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섭에 성공해서 싸움을 피하면 최선이다. 하지만 마냥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법이었다. 등 진군은 양측의 전력을 비교, 분석했다. “태성기란, 별을 잉태하는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중단전 혹은 하단전에 위치한 영성의 별에서 무한한 법력을 뽑아 쓸 수 있지요. 하지만 독안룡은 승천 직전의 용, 아직은 불완전한 상태일 겁니다.” 서란이 물었다. “불완전한 상태요? 태성기가 아니라는 건가요?” “엄밀히 따지면 여의주에 별을 담았을 테니 태성기는 맞습니다. 다만 하계라는 환경 탓에 온전히 개화하지 못했으니 준태성기 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그러면 담청 님도 아직까지는 준태성기겠네요?” 등 진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제가 하계에는 거대종이 드물다고 말씀 드렸었죠? 여의주를 완성한 용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계가 품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존재인 탓에 선계로 승천한 이후에야 비로소 만개할 수 있죠. 여의주를 완성한 용이 맹목적인 승천 갈망에 시달리는 이유가 불완전한 상태를 본능적으로 기피하기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습니다.” 서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담청 님,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구나.” “잘 모르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서란의 시선이 다시 칠판 쪽으로 향했다. 등 진군은 설명을 계속했다. “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간단합니다. 류 수사님과 용녀님께서 힘을 합치면 어렵지 않게 독안룡을 쓰러뜨리실 수 있다는 거죠. 2천 년 전에 태성기가 된 독안룡이나 20년 전에 막 태성기가 된 용녀님이나 전력의 양적인 측면은 거의 비슷비슷할 겁니다.” 서란이 물었다. “질적인 측면은요?” “독안룡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단한 전투 경험은 없을 겁니다. 기껏해야 요괴 무리 정도나 죽여 봤겠죠. 수백 년 전에 죽인 화신기 수사도 비승 도중에 습격했으니 일방적인 싸움이었을 테고요. 애초에 하계에는 용의 맞수가 없습니다.” “같은 용을 제외하면 말이죠?” 등 진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만약 전대 용신을 살해한 게 독안룡의 소행이 맞다면 조금 더 주의할 필요는 있겠죠. 하지만 단지 그뿐입니다. 2 대 1로 교전하면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여러분 곁에는 제가 있죠. 지금부터 선계의 공법과 법술을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서란과 담청은 환한 미소와 함께 만세를 했다.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제가 아는 공법은 인간 수도자용뿐입니다. 용족 수도자의 공법은 굉장히 드물거든요. 류 수사님께 공법을 가르쳐 드리는 동안 용녀님께서는 법술 자습을 하고 계시지요. 성실하게 암기하셨는지 이따 여쭤 볼 겁니다.” 등 진군은 직접 쓴 법술 교재를 담청에게 줬다. 책이 하도 두꺼워서 거의 정육면체처럼 보였다. 담청의 두 팔은 힘없이 가라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란과 등 진군, 둘만의 공법 과외가 시작됐다. ***** 서란은 총 다섯 개의 원영기 공법을 배웠다. 법기 특화형 토속성 공법, 적토전해경. 법기 특화형 금속성 공법, 비절철비쇠금. 내정 특화형 목속성 공법, 축성개화공. 방어 특화형 화속성 공법, 포화호신결. 그리고 마지막이 수속성 공법, 낙수천석이었다. 공법의 이름을 뜻풀이하면 다음과 같았다.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 뜻풀이에서 연계되는 직관적인 심상이 있다. 바로, 한 방울씩 떨어진 물이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바위에 구멍을 뚫는 광경이다. 왠지 대기만성형 공법이 아닐까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오답이었다. 낙수천석은 대기만성형 공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극단적인 공격 특화형 공법이었다. 낙수천석을 익힌 수도자의 법력에는 결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성질이 깃든다. 오죽문의 원영기 수사와 싸울 때, 결계의 방어력만 믿고 회피를 소홀히 하면 안되는 이유였다. 전형적인, 모르면 죽는 비기였다. 물론, 낙수천석에도 단점은 있었다. 본인의 결계 또한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 단점도 포화호신결을 배우면 장점으로 변했다. 포화호신결은 극단적인 방어 특화형 공법이었다. 심지어 부정형 법화 결계를 생성하는 게 공법의 주된 효능이었다. 법력의 결계를 불안정하게 하는 성질은 부정형 법화 결계를 오히려 강화시키니, 두 공법의 장점만 남는 꼴이었다. 그 덕분에 오죽문의 역대 원영기 수사들은 낙수천석과 포화호신결을 모두 익힌 시점부터 대요괴 절단기로 변모했다. 참고로 난세에는 문파 절단기라고 불렸었다. 오죽문이 서대륙 오대문파인 이유이기도 했다. 서란이 갑자기 여태 배운 원영기 공법들을 등 진군에게 설명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부터 배울 운무기(화신기) 공법과의 호환성 문제 때문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수도공법은 아무거나 막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동안 궁리하던 등 진군이 입을 열었다. “다행히도 별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서로 호환되는 공법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공법이 있었다니... 진짜 꿈에도 몰랐네요.” “대부분의 경우에는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원영기 공법과 화신기 공법끼리의 호환성만 주의하면 되죠. 오행법력에서 혼원법력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니까요. 그 외에는 음... 서로 상반되는 효능의 공법을 함께 익히지 않는 정도겠네요.” 서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아무튼 제가 익힌 원영기 공법들의 효능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예, 운이 좋으셨습니다. 두 개는 오죽문, 그리고 두 개는 금작파의 공법이었죠? 덕분에 공법끼리의 동질성이 꽤 높은 편입니다. 이것저것 주워 익힌 경우에는 화신기 공법을 배우면서 대부분의 공법이 효능을 잃는 경우도 드물지 않거든요. 물론 오늘 가르쳐 드릴 운무기 공법의 엄청난 조화성 덕분이기도 하죠.” “조화성이 높은 공법이요? 기본공인가요?” 등 진군은 보기 드물게 흥분했다. “기본공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고로 공법 창안이란 천재 중의 천재들만의 영역! 그런 공법 창안자들마저 입을 모아 칭송하는 게 조화성 높은 공법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상류가 경유하고 모든 하류로 이어지는 바로 그 지점! 그런 천고의 공법을 고작 기본공에 비유하시다니!” “아니, 그게...” “대답해 보세요! 특별한 선골이나 혈통, 환경을 타고난 소수만이 익힐 수 있는 공법과 만인이 익힐 수 있는 공법! 전자와 후자 중 어느 쪽이 더 위대한 공법입니까! 예?!” 서란은 떠듬떠듬 답변했다. “후, 후자가 더 대단한 것 같아요.” 악귀처럼 일그러진 등 진군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역시, 류 수사님께서는 뭘 좀 아시는군요.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서 죄송했습니다. 그만 흥분해 버리고 말았군요. 아무튼 조화성 높은 공법의 위대함은 기억해 두십시오. 편향된 견문이나 주관의 한계, 개인성에 매몰되지 않고 삼라만상에 관한 통찰이 있어야만 조화성 높은 공법을 창안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 공법, 혹시 등 진군께서 만드신 건가요?” “아마도 아닐 겁니다. 명백하게 제 역량 밖의 물건이거든요. 아, 참고로 가장 만들기 쉬운 건 혈족 전용 공법입니다. 창안자와 유사한 영육을 지닌 후손들이 공법을 익히기 때문입니다. 고려해야 할 요소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수도가문들은 보통 혈족 전용 공법을 몇 개씩이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잠시 옆길로 샜군요. 수업을 계속하죠.” 등 진군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조화적인 공법의 이름은 ‘무명공법’이었다. 서란은 이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혹시 공법 이름을 잊어 버리셨나요?” “아닙니다, 진짜로 이게 공법 이름입니다.” “공법 이름이 무명공법이라고요?” 무명공법, 이름이 없는 공법. 곰곰이 생각해 보니 꽤 괜찮은 작명 같았다. 서란은 옛날부터 이런 걸 좋아했다. 등 진군이 찬물을 끼얹었다. “이름은 좀 웃기지만 완성도는 훌륭할 겁니다. 대신에 학습 과정이 다소 난해하긴 합니다.” 웃기는 이름이라니... 무명공법, 나름 운치 있는 이름 아닌가? 서란은 약간 시무룩해졌다. 무명공법을 익히는 데에는 반나절 정도 걸렸다. ***** 서란과 담청은 그 밖에도 여러 법술을 배웠다. 대부분은 합격술 종류였다. 영락하기 전의 등 진군은 요수술사였던 모양인지 굉장히 편중된 법술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란은 독안룡과의 전투를 준비하며 인형과 죽순 탄도탄, 인공위성 금죽화 등을 개량했다. 식산대붕 포함, 셋이서 합격술 훈련에도 매진했다. 단기전으로 독안룡을 쓰러뜨리기 위해 등 진군이나 싱크 탱크와 상의하는 일도 잦았다. 반 년 뒤, 가을이 됐다. 문파 식구들의 응원을 뒤로 한 채 서란과 담청, 식산대붕 삼인조는 서대륙을 떠났다. 셋은 남대륙 원정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세상의 중심을 향해 날아갔다. 마주치는 요괴 군단은 모조리 바스러뜨렸다. 겨울 무렵, 일행은 세상의 중심에 도착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거대한 공혈이 존재했다. 수선계가 세상의 중심이라 일컫는 지형이었다. 해수로 둘러쌓인 깊은 구멍에 빠지면 저승까지 다다른다고 해서 명계의 입구라고도 불린다. 상공에는 먹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천겁을 머금은 구름 길, 바로 승천문이었다. 마침 시기가 잘 맞았는지 통로가 열려 있었다. 하지만 일행이 주목한 대상은 따로 있었다. 그 존재는 명계로 이어진 세상의 중심과 선계로 통하는 승천문 사이를 유영하는 중이었다. 독안룡이었다.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길고 거대한 육신. 풍림과 뇌운, 날씨의 주재자. 영물 중의 영물. 독안룡은 승천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신을 바람에 실은 채 그저 그렇게 있었다. 빗줄기에 수염이 젖었고 번개가 비늘을 빛냈다. 고고한 구름마저 용 앞에 자신을 낮췄다. 독안룡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독안룡의 오른편 얼굴이 보였다. 짓뭉개진 눈가의 흉터 사이에는 눈알 대신 여의주가 박혀 있었다. 추가로 턱 아래에 하나, 그리고 오른손에 하나. 여의주, 여의주, 여의주. 세 개의 여의주. 그리고 세 개의 별. 수많은 생각이 서란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용마다 여의주는 하나씩. 남의 여의주를 빼앗으면 승천할 수 없는 용. 전대 용신이 실종된 이유. 세상의 중심을 가로막은 독안룡. 승천 직전의 용이 선계로 떠나지 않은 이유. 아니, 떠날 수 없었던 이유. 세 개의 여의주. 기다렸다니, 누구를? 화신기 수사인 자신을? 용족인 담청을? 아니면 네 번째 여의주를? 어째서 이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지?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담청의 외침이 서란을 깨웠다. 서란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나팔을 불었다. 주인의 명령이 인형 군단을 가동시켰다. 직후, 독안룡이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