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비명을 닮은 검명(劍鳴). 끼이이이이이익,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지하수로의 가장 깊은 곳에 광풍이 휘몰아쳤다. 바람이 들지 않는 곳에 바람을 끌고 온 건 인간이 휘두른 검이었다. 유엘 라지안이 검을 휘둘렀다. 소드 마스터가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나진은 보았다.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는 케팔론의 공방이 도려내지는 모습을. 그 과정은 쪼개지거나, 베인다거나, 부서지는 것과는 달랐다. 달라서 이질적인 것이었다. 세상에서 도려내진다. 가위로 종이를 오려내듯이, 검을 휘둘러 풍경을 도려냈다. 그것은 베고 쪼갠다기보단 해체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눈으로 보고도 저 과정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나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유엘 라지안이 검을 한번 휘둘렀고 공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과정이 증발한 채 원인과 결과만이 남았다. -소문으론 들었지만 직접 보니 놀랍긴 하네. 나진의 귀에 멀린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번에 내가 신비(神秘)에 대해 말해줬던 거 기억하고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으며 상식의 바깥에 놓인 것. -그래. 걸작을 가리켜 신비가 담긴 무구라고 말하는데, 걸작이 왜 걸작이라 불리겠어? 말이 안 되는 일을 말이 되게 했으니까 걸작이라 불리는 거지. 멀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본래 신비는 생물에게 깃드는 거거든. -신비를 타고나는 생물들이 몇 종류 있어. 특정한 종족들이 그래. 용, 악마, 요정, 뭐 그런 것들. -하지만 아주 종종······. 잠깐의 뜸을 들인 멀린이 말을 이었다. -신비는 인간에게도 깃들어. -아주 희박한 확률로 신비를 가지고 태어나는 이들이 있어. 물론 그들 모두가 제가 가진 신비를 자각하는 건 아니야. 그중 극히 소수만이 제 신비를 깨달아. 희박한 확률에 희박한 확률이 다시 곱해진 거니 그 확률이야 말할 것도 없지. 그리 중얼거리며 멀린은 쓰게 웃었다. -놀랍게도 여기에 그 둘이 있네. 둘, 이라고 멀린은 말했다. -하나는 네게 속삭이고 있는 나고, 남은 하나는 저기 서 있는 미친년이지. 나진은 유엘을 바라봤다. 츠바이헨더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는 대검을 들고 있는 여인. 그녀가 대검을 놓자 파스슥, 소리를 내며 대검은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진을 바라봤다.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저 무표정 너머에 숨겨진 광기를 나진은 목격했었다. 끈적하게 늘어지는 핏빛의 시선을 마주한 나진은 괜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해체. 그것이 유엘 라지안이 품은 신비다. 멀린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경우에 해체라는 단어의 뜻이 어떻게 쓰였는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눈앞에 그 예시가 있었으므로. 해체되어 세상에서 도려내진 풍경. 텅 비어버린 공방의 풍경이 단어의 쓰임새를 말해주고 있었다. 나진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섬뜩한데요. 신비라는 거.’ -대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긴 하지. 그럼 멀린이 품은 신비는 뭡니까? 나진은 그리 질문했다. 그 질문에 멀린은 침묵했다. 잠깐의 침묵 후 멀린은 입을 열었다. -마침표. 멀린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진 않았다. 마치 이 주제를 더 꺼내고 싶진 않다는 듯이. 2. 케팔론의 공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본래 이단심문관 수십이 달려들어 정리해야 할 시설이었으나, 유엘 라지안은 검을 한 번 휘두름으로써 정리를 끝마쳤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썩 만족스럽지 않은 눈치였다. “후우······.” 유엘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숨을 길게 내쉬며 그녀가 제 품을 뒤적였다. 교단의 제복에서 꺼내든 것은 술병이었는데, 좀 전에 깔끔하게 비워버린 탓에 거꾸로 들고 털어도 술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아아···.” 유엘이 신음했다. 그녀가 휙 고개를 돌려 나진을 바라봤다. “이반.” “예.” “혹시 술 가지고 있습니까?” 몹시 뜬금없는 소리. 나진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유엘은 조금 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는 유엘의 모습에 보다 못한 나진이 품에서 물병을 꺼냈다. “물은 있는데 이거라도 드릴까요?”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받도록 하지요.” 물병을 받아 유엘이 목을 축였다. 물 한 통을 다 비우고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지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나진을 바라봤다. 뭐 더 없냐는 듯한 눈치. 나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진 포션이야 있었지만, 값비싼 포션을 유엘에게 주고 싶진 않았으니까. 상처도 없지 않은가. “목이 마르십니까?” “버릇입니다. 죽이고 싶은데, 죽이지 못할 상황이면 목이 마르더군요. 술이라도 마시면 좀 괜찮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엔 술이 없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리 말하며 유엘은 나진을 흘겨봤는데, 나진의 입장으로선 썩 달가운 시선이 아니었다. 널 죽이고 싶은데 널 죽이지 못할 상황이라 목이 마르다는 것 아닌가. 꽤나 섬뜩한 말이었다. 일단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지하수로를 타고 다시 위로 올라가며 나진은 유엘과 대화를 나눴다. “술 좋아하시나 보네요.” “예, 좋아합니다. 목이 타는 듯한 뜨거움을 즐깁니다. 약간의 독이 들어있다면 금상첨화겠군요.” 유엘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성혈 교단에서 주조하는 성혈주를 가장 좋아합니다. 세간에선 성수, 성주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고 들었습니다만··· 희석하지 않은 최상품의 성혈주는 독주(毒酒)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독하다는 뜻인가요?” “두 가지 뜻 모두입니다. 인간의 육체에 독으로서 작용하는 성분이 들어있는, 독한 술입니다.” 입맛을 다시며 그녀가 제 술병을 매만졌다. “마시면 목구멍이 타는 듯한 고통이 듭니다. 눈에 핏발이 서고 온 감각이 바짝 곤두서지요. 초월의 경지에 오른 제게 취기와 고통을 느끼게 해주는 술은 성혈주가 유일합니다.” 성혈주가 미친 술이라고 욕하는 이들이 있는데, 술맛을 모르는 머저리들입니다. 그리 중얼거리는 유엘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있었다. 술을 마시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감정이 없는 인형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군. 나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문득 나진이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유엘 역시 걸음을 멈췄다. “하실 말이 있으십니까?” “하나,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유엘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진은 말했다. “제게 검을 휘둘러보고, 저를 죽여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과 검을 맞부딪쳐보고 싶기도, 당신을 죽여보고 싶기도 하군요.” 유엘이 내뱉는 말에 적대감은 없다. 순수한 흥미. 흥미로 죽음을 운운하는 점이 섬뜩하긴 했으나, 유엘 라지안은 ‘그런 인간이다’ 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또 아니었다. “실례되지만, 교단의 처형인께선 막대한 권력을 쥐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제 위로는 제국의 태양과 세 교단의 대표자인 대사제분들뿐이니.” “그렇다면, 저 같은 모험가를 죽인다 하여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 원하는대로 칼을 휘둘러도 될 위치에 당신은 있지 않은가. 나진은 그리 질문한 것이다. 이 세상이 그런 세상임을 나진은 안다. 설령 유엘이 나진을 이 자리에서 즉결 처형한다 한들, 이 사건은 그리 커지지 않으리라. 그 누가 감히 교단의 처형인에게 반기를 들겠는가. 하지만 유엘은 그리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나진은 알고 싶었다.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위험하다곤 하나, 왜인지 모르게 유엘이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이진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으니까. “예, 지금 당신을 죽인다 하여 제게 별다른 제재는 가해지지 않겠지요. 사실입니다.” 그 질문에 유엘은 답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정한 규칙에 예외를 두는 일입니다. 하나의 예외는 둘로, 둘은 셋과 넷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불가능합니다.” “···규칙, 말씀입니까?” “살아남기 위한 규칙이지요.” 그녀가 길게 숨을 내뱉은 뒤 말을 이었다. “욕구대로 산다. 원하는대로 죽인다. 예, 백오십 년쯤 전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것은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원하는대로 죽였습니다. 전란의 시대였으니까요.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선과 악은 없습니다. 옳고 그름 역시,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살았습니다. 참으로 즐거운 시대였지요.” 닥치는 대로 죽이고 피에 취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방법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담담히 말했다. “저는 살인귀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고 피 흘리는 이를 사랑합니다. 허나, 그것만큼이나 저는 삶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지요.” “그렇습니까.” “예, 실로 그렇습니다. 이 즐거움을 오래 누리려면 세상이 정한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잣대에 저를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정했을 뿐이다. 자신만의 규칙을. 유엘 라지안은 그렇게 말했다. “죄를 저지른 이. 잘못을 범한 이. 흑마법에 손을 댄 사도. 사악하고 사이한 것들.” “그런 것들을 베어버린다고 하여 세상은 저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검이 무고한 이의 목을 갈라 피를 흘리게 만든다면······.” “그들이 오겠지요.” 유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성휘 교단의 등대지기, 성체 교단의 성육신, 검성 카론, 제국제일각 게르드.” 별들의 전장과 나락의 땅이 아닌. 대륙에 거하는 초인들. 그들은 대륙에서 활개를 치는 살인귀를 쳐 죽이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올 존재들이기도 하다. “아아, 그들은 강자입니다. 제가 전력을 다해 달려든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를 상대로는 살아남을 수는 없겠지요. 물론 그들과 피 흘리며 싸워보고 싶은 욕구 역시 있지만, 그 바람은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미뤄두었습니다.” 그리 말하며 유엘은 웃었다. 그 무엇보다도 순수한 티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가장 맛있는 디저트는, 마지막으로 미뤄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 모두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마지막 말 만큼은 나진은 동의했다. “그렇군요.” “예, 그런 겁니다.” 조금이지만 유엘 라지안이란 인간이 어떤 인물인지 이해한 기분이 들었다. 그 삶의 방식은 조금도 공감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해는 그 별개였으니까. “그러니 당신에 대해서도 조금 참아볼까 합니다.” “···예?” 지하수로의 끝이 보였다. 또각,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밟으며 위로 올라가던 유엘이 나진을 돌아봤다. “당신은 소드 마스터에 오를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나이에 그만한 경지. 필시 머지 않은 시일에 저와 같은 위치에 오르겠지요.” 새하얀 백발이 새어 들어오는 빛을 받아 반짝였다. 빛을 등지고 선 그녀가 나진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때가 온다면, 저는 당신에게 다시 한번 결투를 청할 것입니다. 그때는 거부하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 범죄를 저질러 주셔도 좋습니다. 경미한 범죄는 소드 마스터 특별법으로 면죄를 받을 수 있으니, 기왕이면 거대한 학살극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네요.” “그렇습니까?” 유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참 아쉬운 일이군요.” 3. 유엘과 나진이 지하수로 밖으로 올라왔을 때, 도시의 영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한 것보다 조용히 일이 처리된 것 같았으니까. “저는 이만 캄브리아로 가보겠습니다.” 이 도시에서 처리할 일을 모두 끝냈으니 나진은 캄브리아로 돌아갔고, 이단심문관들이 탄 마차 역시 성혈 교단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유엘 라지안은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타고 왔던 마차만이 도시에 남아있었다. 영주가 그녀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가만히 자리에 서 있던 유엘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 시선은 상업 도시의 좁다란 골목길을 향하고 있었다. “레겐오프 시는 상업 도시로 알고 있습니다.” “예, 예에. 그렇습니다만···.” “하나 묻겠습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영주께선 범죄에 가담한 죄인이 될 수 있단 사실을 명심하고 답해주시길 바랍니다.” “···예?” 영주가 어깨를 떨었다. 유엘은 붉은 눈동자로 영주를 바라봤다. 그녀가 팔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골목길의 깊은 곳을 가리켰다. “저곳에서 마기가 느껴지는군요. 팔아선 안 될 것들이 판매되고 있는 듯합니다. 목소리가 들립니다. 상인들의 목소리입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영주를 호위하는 기사들조차 아무것도 듣지 못했으며, 이 자리에 나진은 물론이고 검성이 있다한들 어떠한 소리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엘 라지안은 듣는다. 그녀의 감각은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비정상적이었으니까. 그녀의 귀에는 암거래를 하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코는 그들이 사고파는 물건이 풍기는 악취를 맡았다. “영주께서 관리하는 사업입니까, 혹은 이곳에 자리 잡은 사교도들의 독단입니까?” 유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영주는 깨달았다. ‘암시장.’ 레겐오프 시에는 암시장이 존재하며, 그 존재는 암암리에 묵인되고 있다. 제법 돈이 되는 일이었고 상업 도시가 빠르게 덩치를 불릴 수 있던 것도 저 암시장의 존재 덕분이었으니까. 영주는 암시장의 존재를 묵인했다. 때로는 암시장을 지원하고 덩치를 키우게 내버려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눈앞의 처형인은 범죄에 연루됐단 것만으로도 사람의 목을 자르는, 그리하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까?” 눈앞의 영주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유엘은 다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그렇다면, 정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교단의 처형인인 저의 의무이므로.” 그녀만큼의 거물이 나서지 않아도 될 사소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유엘 라지안은 골목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걸음을 막아설 명분은 영주에게 없었다. 영주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날 레겐오프 시의 골목길은 피로 물들었다. 비명은 울려 퍼지지 않았으나. 인간의 비명을 닮은 검명(劍鳴)이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