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란과 담청, 어인 몇 명은 육지로 올라왔다. 해선문에게 운하 공사 협조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건나라에게는 애초부터 결정권이 없었다. 담당자는 서란의 웅대한 포부를 듣고 대답했다. “그건 조금 곤란할 것 같습니다.” 절대 안된다는 외교적 수사였다. 당연한 결과였다. 건나라를 동서로 관통하는 운하를 만들겠다니. 멀쩡한 국토를 반으로 쪼개는 격이다. 수뇌부가 제정신이라면 수락할 리가 없었다. 해선문과 나름 교류를 이어오던 어인 교단은 이미 협상 상대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비책도 준비했다. 교주의 신호를 받은 홍린어가 앞으로 나섰다. 협상의 귀재가 담당자의 귀에 속삭였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양나라로 향하는 운하가 생긴다면 얼마나 많은 교역선이 건나라를 거쳐 갈지. 양나라는 대국입니다. 당연히 생산하고 소비하는 물산도 상상을 초월하지요. 운하만 뚫리면 그 막대한 물류가 전부 해상으로 오갈 게 분명합니다. 그러면 누가 또 이득을 볼까요? 건나라가 아닐까요?” 살짝 혹했던 담당자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건나라가 덕을 본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래도 안되는 건 안되는 겁니다. 애초에 우리 해선문에는 그렇게 거대한 운하를 만들 역량이 없습니다.” 이번 답변도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그 운하를 왜 해선문이 만듭니까? 그저 범인들을 부려서 공사하는 시늉만 하십시오. 토목 공사 같은 건 저희 대지모신님께는 너무나 손쉬운 일입니다. 수사님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겠지요? 토목 공사의 신을...” 담당자는 어느새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예, 저도 해선문 사람이니 들어는 봤습니다. 망망대해에 눈 깜짝할 사이에 인공섬이 생겨났다고...” 홍린어가 협상에 쐐기를 박았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닙니다. 속세의 범인 국가뿐 아니라 해선문의 창고도 채워드려야지요. 저희 어인 교단은 도리를 모르는 집단이 아닙니다.” “그러면 혹시?” “예, 저희 어인족이 운하를 지날 때마다 통행료를 드리지요. 어떤 물건으로 값을 치르면 좋을까요. 어디, 영석은 어떨까요? 저희에게는 그저 돌이지만, 수도자에게는 귀한 수행 자원이라지요? 아시다시피 심해에도 영석 광맥은 많습니다. 아직도 곤란함이 남았을까요?” 담당자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전혀요?” 어인 협상단은 당사자와 원만하게 합의했다. 해선문을 나온 뒤, 서란이 물었다. “담청 님, 그 향로는 왜 계속 들고 계세요?” 오늘 아침부터 향로 하나를 애지중지 끌어안고 다니던 담청이 대답했다. “이 향로는 법보다.” “법보가 뭐죠? 법기 비슷한 건가요?” “정말로 아는 게 없구나. 법보란 신선이 직접 만든 신묘한 보물을 뜻한다. 수도자가 만든 법기 따위와 비교하기에는 미안할 정도지.” “신선? 그러면 선계에서 만든 거 아닙니까?” “당연한 걸 묻는구나.” “그런데 왜 지상에 있죠?” “가끔씩 이런 일이 발생하곤 한다. 선계에 있던 물건이 차원의 틈새를 통해서 인계로 떨어진 게지.” 서란은 찌그러진 향로를 유심히 살펴봤다. 여전히 싸구려 골동품 같은 생김새였다. 하지만 담청의 설명을 듣고 나니 꾀죄죄한 쓰레기가 아니라 고풍스러운 명작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궁금해진 서란이 물었다. “그렇게 귀한 보물을 어디서 찾으셨나요?” “전대 용신이 만든 수집품 창고에서 발견했다.” “그러면 전대 용신은 어디서?” 담청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글쎄, 아마도 바다에 떨어진 걸 주웠겠지?” 확실히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서란은 향로에 급격하게 관심이 많아졌다. “전대 용신은 왜 이런 법보를 두고 승천했을까요? 저라면 입안에 넣어서라도 반드시 가져갔을텐데.” 담청도 동감했다. “못 챙겨간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 아니, 아무튼. 이 향로, 효능도 굉장하다. 안에 불을 붙이고 명상을 하면 정신 수양에 큰 도움이 된다. 어제 시험 삼아서 잠깐 사용해 봤는데, 영혼마저 맑아지더구나.” 하루 종일 품에 안고 있던 이유가 있었다. “저 원영기 갈 때도 진짜 좋겠네요!” “필요하면 네게도 빌려주마!” “감사합니다, 담청 님!” “뭐 이런 걸로!” 법보도 나눠 쓰는 아름다운 우정이었다. 둘은 하하호호 웃으며 즐겁게 떠들었다. 향로의 원래 주인은 벌써 까맣게 잊어 버렸다. 수십 년 전에 승천했을테니 그냥 없는 셈 쳤다. ***** 서란표 특대운하 건설 프로젝트. 해선문은 설득당한 지 오래였다. 이로써 계획은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거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오죽문은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일 년 넘는 외화벌이를 마치고 돌아온 서란이다. 갑자기 어인 교단의 신이 됐다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문파를 위해서 제 한 몸 희생한 공로가 컸다. 수뇌부는 이제부터 서란이 어떤 기행을 저질러도 전적으로 지지해줄 마음이 있었다. 애초에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오죽문은 즉각 대규모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러자 아직도 오죽문에서 남아있던 금중패가 달콤한 냄새를 맡았다. 수뇌부 회의장 근처를 서성이던 그는 새로 사귄 친구에게 물었다. “이보게, 주 수사. 뭐 새로운 일이라도 있었나?” “아, 바다에서부터 이 근처까지 운하를 만든다고 하더군. 어인 교단이랑 지속적인 교류를 하겠대.” 주 수사는 대수롭지 않게 알려줬다. 딱히 기밀 사항도 아니었던 탓이다. 금중패는 어렵지 않게 미공개 정보를 입수했다. 며칠 뒤, 금작파에서 사절단이 찾아왔다. 용건은 하나였다. 기왕 운하 만드는 거 아예 교나라까지 연장하자. 대신 우리도 공사를 돕겠다. 금작파는 금토 속성 전문 수도문파, 자기들도 돕겠다고 하니 오죽문도 흔쾌히 동의했다. 결국 금작파 토속성 수도자들도 바빠졌다. 그러자 금작파에 머무르던 약목파 수사가 물었다. “이보게,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가?” 금작파 수사도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아, 그게 말입니다.” 며칠 뒤, 약목파 사절단이 오죽문에 방문했다. 그들은 우리도 계획에 참가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수선계 국제 시장 면세 특권을 살며시 내밀면서. 꿀통 하나에 곰 여러 마리가 앞발을 집어 넣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안에 든 꿀이 점점 늘어났다. 곰들은 더욱 즐거워졌다. 결국 운하 길이는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곱절은 더 길어졌다. 바다에서부터 시작된 운하는 건나라, 양나라, 교나라, 주나라를 차례대로 거쳐서 다시 바다로 나갈 예정이었다. 사 개국을 관통하는 초대형 운하였다. 된서리를 맞은 건 속세 왕국이었다. ***** 왕도 연락 담당 겸 인면조 애호가, 거기에 경증 결벽증까지 겸비한 고 수사가 양왕에게 말했다. “전달 사항은 잘 이해했나?” 양왕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운하를 설계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맞다.” “동쪽 국경에서 양나라 중서부를 거쳐서 북쪽 국경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규모로, 맞습니까?” “정확하다.” “당장 올해 농한기까지 말이지요?” “잘 이해했으면서 왜 계속 물어보는 거지?” 양왕이 옆에 있던 대신에게 눈치를 줬다. 군주 노릇의 장점 중 하나는 직접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대신 시킬 권력이 있다는 부분이었다. 억울하면 자기도 왕하면 된다. 본의 아니게 떠밀린 대신이 고 수사에게 말했다. “하지만 고 수사님, 지금은 초가을입니다. 공사 시작이 농한기라고 하셨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국토를 관통하는 거대한 규모의 운하를 설계하려면 할 일이 많습니다. 답사도 해야하고, 이런저런 측량이나 계산도 잔뜩 필요하죠.” 고 수사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양왕과 대신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고 수사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그래, 너희가 참으로 고생이 많겠구나. 아무튼 추수하기 전까지는 설계를 끝내 놓거라. 나는 그때 다시 방문하마.” 그리고는 훨훨 날아서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대충 풀이하면 상류층에게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걸맞는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원래 세상에 공짜 점심 같은 건 없는 법이었다. 마침 잘 된 일이었다. 오늘 점심, 양왕과 대신들은 성대한 연회를 열어서 산해진미를 즐겼었다. 이제 밥값을 할 차례가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수백 년을 사는 수도자들의 웅장한 포부는 범인에게는 너무나 버거웠다. 아까 상차림으로 반찬 오십 개 올리고 식사했던 양왕이 옆에 있던 대신에게 물었다. “토목 공사면 공부 관할이 맞느냐?” 대신이 즉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공부 대신, 이 자리에 있는가?” 공부 대신이 죽을상을 하고 앞으로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짐이 이 문제에 대해서 신경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소. 자네를 믿어도 되겠나, 공부 대신?” “예, 전하...” “좋소, 예산 문제는 재상과 의논하시오.” 관청으로 돌아온 공부 대신이 아랫사람들을 모조리 소집했다. “설계, 측량, 건축, 하여간 뭐든지 상관없다. 운하 설계에 필요한 장인들을 소집해라. 지금 당장.” 보좌관이 물었다. “얼마나 많이 모을까요?” “전부.” “예? 하지만 그러면 예산이...” 공부 대신이 결연하게 선언했다. “괜찮다, 양나라는 대국이니까.”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소요 시간을 단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을 왕창 쏟아붓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일이 건나라, 교나라, 주나라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