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란은 예복을 차려입었다. 먼저 윗도리와 바지를 입는다. 여자는 추가로 긴 치마도 두른다. 묵직한 장포를 걸치고 허리를 묶으면 끝이다. 이게 오죽문의 고위계 수사 예복이었다. 옷감을 풍족하게 사용한 호화로운 복장이다. 치렁치렁한 소매와 옷자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옷은 절대로 혼자 못 입는다. 당연히 시중드는 사람도 몇 명 생겼다. 그렇다고 위계 질서가 철저한 종속 관계는 아니고, 영석을 대가로 하는 고용 관계였다. 단지 그 일당을 문파 재정으로 지원해줄 뿐이다. 낯선 옷차림으로 낯선 공간을 걷는다. 중앙에 위치한 정원, 그걸 둘러싼 갖가지 건물들, 넓은 부지와 사람 키보다 큰 담장. 아담하지만 저택이라고 부를 정도는 됐다. 물론 전근대 귀족 입장에서나 그렇고, 서란에게는 난감할 정도로 넓었다. 심지어 손님만을 위한 건물도 따로 존재했다. 소용녀 담청과 유학생 금영영이 머무르고 있다. 오늘 아침 식사도 셋이 같이 먹었다. 식사를 마친 금영영은 곧장 수행을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담청은 글방을 견학하러 갔다. 천기를 읽어서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인간의 삶이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서란도 일정 때문에 나가 봐야 했다. ***** 오죽문은 결단 의식에 미래를 걸었었다. 심지어 수도문파 본부가 위치한 산맥의 방어를 절반쯤 포기하는 초강수까지 뒀다. 어떤 세력이라도 이번 의식을 방해하면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이었다. 주변 수도문파들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친선 관계를 맺은 문파들은 일제히 침묵했다. 반대로 적대 관계인 문파들만 연일 떠들었다. 고작 스무 살? 결단은 소꿉놀이가 아니다. 아무리 간절해도 그렇지, 이런 무리수를 두다니. 이번 손실을 복구하는데 수백 년도 더 걸리겠군.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빌었다. 제발, 제발 실패해라... 이거 성공하면 우리 진짜 다 죽어... 천지신명이시여, 이건 아니잖아요... 의식 당일, 짧은 문구가 서대륙을 휩쓸었다. 오죽문에 결단기 수사 탄생, 나이는 스물. 양나라 인근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인접국들. 서대륙 끝에 위치한 군소 수도문파들. 심지어 바다 건너 다른 대륙에도 전해졌다. 성공했다면 무리수가 아니라 묘수다. 기꺼이 죽음을 무릅쓴 도약은 성공했다.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린 결과, 천운을 붙잡았다. 오죽문은 반드시 승천한다. 그리고 수도문파의 비승이란 천지개벽과도 같다. 서대륙은 필연적으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각 문파의 수뇌부들은 고민이 부쩍 늘었다. 물론 금작파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면 그만이었다. 최근 오죽문과 금작파는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이제는 비전 공법서까지 바꿔 읽는 관계였다. 결단기 수사 금중패는 토속성 공법 전문가다. 자기 수련에만 몰두하는 원영기 수사들과 달리 그는 한평생 남을 가르치는 학자로 살아왔다. 오늘은 인재 및 기술 교류의 일환으로 서란에게 금작파의 공법을 전수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둘은 개인 교습 이전에 잠시 한담을 나눴다. “금 수사는 잘 지내던가요?” 성씨가 같길래 혹시나 싶었던 서란이 물었다.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두 분은 서로 어떤 관계이신지요?” “저한테는 증손녀뻘이 되는 아이입니다.” “그랬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서란이 문뜩 떠올렸다. 저번에 온 사절단 총책임자도 친척 아니었나? 이번에도 증손녀뻘이야? 그냥 우연인가? 서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느 정도 친목을 다지고 수업이 시작됐다. 결단기란 육체의 초월이다. 특징은 크게 세 가지였다. 금단형성, 불괴지체, 만독불침이 그것이었다. 하단전에 형성된 금단은 중심축이다. 금단이란 막대한 영기를 끌어당겨 정순한 법력으로 바꾸는 인력의 근원이다. 덕분에 결단기 수사는 본인의 재량이 허락하는 한 마르지 않는 법력을 휘두를 수 있다. 불괴지체란 강인한 생명력에 대한 비유다. 결단기 수사는 영혼과 금단만 무사하면 불사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상처는 재생되고, 호흡과 식사, 수면조차 필요 없다. 이쯤에서 서란이 질문했다. “혹시 팔다리가 잘려도 다시 자라납니까?” “그 정도는 아닙니다.” 서란은 조금 실망했다. 마지막은 특징은 바로 만독불침이었다. 오롯한 소우주에는 삿된 기운이 침범할 수 없다. 요기, 마기, 사기 및 저주에 내성이 생긴다. 서란이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요괴나 마도공법을 익힌 수도자, 사악한 귀신, 저주술사는 도대체 뭘 할 수 있나요?” 금중패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그냥 죽어야지요. 아니면 열심히 도망치던가.” 수업 진도는 빠르게 나아갔다. 서란이 배울 공법의 이름은 ‘거산요지선공’이었다. 대충 산을 들고 땅을 뒤흔든다는 뜻이었다. 만약 공법을 대성하면 법력 한 줌으로 엄청난 위력을 낼 수 있다고 명성만 자자했다. 명성만 자자한 이유는 간단했다. 정작 대성한 사람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입문은 정말 쉽지만 대성은 정말 어렵다. 거산요지선공을 익힌 결단기 수사 대부분은 끝내 공법을 대성하지 못했다. 여기까지만 들어보면 하자 있는 공법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괜히 금작파의 비전 공법이 아니다. 일단 거산요지선공은 경지 상승이 빠르다. 얼마나 빠른지 공법 대성보다 먼저 원영기에 도달한 수도자가 있을 정도였다. 공법 숙련도가 경지 상승을 못 따라가서 생기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대성하지 못해도 충분히 강하다. 도를 넘은 건 후반부 학습 난이도다. 일단 입문하면 중반부까지는 금방 익힌다. 쉬운 입문, 빠른 성장, 압도적인 고점. 심지어 별다른 부작용조차 없었다. 세상 모든 마도공법을 불쏘시개로 만드는 이기적인 공법이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수도자를 거북이로 만드는 서란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공법이었다. 며칠 뒤, 서란은 다시 예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새로 배운 거산요지선공에도 꽤나 익숙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금중패는 확실히 우수한 교육자였다. 하지만 문파의 미래인 류서란을 온전히 외부인에게만 맡기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오죽문에서도 따로 선생을 뽑았다. 상대는 문파에 네 명뿐인 원영기 수사였다. 비록 공법 속성은 다르지만 원영기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도움을 제공할 예정이었다. 서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입구에서부터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작은 서고였다. “이런, 벌써 도착했군.” 책장 건너편에서 어떤 사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류서란이라고 합니다.” 서란이 공손하게 인사하자 금방 대답이 돌아왔다. “아, 아주 잘 알지. 솔직히 오죽문에 자네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일단 거기 앉게나.” 사내는 그렇게 말한 뒤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자 서책을 잔뜩 품에 안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책더미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물었다. “혹시 내 목소리를 듣고 뭐 떠오르는 건 없나?” 장난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목소리요?” 서란은 곰곰이 생각해봤다. 하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건 없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기,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하긴 내 목소리가 특색 없기는 하지.” 사내는 책더미를 탁자에 툭 올려놓았다. 서란은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곧장 오래된 기억이 수면 위로 튀어 올라왔다. “여, 여 수사님!” 자신을 여 수사라고 부르라던 여무진. 서란이 축기기 문턱에서 깨달음 문제로 고생하고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나서 조언을 건넨 은인이었다. 서란이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그리고 허리를 직각으로 접어서 인사했다.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무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완전히 잊어버리진 않았나 보군. 그러고 보니 그게 도대체 언제였지? 사 년? 오 년? 대충 그 정도 됐지 아마?” 축기기에 도달한 이후 서란은 여무진을 찾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구성원 명부를 아무리 뒤져봐도 여무진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혹시 방문객이었나 싶어서 인상착의와 함께 수소문을 해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오랜 시간이 흐르고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어버리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못 찾는 것도 당연했다. 애초에 원영기 수사의 인적 사항은 극비 정보다. 당황한 서란에게 여무진이 물었다. “그래서 내가 그때 준 죽순은 잘 먹었나? 설마 냅다 버리지는 않았겠지?” 서란은 즉시 기억을 뒤졌다. 내가 그 죽순을 먹었던가? 죽순밥으로? 아니면 다른 요리로? 분명히 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머, 먹은 것 같습니다!” 통통 튀는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여무진은 장난을 계속했다. "같습니다? 정말로 먹은 게 확실한가? 까마득한 어른 앞에서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상상도 못한 상황에서 은인을 만나 바짝 긴장한 서란이 정신을 차린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