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란은 병원으로 향하며 연신 툴툴거렸다. “아금아, 진료 꼭 받아야 해?” “당연하지. 언니 툭하면 심마 걸리잖아.” “두 번 밖에 안 걸렸는데...” 이아금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말했다. “두 번 밖이라니! 그게 말이야?!” “아니, 뭐...” “원래 두 번이 세 번, 네 번 되는 거야!” 서란은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두 번째 심마 완치된 지도 몇 년 안됐는데?” “내가 알아 봤는데, 심마는 재발이 엄청 쉽대.”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세 번씩이나 걸릴까.” 잠시 후, 심마 전문 병원에 도착했다. 이아금은 곧장 창구로 가서 접수했다. 미리 예약한 덕분에 금방 서란의 차례가 됐다. 서란은 아담한 방으로 안내됐다. 간호사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설문지 하나만 작성해 주세요.” 서란은 괜히 움찔하며 물었다. “설문지요?” “예, 초진 설문지라고 하는 거거든요. 다 적고 옆에 있는 종을 울리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간호사는 문을 닫고 나갔다. 서란은 두 장짜리 초진 설문지를 살펴봤다. 문항 숫자 자체는 몇 개 안됐다. 간단한 인적 사항, 방문 이유, 그리고 심마 병력 따위를 묻고 있었다. 서란은 금방 설문지 작성을 마쳤다. 종을 땡 울리자 아까 그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는 설문지를 챙겨 사라졌다. 잠시 후, 간호사는 두꺼운 종이 뭉치를 끌어안은 채 다시 나타났다. 법관 고시용 법전 저리 가라 할 두께였다. 하도 두꺼워서 잘하면 화승총도 막겠다 싶었다. 간호사는 종이 뭉치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이것도 방금 전 초진 설문지랑 똑같이 작성해 주시면 돼요. 다 끝나면 종 울려 주세요.” “이건 뭔가요?” “다면적 인성 검사지예요. 아, 반드시 솔직하게 답변하셔야 해요. 아셨죠?” 말을 마친 간호사는 방을 나섰다. 서란은 검사지 첫 장을 넘겼다. ‘약속 시간에 늦는 경우가 있습니까?’라는 문항이 있고, ‘매우 그렇다.’부터 ‘전혀 그렇지 않다.’까지 다섯 개 중에서 고르는 방식이었다. 전생에 받았던 병역 판정 검사 생각도 났다. 서란은 묵묵히 검사지를 채워 나갔다. 21번 문항, 748번 문항, 5210번 문항... 질릴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란은 마침내 검사지를 모두 채울 수 있었다. 종을 땡 울리자 방문이 열렸다. 간호사가 검사지를 챙기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기실에서 일행 분과 함께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끝난 건가요?” “아뇨, 이제 시작입니다.” 서란은 터덜터덜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 들어서자 이아금이 보였다. 의자에 앉아 심마 정보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이아금이 고개를 들었다. “아, 끝났어?” “이제 시작이라더라.” “그러고 보니 오래 걸린다고 들었던 것도 같네.” 서란과 이아금은 대기실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중간중간 간호사가 서란을 데리고 나갔다. 검사가 끝나면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서란은 정말 다양한 검사를 받았다. 그림을 그리거나 미완성된 문장을 마저 완성하기도 하고, 의사와 선문답 비슷한 걸 주고 받기도 했다. 그 중에는 수도자 오성 검사라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검사가 끝났다. ***** 결과지를 들여다보던 의사가 말했다. “류 수사님께서는 심마가 아닙니다.” 이아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서란은 보란듯이 가슴을 폈다. 하지만 아직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원래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이었다. 의사가 말을 이어 나갔다. “다만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이아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 그 문제가 뭔가요?” “심각한 수준의 수행 중독입니다.” “수행 중독이랑 심마가 다른 건가요?”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심마라는 건 쉽게 말해서 혼백과 육신, 기 등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육체와 정신의 괴리라든가, 기의 불균형이 대표적인 예시죠. 쉽게 말해서 수도자들만 겪는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 중독은요?” “도박 중독, 마약 중독, 천라지망 중독 같은 그런 거죠. 표현은 수행 중독이라고 했지만, 그냥 일 중독이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서란이 잽싸게 끼어 들었다. “심마가 아니면 굳이 치료할 필요도 없겠군요!” “방치하면 심인성 심마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당장 치료해야겠군요!” 이아금이 물었다. “선생님, 치료는 가능한 거겠죠?” “그럼요, 치료 의지와 꾸준한 상담만 있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의사가 대답했다. “우선 수행 중독의 원인부터 알아야 합니다.” “원인이라는 말씀이시죠?” “예, 그렇습니다. 원인도 모르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죠. 가장 흔한 이유는 아무래도 불안이겠군요. 얼마 남지 않은 수명,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성과에 대한 압박, 혹은 강박적인 완벽주의 성향. 모든 수도자들이 크든 작든 이런 종류의 불안을 안고 살죠.” 이아금이 말했다. “수명 문제는 아닐 거예요. 언니는 영생자거든요.” 서란도 한마디 보탰다. “강박적인 완벽주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의사도 제 나름대로의 분석을 내놓았다. “올해로 691세, 그리고 태성기 맞으시죠? 통계적으로 보면 1급 혹은 2급 선골을 지니셨을 테고... 음, 오성 검사 결과도 매우 우수합니다. 특히 공간지각능력이 유달리 뛰어나시군요.” 이아금이 물었다. “공간지각능력이요?” “공간이나 물체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죠.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형상화할 때도 필요하기 때문에 시공간분석능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죠... 아무튼 수도자로서의 재능이 종합적으로 뛰어나다는 점만 아시면 됩니다. 아마도 이게 원인이 아닐까 싶군요.” “뛰어난 재능이 문제가 되기도 하나요?” 의사가 대답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은 천재에게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특히 수선계가 그렇죠. 어떤 선골을 타고 났으면 몇 살에 어느 경지까지는 도달해야 한다, 그런 얘기가 판을 치는 세계 아닙니까.” “나이, 성과에 대한 압박이군요.” “그리고 보다 자질이 떨어지는 수도자에게 뒤처질지 모른다는 공포이기도 하죠. 분노, 자괴감, 자기혐오, 열패감, 절망 등등 안 겪어 본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이라더군요. 이 중압감을 못 견뎌 끝내 은거를 선택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아금은 입을 틀어막은 채 서란을 바라봤다. 문파 비승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은 일영근자. 진선경에 도달해 문파를 부흥시키겠다는 각오.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하던 모습. 이아금은 눈물을 글썽이며 서란을 껴안았다. “언니, 여태까지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아금아.” “맞아,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랬지... 언제나 괜찮은 척하면서 나부터 달래고, 안심시키고... 정작 본인도 힘들었을 텐데...” 서란은 황급히 부인했다. “아금아, 나 진짜 괜찮아. 이거 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라니까? 나 일 좋아하는 거 알잖아, 응?” “또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구나...” “아, 물론 걱정될 때도 있었지. 선계라는 낯선 곳에 왔으니까. 그래도 이제는 안 그래. 피풍사문과 동맹도 맺었고, 최고재판소라는 배경도 얻었잖아. 이제 금죽문의 앞날은 탄탄대로야.” 이아금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역시 힘들었구나! 내가, 내가 미안해...!” “아금아, 그만 울어...” “징자게 누히해지 모태서 미아내...” 진작에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뜻 같았다. 서란은 엉엉 우는 동생을 어르고 달랬다. 의사마저 눈물을 글썽일,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심마 진료는 그렇게 어영부영 끝났다. 이윽고 ‘후회’라는 광풍이 금죽문을 휩쓸었다. ***** 담청은 소식을 듣고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서란이 그렇게 힘들어 하고 있었다니...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저 의지하려고만 했었구나... 따지고 보면 이제 막 백 살 남짓된 어린아이일 뿐이거늘... 나의 죄가 참으로 깊도다...” 장선화도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루신 업적에 눈이 멀어서 본질을 보지 못했어요. 아니, 노력조차 안 했다는 말이 옳겠군요. 저한테 선생님은 진리요, 빛이며, 하늘이었으니까요. 아아, 스승을 보필하는 것조차 못하는 제자가 더 살아서 무엇하리...!” 호혜문도 덧붙였다. “아뇨, 비단 개인의 과오가 아닙니다. 금죽문 전체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는 여태 류 수사님께 너무나 많은 짐을 짊어지도록 강요했습니다. 문파 비승이라는 숙원을 이루어 줄 유일한 존재라는 이유로, 찬란한 재능을 타고 났다는 이유로, 그 누구보다 노력했다는 이유로... 예, 고작 그런 이유로...” 통신부장 겸 방송국장 겸 민선 의원 금영영도 열성적으로 외쳤다. “옳소! 그 어떤 집단도, 그 어떤 이도 누군가에게 수선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류 수사님께서는 이미 우리 금죽문에 차고 넘칠 정도로 헌신하셨습니다! 열심히 땀 흘린 자는 마땅히 쉴 자격이 있습니다!” 민선 의원들도 일제히 호응했다. “그 말이 옳습니다!” “문파 비승 하나만으로 우리는 평생토록 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은혜에 보답할 차례입니다!” “맞습니다!” “보은해야 합니다!” “보은! 보은!” “동의합니다!” “보은합시다!” “저도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