!” “간격을 넓히세요! 양팔을 벌려도 닿지 않게!” 갑자기 쏟아져 나온 개미 떼 같은 서란즈. 서란의 분신들이 수강생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파도처럼 밀려온 분신의 물결에 다들 당황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알았다, 분신이야!” “저게 다?!” 놀라거나 말거나 서란은 관심이 없었다. “다섯 명씩 한 조를 이루세요!” “원형으로! 간격은 넓게!” “조가 없는 사람은 손을 번쩍 드세요!” 어수선하던 현장이 순식간에 정리됐다. 연기기 수사들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분신술이라는 게 뭔지는 알지만,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분신을 다루는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이게 바로 원영기 수사의 힘인가 싶었다. 서란은 곧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조별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은 음악에 맞춰 맨손 체조로 몸을 풀겠습니다! 분신의 시범을 보고 잘 따라해 주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음악이 들려왔다. 가장자리에 위치한 연기기 수사들은 목격했다. 서란의 분신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고 있었다. 흥겨운 음악과 함께 서란이 외쳤다. “하나 둘! 하나 둘! 자, 따라 하세요!” 다리를 넓게 벌려 무게 중심을 낮추고, 두 팔은 물 흐르듯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오죽문 비전 신체 단련의 대가, 마 수사에게 배운 몸풀기 체조였다. 척 봐도 수준 높은 단련법이었다. 수강생들은 허둥지둥 체조를 흉내냈다. 동작이 꽤나 낯선 탓에 다들 자세가 틀어졌다. 하지만 틀려도 괜찮다. 숙달된 조교들이 있으니까. “거기, 무릎을 안쪽으로 집어 넣으세요!” “힘들어도 허리는 곧게! 부상 위험이 있습니다!” “시선은 손끝을 바라봅니다! 고개 드세요!” 가운데서 구령과 함께 시범을 보이는 분신. 자세를 틀리면 즉각적으로 피드백을 주는 분신. 저 멀리서 열정적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분신. 분신은 점점 늘어나더니 수강생보다도 많아졌다. 어느새 체조 시간이 끝났다. 딱 알맞게 데워진 수강생들의 육체. 본격적인 무술 훈련의 시간이었다. 수강생 한 명마다 분신이 하나씩 붙었다. 정말 호화로운 일대일 수업이었다. 수업은 마무리 체조까지 하고서야 끝났다. 서란이 공지 사항을 전파했다. “내일은 명상 수업, 모레는 기구를 이용한 신체 단련 수업이 있습니다! 한 분도 빠지지 말고 반드시 참석해 주세요!” 수강료가 아깝지 않은 알찬 일정표였다. ***** 연기기용 강의 자료는 오죽문 비전 신체 단련법을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해서 만들었다. 물론 무단 배포는 아니었다. 서란은 절대로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오죽문과 금작파의 공동 수뇌부였다. 서란이 구상한 뱅크런 작전은 보고서의 형태로 전송진 너머 공동 수뇌부에게 전달됐다. 요약하면 선과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은 십대문파의 창고를 털겠다는 내용이었다.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공동 수뇌부는 두렵지 않았다. 오죽문은 서란의 결단 의식을 위해 문파 기둥뿌리를 뽑았다가 파산할 뻔한 전적이 있었다. 스무 살짜리 최연소 결단기 수사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절벽에서 줄 없이 뛰어내린 격이었다. 광기도 이런 광기가 없었다. 물론 금작파도 만만치 않았다. 문파비승의 냄새를 맡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두 문파의 구성원을 혈연 관계로 엮어 버렸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지만 도가 지나쳤다. 한마디로 오죽문과 금작파, 두 문파의 수뇌부에게는 승부사 기질이 다분했다. 기회가 눈앞에 다가왔다 싶으면 두려워하지 않고 판돈을 올인한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서대륙 오대문파가 될 수 있었다. 공동 수뇌부는 서란의 보고서를 분석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단기간에 선과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지금이 바로 위험을 감수할 순간이었다. 공동 수뇌부가 결정을 내리자 오죽문과 금작파의 역량이 총동원됐다. 수도문파의 모든 인재가 모여서 머리를 맞댔다. 그들의 임무는 단 하나. 지상 최고의 강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비전 유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비승하면 그만이니까. 선계에 갈 수만 있다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결국 오죽문과 금작파는 해냈다. 두 문파의 빛나는 지성들이 모인 싱크 탱크는 지상 최고의 강의를 완성하고야 말았다. 자기들이 만들고도 놀랄 정도로 걸작이었다. 싱크 탱크의 결단기 수사들은 곧장 자료와 함께 동대륙으로 넘어왔다. 시간이 굉장히 촉박했다. 가을까지는 보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란은 첫 수업 전까지 세 종류의 강의를 완벽하게 습득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손쉬운 일이었다. 연기기용 강의. 맨손 체조, 무술 훈련, 명상, 신체 단련. 축기기용 강의. 상중하 분반 체계, 결단 의식에 대한 지식. 결단기용 강의. 천겁 대응법, 분신술 및 정신분할 수행. 오죽문과 금작파의 수천 년이 담긴 강의였다. 역대 원영기 수사만 백 명 이상, 그 아래 결단기부터는 감히 셀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이게 거대문파의 저력이었다. 공동 수뇌부의 진심이 서란에게 닿았다. 싱크 탱크도 전력을 다해서 협력했다. 그리고, 서란은 이번에도 기대에 보답했다. 강의 시작 전날, 서란은 교육의 신이 됐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 기분 좋게 땀을 흘린 연기기 수사들이 야외 강연장을 떠나려는 순간, 누군가 외쳤다. “류서란 강사님이 미쳤어요! 연기기용 단약, 오늘만 반값! 단약이 쌉니다, 싸요!” 지친 수강생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단약이라고?” “뭐, 단약?” “지금 단약이라고 그런 거야?” “단약?” 우르르 몰려든 수강생들이 판매원(금작파 결단기 수사, 첩보원)에게 물었다. “단약이라니, 제가 제대로 들은 겁니까?” 판매원이 크게 외쳤다. “맞습니다, 단약! 다들 류서란 강사님의 생애에 대해서 들어 보셨죠? 스승님이 단약을 잔뜩 물려주신 덕분에 빠르게 경지를 올리셨죠!” 수강생들이 일제히 웅성거렸다. “맞아, 나 들어 봤어!” “나도 기억났어! 단 씨 성을 가진 강의 보조가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아!” “그래, 단원표! 분명 그런 이름이었어!” 판매원이 수강생들을 진정시켰다. “자, 자! 다들 알고 계시니 제가 설명할 수고를 덜었습니다! 맞습니다, 류서란 강사님께서는 어릴 적부터 단약을 밥처럼 먹고, 탕약을 물처럼 마시며 수행을 하셨죠! 덕분에 남들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결단기 수사가 되셨습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워낙 재능이 출중하셨던 탓에 단약을 다 복용하기도 전에 다음 경지에 도달하신 겁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원영기 수사가 되셨죠! 잔뜩 남은 단약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시던 차! 특별히 대수림의 산수 분들에게 단약을 구매할 기회를 베푸신 겁니다! 참고로 오늘 하루는 연기기용 단약이 반값! 내일부터는 정상가에 판매되는 점 유의해 주세요! 만일 축기기용 단약이나 결단기용 단약을 구매하고 싶으신 분은 비밀리에 문의를 주시면 됩니다!” 태본곡에 핵폭탄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