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아직 연기기였던 서란은 수도문파 간 친목대회에 출전한 적이 있었다. 서란이 호혜문, 금영영과 친해진 계기였다. 그때 참가했던 문파는 총 네 곳이었다. 대략적으로 성세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떠오르는 신성, 금작파. 전통과 역사의 강자, 오죽문. 두 수도문파가 선두 경쟁을 한다. 한참 뒤에서 맹렬히 추격하는 건 약목파다. 양나라를 기준으로 북동쪽에 위치한 주나라를 다스리는 수도문파였다. 그리고 수선계 국제 시장 개최국이기도 하다. 천 년 전, 약목파의 원영기 수사가 큰 그림을 그리며 영초와 영목 등을 잔뜩 재배한 적이 있었다. 백년대계 따위에 호들갑을 떠는 범인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찬 모습이었다. 원영기 수사는 비록 수명이 다해서 죽었지만, 씨앗은 수백 년만에 발아했다. 쓸 만한 영초나 영목은 기르는데만 족히 수백 년 이상 걸린다. 천운이 안 따라주면 문파 망하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성공하면 보상도 크다. 수행을 포기한 목속성 원영기 수사의 헌신. 후대를 위해서 먹고 싶은 걸 꾹 참고 약재를 키운 수도문파 구성원의 인내. 그리고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까지 외침을 막아줄 든든한 동맹. 금작파와 오죽문의 등 뒤에서 수백 년을 버틴 약목파는 서대륙 전체의 단약 재료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했다. 국제 시장에서 발생하는 수수료는 천문학적이었다. 영혼의 단짝친구, 오죽문과 금작파에게도 다달이 친구비를 입금했으니 우애는 날로 돈독해져만 갔다. 서란과 담청이 신분패 하나 달랑 들고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이유다. 검문 같은 건 잘 모르는 타인에게나 하는 것이다. 오죽문과 약목파는 남이 아니었다. 물 흐르듯 시장에 진입한 서란과 담청은 곧장 인력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토속성, 수속성 한 명씩 타세요!” “저요!” 서란이 번쩍 손을 들었다. 수도자 인력 시장이 침묵에 잠겼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가 여기에 애들 데려왔나?’ 처음에는 누가 딸을 데리고 온 줄 알았다. 그러다가 혹시나 싶어서 영안술을 사용했다. 놀랍게도 뿔 달린 소녀와 그냥 소녀의 단전에는 커다란 내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번에도 전부 똑같은 생각을 했다. ‘결단기 수사가 여기에 왜 있어?’ 인력 시장에서 일거리를 찾는 수도자들은 전부 축기기 수사였다. 연기기는 법술을 사용할 수 없고, 결단기부터는 보통 지명 의뢰만 받는다. 돈벌이가 난생처음인 담청과 서란만 모르는 상식이었다. 수도자를 모집하던 여자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 이쪽 선배님은 어떤 속성이신지요.” 영안으로 법력을 관찰하면 속성은 금방 알 수 있다. 서란은 정토법력, 즉 노란색이다. 하지만 담청은 오색찬란한 법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란이 즉시 대답했다. “이 분은 수속성 공법을 익히셨습니다!” 사실 용은 속성 구분이 모호하다. 용이 지닌 혼원법력은 모든 속성의 법력을 대체할 수 있다. 그래서 영근만 있다면 속성 제한이 없다. 담청은 잉어 영수에서 용이 된 경우다. 수생생물, 잉어 영수였기에 수영근. 그리고 용으로 다시 태어났기에 풍영근. 사람으로 치면 담청은 수풍 이영근자였다. 만약 여의주에 벼락을 담는데 성공하면 뇌영근까지 추가된다. 전부 모여서 비와 바람, 구름과 번개다. 하늘의 날씨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용이란 이렇게 완성되는 것이다. 수풍뇌 삼영근을 달성한 용은 무적의 존재가 된다. 화신기 수사조차 가볍게 죽일 수 있으니 천하에는 적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금제일 대도에게는 안된다. 서란은 여의주를 훔쳐서 용의 승천을 막고, 홀로 거대 문파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다음 피해자는 또 누가 될지 모른다. 어쩌면 인력 시장에 앉아 있던 평범한 축기기 수사들도 피해자라고 볼 여지가 있었다. 18급 어린이 바둑 대회 참가자로 갑자기 성인 바둑 기사(9단)가 난입한 격이었다. 경쟁이 불가능한 생태계 교란종의 출현이었다. 모집원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금방 결정을 내렸다. 너무 급해서 뭘 따져볼 시간도 없었다. 모집원이 결연하게 외쳤다. “좋습니다! 두 분 다 가시죠!” 목적지는 주나라 북부, 임무는 운하 보수 공사. ***** 주나라는 무역이 발달한 나라다. 동쪽으로는 바다가, 서쪽으로는 평야가 있다. 그래서 강과 바다를 연결하는 운하가 많았다. 사건의 발단은 바다 괴수였다. 뭘 잘못 먹고 미쳐버린 건지 육지로 돌진한 거대 해산물이 중요한 운하를 망가뜨렸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사건은 은폐했지만 광범위하게 파괴된 운하를 빠르게 복구해야만 했다. 운하 복구 담당자 중 한 명인 모집원이 급하게 토속성, 수속성 수도자를 찾았던 이유였다. “이게 복구해야 하는 운하입니다. 어떻게, 두 달 안으로 가능할까?” 데드라인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행운아였다. 인력 시장에서 서란과 담청을 만났으니까. 서란이 담담히 말했다.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모집원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질 자신이!” “그런!” 서란과 담청은 운하 보수 공사에 돌입했다. 우선 운하에 가득한 물부터 제거했다. “얍!” 담청이 기합과 함께 손짓하자 기적이 일어났다. 운하에 흐르던 물이 떠오르고 바닥이 드러났다. 경악스러운 사실은 액체가 아치형으로 떠오른 채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상류에서 내려온 유수가 무지개처럼 공중을 날아서 하류로 흘러갔다. 지상최강의 영물, 용에게만 허락된 신기였다. 모집원이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흐르는 강 전체를 하늘로 들어올리시다니!” 다음은 서란의 차례였다. 서란은 ‘거산요지선공’이라는 결단기 공법을 익혔다. 뜻을 풀이하면 산을 들고 땅을 뒤흔드는 공법이다. 물론 다소 과장이 섞인 작명이었다. 하지만 별세계에서 춤추듯 내려온 천재, 류서란이 펼치는 거산요지선공은 달랐다. 서란이 검지손가락을 뻗어 운하 바닥을 가리켰다. 그리고 손목을 꺾자 검지가 하늘을 향했다. 벗겨진 땅거죽도 공중에 떠올랐다. 한 줌 법력도 막대한 힘으로 증폭하는 공법이다. 여의주보다 큰 금단은 폭풍처럼 주변 영기를 빨아들여서 법력으로 변환했다. 서란은 지표면을 부침개처럼 뒤집어 버렸다. 모집원은 없던 신앙심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녀는 신인가...” 두 달도 빠듯할 것 같았던 대공사가 끝났다. 다음 날, 보수 작업을 마친 서란이 물었다. “그런데 영석은 얼마나 줍니까?” 모집원이 경건하게 대답했다. “두 달 치 공사비를 전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혹시 일정이 괜찮으시다면 나머지 운하도 고쳐주시겠습니까? 제가 다른 담당자들에게 말해서 공사비를 전부 드리겠습니다.” 토목 공사의 신, 류서란 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시죠, 저를 부르는 곳으로.” 이후 한 달 동안 서란은 주나라 전역을 돌았다. 토목 공사의 신을 영접한 운하 보수 담당자들은 기꺼이 모든 보수 예산을 바쳤다. 공사 마감을 지켜줬으니 서란은 신이 맞았다. 공사 담당자들도 만족하고 서란도 만족했다. 추가 수당을 잔뜩 받아서 영석 부자가 됐다. 거산요지선공 숙련도 역시 쭉쭉 성장했다. 그리고 소문은 빠르게 전파됐다. ‘주나라에 토목 공사의 신이 산다고 들었다.’ 초대형 토목 공사를 계획 중이던 수도문파들이 주나라 국제 시장으로 날아왔다. 토목 공사의 신은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인가. 최대한 빠른 순서를 위해서 경매까지 열렸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경매장의 무대 뒤편, 서란과 담청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담청 님, 정말로 저처럼 모두 기부하시려고요?” “그래, 용에게 영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담청 님...”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돈독해진 우애 속에서 서란과 담청이 포옹했다. 그리고 수선계 국제 시장 창설 이래로 가장 치열했던 오늘의 경매도 끝났다. 경매로 벌어들인 수익금 중 수수료를 제외한 금액은 모두 불우한 오죽문에게 기부됐다. 매각된 대기 번호는 총 삼백 개 이상. 이틀에 하나씩 일정을 끝마쳐도 대충 이 년이다. 서란은 재입대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담청과 함께라면 버틸 수 있다. 와라, 낯설고도 드넓은 세상이여.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서란과 담청은 무대로 올랐다. 마치 노예 경매 같이 느껴지지만 아니다. 참가자들은 번호패를 간절히 쥐고 있었다. 주인은 저들이 아니라 서란이었다. 돈까지 바친 이들이 간절히 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광경을 경매라고 칭할 수는 없다.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는 바로 숭배였다. 저들은 제물을 바치고 기도하는 중이었다. 이 순간부터 서란이 저들의 신이었다. 새로 태어난 여신이 나지막이 말했다. “앞장 서시지요, 제가 필요한 곳으로.” 신에게 응답받은 신도들이 감격했다. 서란도 꽤나 흥이 올랐다. 토속성 수도자로 살면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던 토속성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만은 특별 대우를 받는다. 화속성, 수속성 부럽지 않은 인기쟁이였다. 마치 세계를 열광시키는 슈퍼 스타. 그렇다면 이건 서대륙 월드 투어나 다름없다. 다시 위대한 쇼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토목 공사 듀오는 대륙 순회를 시작했다. 대장정은 예상했던 것보다 금방 끝났다. 빈번한 지표면 뒤집기로 거산요지선공을 대성해 버린 탓이었다. 일 년 뒤, 둘은 마지막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오죽문과 인접한 해선문의 영역, 건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