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금의 생일 잔치가 끝나고 며칠 뒤, 손달은 서란에게 말했다. “류 법관님, 혹시 휴가 좀 쓸 수 있을까요?” “휴가? 언제요?” “닷새 뒤 하루면 됩니다.” 서란은 흔쾌히 대답했다. “당연히 되죠. 그런데 별일이네요. 손 호법이 휴가를 다 쓰시고. 여태까지는 전부 돈으로 받으셨잖아요.” “아, 이번에 친구가 결혼하거든요.” “혹시 그 친구도 용족인가요?” 손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맞습니다. 사진 보여드릴까요?” “봐도 돼요?” “그럼요.” 손달은 단말기의 사진첩을 열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몇 장 보여줬다. 서로 정말 친해 보였다. ***** 닷새 뒤, 손달은 오랜만에 평상복을 입었다. 저택 구성원들과 인사한 뒤, 대문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곧장 올빼미 인형이 하나 따라붙었다. 올빼미 인형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부인 발견, 조회 실시. 신원 확인. 손달 님, 행선지를 말씀해 주세요.” “극광 제도 밖으로 나갈 예정이다.” “행선지 확인. 안내를 시작합니다. 경고, 위험할 수 있으니 함부로 경로를 벗어나지 말아 주세요.” 올빼미 인형이 선도 비행을 실시했다. 손달은 뒤따라 비행하면서 재차 확신했다. 금죽문은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물론, 숨기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세상에 비밀 하나 없는 수도문파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금죽문은 도가 지나쳤다. 손달은 금죽문 곳곳을 살펴봤다. 극광 제도는 5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 명칭은 범인 구역, 수도자 구역, 어인족 구역, 외부인 구역, 그리고 특별 구역이었다. 범인 구역에는 범인만, 수도자 구역에는 금죽문 소속 수도자만, 어인족 구역에는 어인족만 들어갈 수 있었다. 임시 출입 허가를 받고 방문한 외부인들은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는 즉시 추방당했다. 예외는 손달을 비롯한 수행원단과 사유경뿐이었다. 오직 이들만이 특별 구역에 출입할 수 있었다. 나름 중요 인물 취급을 받는 셈이었다. 서란과의 관계 덕분이었다. 잠시 후, 올빼미 인형이 말했다. “목적지 도착. 안내를 종료합니다.” 말을 마친 올빼미 인형은 극광 제도로 돌아갔다. 손달은 극광 제도의 전경을 용안에 담았다. 하늘은 올빼미 인형 군단에 의해 뒤덮였고, 바다에는 어인족 순찰대가 바글바글했다. 아무리 봐도 편집증적인 보안 체계였다. 손달은 전송진을 통해 도원향 총타로 향했다. ***** 도원향은 선계 최대, 최고의 조직이었다. 그 어떤 거대문파조차 감히 맞먹을 수 없는 규모의 역사, 시설, 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선계의 일곱 지선 중 다섯이 도원향 소속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도원향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손달은 도원향 오대 기관 중 하나인 기록보관소 소속의 정보 요원이었다. 나머지 기관들의 명칭은 최고재판소, 윤회전생청, 천기연구소, 천간관리원이었다. 다섯 지선이 각 기관의 수장을 담당하고 있었다. 참고로 기록보관소의 수장은 영세 필경사, 첨천답층진군이었다. 손달은 전송진 관리소를 나섰다. 도시 미관을 혼자서 다 망치는 새까맣고 거대한 정사각뿔 형태의 건물이 보였다. 도원향 총타, 흑단궁이었다. 흑단궁에 들어선 손달은 곧장 승강기로 향했다. 일반 승강기는 아니고 제한 구역용이었다. 내부에는 승강기 안내원이 서 있었다. 승강기 안내원이 물었다. “몇 층으로 가시겠습니까?” “지하 432층이요.” “권한 외의 구역에 출입을 시도하실 경우, 경고 없이 사살될 수 있습니다.” 손달이 동의하자 승강기가 작동했다. 계기판에 표시된 층수가 빠른 속도로 변했다. 하지만 승강기 내부는 미약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승강기 안내원이 말했다. “지하 432층, 도착했습니다.” 손달은 살짝 목례한 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일자 복도를 따라 쭉 걸었다. 한 발 한 발 나아갈 때마다 주시하는 눈길 또한 점차 늘어났다. 복도 끝에 도착하자 문이 하나 보였다. 문 근처에는 사무원 둘이 앉아 있었다. 둘 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사무원 한 명이 말했다. “검사기 앞에 서 주세요.” 손달은 순순히 검사기 앞으로 향했다. 지정된 위치에 서자, 검사기가 빛을 뿜었다. 정밀 검사 과정이 이어졌다. 손달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산 오류, 기기 고장, 혹은 그 밖에 어떤 이유든 간에 검사 결과가 반대로 나온다면 어떨까. 아마 해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터였다. 그런 방식으로 죽으면 좀 웃길 것 같았다. 검사 결과가 나오고, 손달은 문 너머로 향했다. ***** 흑단궁 지하 432층, 균열 대책 본부. 본부장이 질문했다. “류서란은 어때?” 손달이 대답했다. “평범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공부하고, 수행하고. 모범생입니다.” “그 바쁜 와중에 수행도 해? 향상심이 대단한 모양이지? 인성은 좀 어떤 것 같아?” “타고난 자질을 고려하면 준법정신이 굉장히 뛰어난 편에 속합니다. 기본적으로 선량하기도 하고요.”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아주 좋아. 결격 사항은 달리 없지?” “그 부분이 좀 불분명합니다.” “왜, 뭐 때문에 그러는데?” 손달이 대답했다. “비밀이 좀 많은 것 같습니다.” “아니, 세상에 비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비밀 같은 건 나도 많아. 지금 우리가 하는 이 짓거리도 다 비밀이잖아.” “너무 수상해서 그런데, 혹시 기밀 문건 좀 열람할 수 있을까요?” 본부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나... 진짜 보게?” “비상시국이니 어쩔 수 없죠. 그러라고 있는 균열 대책 본부고, 그러라고 있는 초법적 권한 아닙니까.” “하, 나 때는 이런 거 말도 안되는 일이었는데... 알겠어, 류서란 관련 기록이면 충분하지?” 본부장은 구역관리원 쪽으로 협조 공문을 보냈다. 얼마 뒤, 본부장의 탁상용 단말기로 류서란 관련 기밀 문건들이 전송됐다. 승천자 등록 문서, 무주지 점유 신고서, 선골 검사 결과지 등등이었다. 본부장은 자료를 차례차례 확인했다. “어디 보자, 무주지 점유 신고서는 별 거 없고. 승천자 등록 문서는... 뭐야?” “왜 그러십니까?” “류서란, 비승 연령 650세, 인간?” 손달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류서란은 반인반룡입니다.” “아니, 분명히 인간이라고 적혀 있는데?” “착오 아닙니까?” 본부장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니지, 어쩌면 비승 당시에는 진짜 인간이었을 수도 있어.” “선계에 와서 반인반룡이 됐다고요? 아예 용족이 되는 거면 몰라도, 후천적으로 반인반룡이 되는 게 가능합니까?” “선천적 반인반룡인데 용족의 피가 비교적 옅었던 거 아닐까? 그래서 용족의 특성이 발현되지 않았던 거지. 심지어 하계는 영기가 굉장히 희박하잖아.” 손달이 말했다. “천기연구소에 문의해 보죠.” “알았어.” 본부장은 협조 공문을 하나 더 보냈다. 잠시 후, 논문 한 편이 전송됐다. ‘영기 밀도와 영물의 생육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두꺼운 논문이었다. 본부장은 논문을 대충 훑어보고 말했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닌가 봐.” “그야말로 생명의 신비로군요...” “아까 수상하다는 비밀, 이거 아니야?” 손달이 대답했다. “놀라운 비밀이기는 한데... 굳이 편집증적으로 굴면서까지 숨길 정도인가 싶네요. 고민 좀 해 보겠습니다.” “그래, 고민 실컷 하게. 나는 기밀 문건이나 마저 살펴 보고 있을 테니까.” “음...” 손달은 고민에 잠겼다. 류서란, 금죽문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뭘까. 손달은 6년 간의 기억을 차분히 되짚어 봤다. 해답에 거의 도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본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범골이라고오오!!!” 쩌렁쩌렁한 고함이 손달의 고막을 뒤흔들었다. 반쯤 손 안에 들어왔던 해답도 도망가 버렸다. 손달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나가는 말씨도 곱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본부장은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저 단말기 화면을 손달 쪽으로 돌려줬다. 류서란의 선골 검사 결과지를 열람 중이었다. 손달이 투덜거렸다. “뭐 얼마나 대단한 선골이길래... 범골!?” 류서란은 선골 보유자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더없이 명쾌해졌다. 손달은 지금에서야 금죽문이 보여준 편집증적이기 그지없는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700세 미만 태성기 수사가 사실은 범골? 이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숨겨야 했다. 들키면 감당이 안되는 비밀이었다. 본부장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이거 맞아? 비밀이 이게 맞는 거 같아?” “예, 이거라면 납득이 갑니다.” “그러면 이제 류서란은 문제 없는 거지?” 손달이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문제 없습니다.” “좋았어, 영입 후보에 올려 둬야지.” “아, 그 전에 처리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본부장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 또...” “천라지망에서 류서란 나이와 관련된 얘기가 자꾸 나오더라고요. 법관 고시 합격했을 때부터 그러기는 했는데, 요즘은 들어서 유독 심해진 것 같습니다. 극광 제도 주변에 기자들도 좀 돌아다니고요.” “아, 무슨 소린지 알겠어. 나이 조사하다가 범골이라는 게 드러날까 봐 걱정하는 거지? 내가 해결해 줄게.” 본부장은 최고재판소에 연락했다. “예, 저예요. 류서란이라고 아시죠? 왜, 그 법관 고시 수석. 예, 예. 언론 쪽에 얘기 좀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무슨 보도 관제예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선백파흑진군께서 어린 법관 나이 가지고 어쩌니 저쩌니 하는 거 좀 언짢아하시는 것 같더라, 그런 얘기만 좀 전해주세요. 괜찮죠? 예, 감사합니다. 예, 예. 아, 그럼요. 언제 밥 한 번 먹어야죠.” 다음은 천기연구소에 연락했다. “혹시 뭐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아, 천라지망 관련된 거예요. 그 검색 노출 빈도인가? 그거 좀 조절해 주셨으면 해서요. 류 법관이라고 아시죠? 저희 쪽에서 신경 쓰고 있는데 천라지망에 나이 얘기가 자꾸 나와서 골치 아프네요. 아, 삭제하실 필요까지는 없고, 그냥 자연스럽게 치워만 주세요. 눈에 잘 안 띄게.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럼요, 알죠. 예, 예.” 통화가 종료됐다. ***** 금죽문 통신부. 직원 한 명이 외쳤다. “부장님! 주요 언론이 올렸던 폭로 기사가 갑자기 삭제됐습니다!” “방금 정정 보도 올라왔습니다!” “천라지망 교류회 전역에서 류 수사님 나이에 관한 관심도가 대폭 감소했습니다.” “부장님!” “우린 살았습니다!” “금 부장님!” 금영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며칠 전, 돈에 눈이 먼 머저리가 류서란의 나이에 관한 정보를 언론사에 팔았다. 덕분에 금영영은 이아금 생일 잔치에도 참석 못하고 부장실에 처박혀 있었다. 제보를 확보한 언론사는 집요하게 금죽문을 찔러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정오, 기어이 폭로 기사를 올렸다. 진짜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명히 벼랑 끝까지 내몰린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폭로 기사가 내려가더니 정정 보도가 올라왔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통신부 직원들이 말했다. “역시 금 부장님이십니다!” “이렇게 될 거라고 예측하셨던 거군요!” “어쩐지 침착하시더라!” “저희가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이런 예측 같은 거 한 적 없었다. 침착한 게 아니라 그냥 포기한 거였다. 믿음은 금영영한테도 없었다. 그럼에도, 금영영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계산대로다, 전부.” 잘 생각해 보니까 운도 실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