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탕가의 기사 아르고.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반가운 얼굴을 마주한 아르고는 화색 했다. 이반이란 가명을 가진 청년. 기사가 된 이후 다시 만나자고 약조했지만, 우연한 만남은 어찌할 수 없는 법이다.
 
“반갑군. 이름 모를 청년.”
 
“반갑습니다. 아르고 님.”
 
나진의 가명을 알고 있었지만, 나진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이 아니기에 아르고는 이반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넉살 좋게 웃으며 이름 모를 청년이라 부를 뿐.
 
“그간 소문은 들었다. 제법 화려하게 일을 벌이고 다녔더군? 듣기론 그리핀 경과도 한가락 했다던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어쩌다 보니, 라. 자네답다면 자네답군.”
 
아르고가 호쾌히 웃었다.
 
“제국의 수도에는 무슨 일인가?”
 
“제 친구가 이곳에 올 일이 있어, 호위 겸 관광으로 따라왔습니다.”
 
“관광이라. 그런데 이런 대장간에는 왜? 카멜롯에는 즐길 거리가 훨씬 많을 텐데.”
 
“그것이···.”
 
나진이 쓰게 웃었다.
 
“쇠를 두들기는 소리에 이끌려 걷다 보니 이 대장간 앞이었습니다.”
 
“하긴, 이 대장간의 주인장이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제법 경쾌하긴 하지.”
 
아르고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대장간 앞에 앉아있던 소녀에게 손짓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가 아르고의 옆에 바로 섰다.
 
“이쪽은 내 종자, 플랑슈라네.”
 
플랑슈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며 아르고가 말했다.
 
“난 이 아이의 검을 맞춰주기 위해 대장간에 들렀지. 아탕가의 문양을 새길 수 있게 되었으니 검 한 자루 정도는 선물해 줘야겠더군.”
 
나진이 짧게 감탄하며 플랑슈를 바라봤다.
 
소녀의 견갑에 새겨진 교차하는 두 자루의 검과 방패의 문양. 멋들어진 문양이었고, 이반이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문양이기도 했다.
 
빠안.
 
그러는 와중에도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는데, 고개를 살짝 돌려보면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플랑슈의 눈동자가 있었다. 나진이 의아함을 느끼는 가운데 아르고가 쓰게 웃었다.
 
“하하. 내 종자가 자네에게 관심이 좀 많아. 자네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마다 눈을 부릅뜨곤 하더군.”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그날, 악마기사를 추격하는 것이 이 아이의 첫 임무였거든. 그 임무에서 자네를 만났으니 강한 인상이 박힌 거겠지.”
 
여전히 플랑슈는 나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고가 눈을 가늘게 뜨곤, 플랑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실례다. 플랑슈.”
 
“···죄송합니다.”
 
“내가 아니라 저자에게.”
 
“죄송합니다.”
 
플랑슈가 나진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가운데 아르고가 제 턱을 매만졌다. 나진에게 강한 관심을 보이는 제 종자. 그리고 우연한 만남. 잠시 고민하던 아르고가 입을 열었다.
 
“자네만 괜찮다면.”
 
“혹, 이 아이의 검을 봐줄 수 있겠나?”
 
2.
 
다마노스 대장간.
 
이 대장간은 아탕가의 기사단과 전속계약을 맺은 대장간이었고, 당연하게도 대장간의 뒤편에는 검을 시험해 보기에 적당한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아르고의 얼굴을 확인한 대장장이는 기꺼이 뒤편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줬다.
 
그렇게 도착한 대련장.
 
아르고의 종자, 플랑슈는 몸을 풀며 맞은편을 바라봤다. 그곳엔 제 어깨를 풀고 있는 사내가 있다. 악마 기사 베른하이겐 토벌전에서 처음 마주했고, 그날 이후로 플랑슈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남자였다.
 
얼핏 보기엔 제 또래로 보이는 남자.
 
그러나, 저자가 홀로 베른하이겐을 토벌했다는 사실을 플랑슈는 알고 있다. 베른하이겐은 추정 소드 시커급의 강자인데, 도대체 어떻게? 그 사실을 플랑슈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재다.」
 
「검성 카론 경의 뒤를 이을, 어쩌면 그분의 기록을 갈아치울 수도 있을 불세출의 천재다.」
 
「고작 열일곱의 나이에 소드 엑스퍼트에 근접해 있다. 머지않은 시일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를 것.」
 
여태껏 그녀가 들어왔던 이야기들.
 
세상은 그녀를 천재라 불렀으며 객관적인 기준으로도 플랑슈는 천재가 맞았다.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에선 따라올 자가 없었으며, 검(劍)을 다루는 데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플랑슈는 자신이 천재라는 자각이 있다. 또한, 또래의 그 누구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나진은 이질적인 존재였다.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 그러나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는 존재. 그런 나진이 플랑슈는 신경 쓰였다.
 
“아탕가의 기사, 아르고의 종자 플랑슈.”
 
플랑슈가 나진에게 검을 겨누었다.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련의 조건은 간단했다.
 
마나도 검기도 다루지 않은 채 검만을 맞부딪치는 순수한 검투(劍鬪). 그리고 이런 규칙의 안에서라면 플랑슈는 자신이 있었다. 지지 않을 자신이.
 
순수한 검술. 기교의 영역.
 
그건 그녀가 자신 있는 분야였으니까. 플랑슈는 걸음마를 떼고서부터 검을 휘둘렀고, 그러기를 벌써 12년이다.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그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검을 휘둘러왔다.
 
‘당신을 무시하진 않지만.’
 
순수한 검술의 영역에선 밀리지 않으리라 플랑슈는 확신했다. 숱한 강자의 검을 식견 했고, 다양한 검술을 익혔으며, 이러한 규칙안에선 소드 시커를 상대로도 무승부를 기록한 적이 있었으니까.
 
탁.
 
그리하여 자신에 찬, 최소한 패배하지 않으리라 확신한 플랑슈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강하게 땅을 박차며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지는 검.
 
그리고 나진은.
 
“······.”
 
무표정하게 플랑슈의 검이 그리는 궤적을 바라보다가, 가벼이 검을 휘둘렀다. 탁, 그리고 챙. 너무나도 쉽게 제 검이 튕겨져 나갔음에 플랑슈의 눈살이 찌푸려지긴 했으나 그녀는 차분히 검격을 이어 나갔다.
 
매끄러운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지는 검.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탁, 그리고 챙······.
 
비슷한 과정이 몇 번 더 반복됐다. 그동안 나진은 검을 제대로 휘두르긴커녕, 가볍게 옆으로 휘적이거나 손목의 스냅만을 이용해 휘두를 뿐이었다.
 
채엥!
 
몸의 탄성을 이용해 내지른 고속의 찌르기마저 쳐내졌을 때, 플랑슈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기이한 위화감. 플랑슈는 문득 나진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플랑슈가 검을 휘두르는 가운데 나진의 눈동자는 정확하게 그 검 끝을 따라가고 있었으니까.
 
검의 궤적을 읽고 검격의 위력이 최고점에 도달하기 전에 끼어들어 쳐내는 것. 눈앞의 남자가 그리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플랑슈는 제 등골이 쭈뼛 서는 감각을 느꼈다.
 
‘어디선가······.’
 
언젠가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었다.
 
그것이 언제였는지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략 2년쯤 전이었다. 불세출의 천재로 이름을 날리던 플랑슈에게, 대뜸 어느 검객이 찾아왔었다.
 
아탕가의 기사단에 단신으로 쳐들어온 검객.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기사들의 검을 맨손으로 붙잡아 휙휙 치워버리며, 자신에게 다가와 검투를 청했던 검객. 그 검객도 지금 눈앞의 남자처럼 검을 휘둘렀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
 
플랑슈의 속도에 맞춰 휘둘러지는 검.
 
그러나 너무나도 가볍게 튕겨 나가는 검격.
 
그때와 정확하게 같은 상황에 플랑슈는 까득, 하고 이를 갈았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까닭이다.
 
「이건 실망인데.」
 
그날, 그 검객은 차갑게 식은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었다.
 
「평범하군. 다를 것 없어.」
 
「남들보다 그저 빠를 뿐이군.」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리고 떠난 검객이, 검성 카론이었단 사실을 알게 된 건 나중의 이야기였다. 그날의 사건은 플랑슈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날과 같은 일이 반복된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검사에게.
 
플랑슈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플랑슈가 과감히 나진에게 파고들었다. 검의 속도가 올라갔으며, 검의 궤적에 변주를 주었다. 소드 엑스퍼트에 근접한 소녀가 보여줄 만한 기세는 결코 아니었다.
 
나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쿠웅.
 
처음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나진이 자세를 잡았다.
 
* * *
 
“무얼 그리 재밌게 보고 있나?”
 
“대련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마노스 대장간의 주인.
 
명장, 다마노스가 연초를 꼬나문 채 대장간의 담장에 걸터앉았다. 치익, 연초에 불을 붙인 채 그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곤 후우.
 
길게 연기를 뱉어내며 그가 시선을 늘어트렸다. 아르고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선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레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쪽은 플랑슈고··· 다른 한쪽은 누구지?”
 
“모험가 도시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청년인데, 악마기사 토벌전의 주역 되는 인물입니다.”
 
“아, 그 이반인가 하는 친구?”
 
대련을 지켜보던 다마노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허어.”
 
그가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플랑슈가 밀리고 있는 것 같은데? 마나도, 검기도 쓰지 않고서.”
 
“제가 보기에도 그렇군요.”
 
“검술로만 따지면 검의 교단 중위 사제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아이가 아닌가?”
 
“그렇지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대단히 노력하는 아이니까요.”
 
플랑슈가 천재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검성에 비견될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세간은 떠들곤 했으니까.
 
하지만······.
 
다마노스가 태우던 연초도 꺼트린 채, 플랑슈와 나진이 펼치는 대련에 집중했다.
 
“그럼 저 청년은 대체 뭐지?”
 
“저도 그게 참 의문입니다.”
 
플랑슈의 검이 제아무리 신묘한 궤적을 그려도 나진에겐 닿지 않는다. 검이 그리는 궤적을 끊어버리고, 가로막고, 완성되기 전에 쳐내버린다. 한두 번은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으나······.
 
카앙!
 
그런 일이 십수 번이고 반복되면 우연이라 보기엔 어렵다. 저런 일이 가능하려거든 플랑슈가 어떤 검술을 배우고 다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플랑슈는 수십 개에 가까운 검술을 익혔으니까.
 
제국 검술, 아탕가의 검, 검의 교단의 검, 제국 영웅 아이가르의 수호검······ 그 숱한 검술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건 불가능하다. 특히 아이가르의 수호검은 오직 플랑슈에게만 전수가 허락된 검이었으니.
 
‘그렇다면.’
 
검성의 흉내라도 내고 있는 것인가.
 
검성과 검을 맞부딪쳐 본 적이 없는 다마노스는 알 수 없지만, 아르고는 알았다. 저건 검성이 종종 하는 일이었으니까.
 
“씁.”
 
대련을 지켜보던 다마노스가 혀를 찼다.
 
“플랑슈가 충격을 많이 받겠군.”
 
“저 아이에겐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니?”
 
“자극, 패배로 인한 분함. 좋은 양분이지 않습니까. 앞을 향해 정진하는 데 필요한 일입니다.”
 
아르고는 흡족하게 웃었다.
 
저 청년을 강하게 의식하던 제 종자에게, 이는 좋은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만에 빠질 수 있는 환경에 놓인 플랑슈에게··· 이번 대련은 좋은 환기가 되어줄 것이다.
 
그때였다.
 
플랑슈가 자세를 잡았다. 그 자세를 본 순간 아르고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탕가의 검술을 펼치기 위한 자세. 승부욕에 사로잡혀 써선 안 될 기술마저 꺼내고 만 것이다.
 
‘이건 타일러야겠군.’
 
아르고가 승부를 중단시키고자 걸음을 내디디려던 순간이다. 그보다 먼저 나진이 움직였다. 플랑슈가 아탕가의 검술을 펼치는 것보다 먼저, 나진의 검이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플랑슈의 검을 후려쳤다.
 
올곧은, 그리고 우직한 궤적.
 
상대의 자세를 박살 내는 검.
 
담백하면서도 정교한 힘의 조절이 필요한 기술이었으나, 나진은 이를 훌륭히 수행해 냈다. 검이 맞부딪친 순간 플랑슈의 자세가 무너졌고······.
 
카아아앙!
 
“읏···!”
 
끝내 플랑슈의 팔이 휙, 위로 젖혀지며 롱소드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놓친 검이 댕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
 
입술을 꾹 깨문 플랑슈가 말했다.
 
“졌습니다.”
 
그녀가 제 패배를 인정하는 가운데, 아르고는 눈을 크게 뜬 채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아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걸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조금 전 나진이 보였던 검술.
 
상대의 자세를 박살 내고 찍어 누르는 검. 그 특징적인 동작과 보법은 아르고의 기억에도 있는 것이었다. 과거, 견습 기사였을 시절 자신을 몇번이고 패배시켰던 기술이었으니까.
 
나진이 버릇처럼 사용한 기술이나, 그 기술에는 분명히 이반의 편린이 묻어있었다.
 
그 편린을 마주한 아르고는 기분 좋게 웃었다. 옛 친우의 기술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곤 상상치 못했기에.
 
3.
 
“수고했네. 이건 내 선물이네.”
 
아르고가 나진에게 목함 하나를 건넸는데, 열어보니 가죽 건틀릿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잘 무두질 된 가죽으로 보아하니 상급품이었다.
 
“기사에게 검과 갑옷만큼이나 중요한 게 건틀릿이기도 하지. 왜인지 알고 있나?”
 
나진이 고개를 가로젓자, 아르고는 씨익 웃으며 제 장갑을 집어 던지는 시늉을 했다.
 
“결투에 앞서 장갑을 집어 던지는 게 전통이지 않나. 장갑을 패대기칠 때 나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분위기도 사는 법이지.”
 
나진이 웃음을 흘렸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 아이와 검을 맞대줘서 고맙네. 큰 도움이 됐어.”
 
플랑슈가 나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검을 맞대기 전과, 후의 플랑슈의 시선은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나진은 플랑슈를 향해 미소 지었다.
 
“대단합니다. 검이 매섭더군요. 다음에는 검기를 맞댈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나진의 말에 플랑슈가 눈을 크게 떴다.
 
조금은 놀랐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감, 사합니다···.”
 
그렇게 배웅을 받으며 나진이 걸음을 옮기려던 무렵이다. 나진이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아까부터 왠지 모르게 시선이 느껴진 까닭이다.
 
‘은근한 시선.’
 
왠지 모를 시선은 느껴지는데, 그 시선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펴봐도 보이는 건 없었으니까. 그렇게 한참 주변을 둘러보던 나진의 시선이 한군데에 정지했다.
 
저 멀리 세워진 탑.
 
황궁을 둘러싼 다섯개의 탑 중 하나.
 
그 탑에서 시선이 느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탑을 바라보다가, 나진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착각이겠지. 확실히 요즘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긴 했으니······.
 
* * *
 
노인이 제 턱수염을 매만졌다.
 
세월의 풍파에 새하얗게 센 머리칼.
 
자글자글 주름진 피부. 그러나, 세월의 흐름조차 노인의 허리와 등을 굽게 만들진 못했다. 노인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노인은 한동안 어느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검의 울림이 들려왔으므로.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자아내는 울림. 아무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그 울림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검명(劍鳴), 그것은 노인의 영혼을 떨리게 만드는 유일한 소리였으니까.
 
“베르제.”
 
“부르셨습니까.”
 
“회색 머리칼. 모험가 복장. 노을빛 눈동자. 오늘 이 도시를 방문한 청년에 대해 조사해보게.”
 
“예, 알겠습니다.”
 
제국의 첫 번째 기둥.
 
제국제일각(帝國第一角).
 
일곱의 별을 지닌 인류의 정점.
 
“흥미롭군.”
 
제국의 검 게르드는 미소 지었다. 조금 전 귓가를 울린 기분 좋은 검명(劍鳴)을 흥얼거리며 그는 제국에 찾아온 젊은 검객을 한동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