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란은 요즘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절벽 끝에 몰려있던 오죽문의 재정도 호전됐다. 초대형 운하, 동맹 문파 간에 잦아진 교역, 어인 교단의 공물 덕분이었다. 재정을 담당하는 재경부에게 류서란은 구원자였다. 자기 때문에 문파 망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을 내려놓은 서란은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서란의 아침은 빠르다. 새벽 같이 기상해서 한증막에 들어간다. 노는 건 결코 아니고, 수련의 일환이었다. 그냥 한증막이 아니라 법보 한증막이었다. 좁고 밀폐된 공간, 오직 의자와 법보뿐이다. 문을 닫고 향로에 불을 붙이면 한증막 완성이다. 실험을 거듭하다가 알아낸 사실인데, 향로에서 나오는 연기는 피부로도 흡수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이 밝혀진 계기는 순전히 우연이었다. 향로에 불을 피우고 흰 연기를 마시던 서란은 딴생각을 하다가 숨 쉬는 걸 잊어 버린 적이 있었다. 결단기 수사는 질식 따위로는 안 죽어서 의식하지 않으면 가끔씩 이럴 때가 있었다. 같이 연기를 마시며 누워있던 담청은 경악했다. 평소에는 코로 호흡해서 몰랐는데, 향로의 연기는 서란의 살갗으로도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양서류도 아니고 피부 호흡이라니. 물론 서란이 청개구리라서 그런 건 아니고, 원래 법보에 내재되어 있는 효능 중 하나였다. 서란과 담청은 즉시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연기를 전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차라리 비좁은 공간에서 향로를 사용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법보 한증막은 그렇게 탄생했다. 매일 아침, 서란은 한증막에서 명상을 했다. 향로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 때문에 한증막 내부 온도는 계속 상승하지만, 어차피 결단기 수사는 열사병에 걸리지 않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훤히 드러낸 서란의 피부가 발갛게 달아오르며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다소 민망하지만 흡수 효율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영혼 단련과 땀 빼기를 마친 뒤 목욕을 한다. 옷을 차려 입고 늦은 아침을 먹는다. 식사가 끝날 때쯤 이아금이 찾아와서 말한다. “언니, 약 먹을 시간이야.” 약당이 열심히 만들어준 다종다양한 영약이다. 흔히 단약하면 떠오르는 환약, 물에 타서 먹는 가루약, 뭘 넣었는지 걱정스러운 진한 탕약, 심지어 바르는 약도 있었다. 오전 분량을 열심히 먹고, 마시고, 바른다. 서란이 약재 냄새 풀풀 풍기며 한마디했다. “이거 너무 쓴데... 달게 만들 수는 없는 거야?” “단약이라는 게 자기 마음대로 재료를 넣고 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냥 당과 먹고 참아.” 결국 오늘도 당과나 쭙쭙 빨면서 집을 나섰다. 어인 교단의 신, 대지모신 노릇을 할 시간이었다. 신당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인족 순례자들이 회전 초밥처럼 순차적으로 알현한다. 서란은 곧은 자세로 앉아 있다가 공물을 받고 덕담 몇 마디 해주는 게 일이었다. 약간 아이돌 팬사인회 비슷한 분위기였다. 일등 신도가 연신 주의를 줬다. “공물은 수입의 오 푼을 초과해서는 안됩니다. 이를 어길 경우, 삼 개월 간 공물을 바칠 수 없습니다.” 신도가 감탄했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어야지!” 퇴근 시간이 된 서란이 집으로 날아갔다. 피로는 결단기 수사의 육체를 이길 수 없었다. 이제 잠들기 전까지 인형술을 공부할 시간이었다. 오죽문이 파산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서란의 개발 지원금도 돌아왔다. 사실상 자기가 번 돈을 돌려받는 셈이었다. 하지만 네 것이 내 것이면, 내 것도 네 것인 법. 서란은 이런 사소한 부분에 개의치 않았다. 풍족한 재료를 손에 넣은 서란은 열심히 맨땅에 헤딩하기를 반복했다. 꿀팁 하나 가르쳐 줄 사람도 없는 비주류 법술을 선택한 어리석은 자의 숙명이었다. 당연히 학습 진도는 정체되었다. 달력이 빠르게 넘어갔다. 온 산맥이 흰 눈으로 뒤덮인 겨울. 드디어 서란의 생활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변화를 만든 계기는 단순했다. 하루도 쉬지 않은 부지런함. 사람들은 흔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볼 수 없다고 특정한 개념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인간의 정신력도 마찬가지였다. 결단기란 육신의 초월. 원영기란 영혼의 초월. 그리고 서란은 결단기 수사였다. 한마디로 이미 초월해 버린 육신과 달리 영혼은 아직도 인간의 한계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이인삼각을 하는 셈이었다. 자기는 힘들지 않다고 혼자 열심히 내달리던 육체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옆을 바라봤다. 서란의 정신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꿈 속에 나온 마음(의인화)이 서란에게 말했다. “나 있잖아, 이제 더 이상은 못할 것 같아.” 그리고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서란은 기울어진 문파를 살려보겠다고 일 년 동안 휴일도 없이 대규모 토목 공사를 계속했다. 가혹한 일정을 가까스로 소화하고 여름 해변에서 즐거운 바캉스를 즐기려던 계획도 좌절됐다. 졸지에 어인 교단의 대지모신이 되고, 담청이 파업하는 동안 줄곧 도장이나 찍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 서란의 마음은 복합 골절과 초고속 회복을 반복했다. 하지만 야구 선수의 팔꿈치 관절이란 원래 쓸수록 망가지고, 그건 사람의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초인적인 회복 탄력성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맹렬히 타오르던 내면의 불꽃이 피시식 꺼졌다. 아침에 눈을 뜬 서란이 혼자 중얼거렸다. “나도 안 해.” 서란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정신 수양? 질렸어, 안 해! 단약 섭취? 맛도 없는 걸 내가 왜! 신 노릇? 그것도 때려치울 거야! 인형술? 비주류 법술 싫어! 절대 파업 선언. 흔히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상황이었다. 수선계에서는 심마라고 교양있게 표현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다들 ‘결단기병’이라는 명칭을 더 자주 사용하곤 했다. 류서란이 흑화했다. 오죽문 전체에 초비상이 걸렸다. ***** 촉망 받는 천재의 타락. 문파 비승이 걸린 중대 사항이었다. 오죽문 수뇌부가 즉시 소집되었다. 심각한 분위기 속에 누군가 발언했다. “일단, 심마에 빠진 건 확실해 보이죠?” “아무래도 그런 모양입니다.” “그런데 정확히 무슨 심마입니까? 심마도 종류가 여러가지 있는데.” “왜, 흔히들 결단기병이라고 부르는 그겁니다.” 심마에 대해서 잘 아는 박식한 이가 설명했다. “남들보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도자들이 종종 겪는 병입니다. 결단기에서 가장 발병 빈도수가 높은데, 정신과 육체의 괴리가 주된 이유로 꼽힙니다. 정신이 육체를 못 따라가서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군요.” 옆에 앉아있던 수사가 물었다. “정신과 육체의 괴리요?” “네, 그렇습니다. 결단기에 도달하면 육체가 한계를 초월하죠. 아무리 수행을 해도 몸이 지치지 않으니, 당최 멈추지를 않는 겁니다. 게다가 원영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정신 수양에 집중하기까지 하면 사태가 더욱 악화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가뜩이나 몸만 튼튼한 결단기 수사가 육신은 편하고 영혼이 힘든 수행을 해서 생기는 문제로군요.” “예, 신체적 피로가 없으니 문제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나중에 봤더니 몸은 멀쩡한데 정신만 피폐해져 있는 겁니다. 화로가 크다고 장작을 한꺼번에 전부 넣고 태워 버려서 연료가 고갈된 상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 멀리 자리한 사람이 물었다. “저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흔한 병입니까?” 박식한 수사가 대답했다. “심마 중에서는 굉장히 드문 경우입니다. 사람이라면 보통 이 지경이 되기 전에 스스로 멈추거든요.” 수뇌부는 오래 전에 본 보고서를 떠올렸다. 오죽문 비전 신체 단련 전문가, 마 수사가 제출한 류서란 관찰 보고서였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보고서 내용에 ‘일반적이지 않은 향상심’이라는 문구가 열댓 번쯤 들어가 있었다. 한층 심각해진 수뇌부가 웅성거렸다. “혹시 괜찮은 치료 방법이 있습니까?” 어떤 이의 질문에 심마 전문가가 대답했다. “딱히 없습니다. 그냥 자연 치유뿐입니다. 괜히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놔두는 게 가장 좋죠.” 질문이 이어졌다. “회복에 필요한 시간은 어느 정도죠?” “몇 년 정도 수행을 멈추면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평균적으로는 말이죠.” 고작 몇 년 정도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희소식에 회의장 분위기가 풀렸다. 그때 혼자 고민에 잠겨 있던 수사가 질문했다. “평균적이라는 말은, 더 걸리거나 회복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만약에 회복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죠?” 전문가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긴장감은 점차 고조됐다. 마른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적막한 회의장, 심마 전문가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잘 알려지지는 않은 사실이지만, 오죽문에도 결단기병을 극복하지 못한 수도자가 한 분 계셨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이미 잘 아시는 분입니다.” “누구죠?” “수십 년 전에 돌아가신 엽 수사님이십니다.” 수뇌부는 이름만 듣고는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랬다. 그러다가 누군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수사가 물었다. “혹시, 인형술에 심취하신...” “예, 그 분이 맞습니다.” 영근 자질, 일영근. 최종 수행 경지, 결단기. 향년, 오백 세. 사인, 수명 한계 도달. 본명, 엽관보. 스스로를 서대륙 최고 인형술사라 자칭하는 자. 취미는 인형술. 서란이 가진 ‘학습인형연구’의 저자, 인형술 애호가의 정체가 바로 엽관보였다. 공포가 수뇌부 전체에 전염됐다. 엽관보는 결단기병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인형술에 심취한 괴인이 됐다. 결국 수행마저 등한시한 나머지 일영근자임에도 죽을 때까지 원영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서란이라고 암흑 진화해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수뇌부는 수백 년 동안 점토인형을 만지작거리며 결단기에 머무르는 류서란의 모습을 상상했다. 이게 대전쟁보다 더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