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화를 삼키는 뱀, 디에타. 아르베니아라는 가문명을 떼어버리고, 평민이 된 그녀의 일상은 놀라우리만치 변한 게 없었다. 언제나처럼 집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거래처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가는 것. 상인으로서의 그녀의 일상은 변한 게 없다. 변한 게 있다면 ‘디에타’로서의 일상이다. 일을 처리하다가 잠시 숨을 돌릴 때, 커피를 홀짝일 때, 무심코 창밖을 바라볼 때마다 디에타는 무심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아······.” 상단의 직원들은 그녀의 한숨을 ‘일이 많으셔서 피곤하신 가보다’ 정도로 해석했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디에타를 호위하는 기사 파시온이 보기에 그런 종류의 한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우수에 찬 눈빛으로 창문을 바라보는 디에타. 그 눈빛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모습이요, 제 연인을 만나지 못해 안달 난 소녀의 모습이다. 평소에 저런 식의 표정을 짓지 않았던 제 주인이었기에 파시온은 그런 디에타의 모습이 낯설고 또 신선했다. ‘제대로 빠지신 모양이로군······.’ 파시온은 신음했다. 디에타를 호위한 지 어언 13년이 넘어가는 파시온이다. 처음에야 디에타의 어머니의 부탁으로 그녀를 호위했다지만, 연차가 쌓이다 보니 파시온은 심리적으론 디에타를 제 동생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귀여운 여동생. 그런 여동생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듯싶다. 디에타를 끔찍이도 아끼는 파시온은 ‘본래대로’라면 당장 디에타가 빠진 듯한 남자를 찾아가, 이것저것 따지고 평가를 매길 테지만··· 그 상대를 아는 지금 파시온은 그리하지 못했다. ‘분명 이반, 그 청년이겠지.’ 이반이란 청년이 어떤 인물인가. 재능은 출중하고, 노력가인 데다가 실력까지 뛰어나다. 게다가 기사의 긍지와 명예, 충성을 무겁게 여기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낭만적인 기사 지망생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기사인 파시온의 입장에서야 점수를 짜게 줄래야 짜게 줄 수가 없는 인물인데···. ‘거기에 더해···.’ 별장에 잠입해 디에타를 구출해 왔고. 목숨을 걸고 기사단장과 맞서 싸웠으며. 끝내 디에타를 캄브리아로 데려오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파시온이 무릎을 꿇고 절해야 할 은인이란 소리다. 그리고 그 과정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과연, 제 주인이 사랑에 빠질 만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파시온이 침음을 흘렸다. ‘일등 신랑감이긴 하군.’ 앞길도 창창하니 이만한 신랑감이 또 없다. 하지만, 정작 이반이라는 그 청년은 연애에 관심이 없어 보이던데. 일방적인 연심만큼이나 안타까운 일이 또 없다. “후우······.” 창밖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 도합 37번째 한숨을 내쉬는 제 주인을 흘겨보며, 파시온은 식은땀을 흘렸다. 기어코 디에타는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보고 싶다···.” 무척이나 작은 중얼거림. 하지만 기사의 초인적인 청각은 그마저 잡아내고 만다. 파시온이 제 주인의 눈치를 보며, 진지하게 나진을 데려와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이다.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오셨다는 비서의 목소리. 오늘 보기로 한 손님은 없었을 텐데, 하고 디에타가 생각한 순간이다. 끼이익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아무 때나. 자유롭게. 정말로 편하게! 상단에 방문해도 좋다고, 저 사람이 오면 그냥 조용히 위로 올려보내라고 디에타가 몇 번이고 강조해 설명했던 인물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물어볼 게 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니까 나진이 서 있었다. 디에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머리를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스턴 상태에 걸린 디에타가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디에타.” 나진이 디에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말을 놓기로 한 건 원점으로 돌아갔지만, 어쨌든 이름으로 부르기론 약속한 마당이다. 이름으로 안 불러줘서 대답을 안 하는 건가 싶어 디에타의 이름을 부른 나진이지만······. “히끅.” 이 경우, 나진의 호명은 치명타로 적중했다.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디에타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2. 차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상태이상을 회복한 디에타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레겐오프 시에 관해 물어보려고 왔다고 하셨죠?” 나진이 디에타를 찾아온 이유. 그건 나진이 수주한 의뢰의 수행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나진의 간략한 설명을 들은 디에타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레겐오프 시는 과거 흑마법사가 판을 치던 도시였을 거예요. 수십 년 전 이야기이긴 한데, 좀 큰 규모의 흑마법사 집단이 도시를 점거하고 있었거든요.” 마굴, 레겐오프. 수십 년 전엔 그런 이름으로 불렸던 도시다. 도시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디에타가 말을 이었다. “도시째로 흑마법사들이 먹어버렸다고 했었나? 영주를 세뇌해 인질로 잡고, 도시 전체에 인식저해 장막까지 펼쳐서 무슨 재단을 만들려 했다고 들었는데.” “···규모가 많이 큰데요?” “그래서 제국 역사서에도 기록 된 사건이에요.” 그 결말이 어떻게 됐더라. 그리 중얼거리던 디에타가 아, 하고 박수를 쳤다. “그러다가 제국에 걸려서 로열 가드를 필두로 황궁 기사와 마법사들이 도시째 쓸어버렸을 거예요. 듣기론 적색 마탑주가 도시를 아예 불태워버렸다나?” “도시를 불태운다고요?” “그 정도로 흑마법이 뿌리를 깊게 내렸으니까요.” 디에타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책장을 뒤적이더니, 책 하나를 꺼내 나진에게 건넸다. 제국의 근현대사가 쓰인 역사서였다. “여기 있네요. 레겐오프 섬멸전.” 섬멸(殲滅). 꽤 섬뜩한 단어가 들어간 대목이었다. 역사서를 훑어보는 나진에게 디에타는 설명을 이었다. “그게 대략 5~60년 전 이야기이고, 새로 취임한 영주를 필두로 도시가 재건축됐을 거예요. 그 뒤로는 상업 도시로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귀찮은 사건이 발생한 모양이죠?” 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 토벌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음, 그건 민감하게 반응할 만도 하네요. 겨우 마굴이란 멸칭을 떼어냈는데, 다시 흑마법사랑 엮이면 귀찮아질 테니까요.” 나진은 역사서를 들여다봤다. 레겐오프 섬멸전. 칠환(七環)의 흑마법사 ‘케팔론’을 필두로 한 흑마법사 집단을 소탕하고, 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제국의 중앙정부에서 나서 섬멸한 사건. -칠환의 흑마법사···? 역사서를 흘겨보고 있자니 멀린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니 모르는 놈이지. 근데, 칠환이면 꽤 치는 놈일 텐데? 지금 시대로 따지면 거의 마탑주급일 거야. 환(環), 다른 말로는 서클. 그게 마법사를 구분하는 경지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확한 단위를 나진은 알지 못했다. ‘일곱 개의 고리면 어느 정도예요?’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정도야. 멀린이 말했다. -팔환(八環)을 소드 마스터급이라 생각하면 돼. 정확한 구분법은 아니지만, 팔환부터 아크 메이지라고 불리거든. 칠환이면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정도지. 아직 잘 감은 잡히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가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지 경험해 보지 못한 나진이기에, 그쪽 경지는 아직 뜬구름을 잡는 느낌이었으니까. -당장 널 마법사로 빗대면 고리 네다섯 개쯤 될걸? ‘그런가요?’ -응. 대충 그 정도쯤 될 거야. 멀린의 설명을 들으며 역사서를 넘기던 나진이 손가락을 멈추었다. 역사서의 한가운데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 적혀있었으니까. 작전의 지휘권자 게르드. 게르드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제국의 첫 번째 기둥이자 인류 최강자라 불리는 소드 마스터. “아, 당시 로열 가드였던 게르드 경께서도 참전했다고 들었어요.” “그 소드 마스터 게르드 경이 맞나요?” “맞을 거예요. 본래 로열 가드 소속이었으니까.” 뭔가 굉장히 큰 사건이었구나. 나진은 그 정도의 감상을 느꼈다. 아직 체험해 보지 못한 영역이기에 머릿속으로나마 그려볼 뿐. “레겐오프에 갈 때 딱히 주의해야 할 점은 없을 거예요. 아마 의뢰에 이단심문관이 함께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정도?” “···이단심문관이요?” 나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단심문관. 종교와 관련된 이들이니 자연스레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네, 아마 성혈(聖血)교단에서 이단심문관을 파견할 거예요. 흑마법사 같은 이단을 처리하는 건 그쪽 역할이거든요. 워낙에 사나운 사람들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거예요.” 성휘 교단이 아니다. 그럼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나진이 짧게 숨을 뱉고선 역사서를 덮었다.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도움이 됐나요?” “네, 충분히.” 디에타가 미소 지었다. “근데 이걸 어쩌나. 감사하긴 아직 이른데.” 그녀가 손짓하자 비서가 목함을 들고 왔다. 목함에는 얼마 전 수선을 맡긴 나진의 방어구와 잡다한 장비들이 들어찬 모험용 가방이 담겨 있었다. “선물이에요. 모험용 물품도 ‘저희 상단’ 물품으로 가득 채워놨으니, 잘 써주세요.” 자리에서 일어선 디에타가 수선을 마친 방어구를 촥 펼쳐들곤, 나진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있어 보세요. 팔은 위로 올리시고.” 그리곤 주섬주섬 나진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마지막으로 옷 매무새를 확인하며, 끈의 길이를 조절해준 디에타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잘 어울리네요.” 모험용 물품이 담긴 가방을 건네며, 그녀가 나진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다녀오셔서 이야기도 좀 들려주시고요. 3. “오, 자네가 그 이반이란 모험가로군.” 레겐오프로 향하는 마차. 마차의 앞에는 나진을 마중 나온 기사 하나가 있었다. 레겐오프를 다스리는 영주의 명을 받아 파견 나온 기사였다. 그가 나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네. 나는 일레프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일레프 경.” 악수를 나눈 둘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올라 도시로 향하는 동안 나진은 일레프에게 의뢰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근래 도시의 슬럼가와 지하수로에 수상쩍은 움직임이 감지됐네. 흑마법의 흔적도 발견됐지. 이단심문관들을 피해 도주한 흑마법사 ‘파우베’와 연관이 있으리라 판단하는 중이고.” “의뢰 대상에 대한 정보가 더 있습니까?” “물론이네.” 일레프가 설명을 이었다. “파우베는 최소 사환(四環)의 경지에 닿은 마법사이며, 학파는 불명이네. 하지만 이단심문관 다섯을 살해한 전적으로 보아 그 이상의 경지일 수도 있어.” 그리고 특이 사항으로는. 그리 중얼거리며 일레프가 입을 열었다. “걸작, 불그림자를 소유하고 있지.” 흑마법사 파우베는 걸작의 소유자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진은 곧장 속으로 중얼거렸다. ‘알고 있는 거 있어요?’ -나도 모르는 걸작이야. 우리 때 모든 걸작이 발굴된 건 아니었으니까. 멀린도 모르는 걸작. 혹시 정보가 더 있나 싶어 기사의 설명을 더 기다려봤지만, 일레프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효과는 모르네. 발굴된 유적에서 ‘불그림자’란 이름만 밝혀졌을 뿐이지. 다만 파우베와의 전투에서 생환한 이단심문관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짧게 말했다. “눈에 보이는 걸 믿지 말라더군.” * * * 또각. 지하 수로의 깊은 곳에 구두굽 소리가 울렸다. 또각, 또각. 울려 퍼지는 구두굽 소리의 동반자는 누군가 내지르는 비명이다. 누군가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내지르지만, 그 비명은 널리 퍼지지 않았다. 방음 마법이 몇겹으로 겹쳐 있었으므로. 그 비명을 듣는 것은 오직 한 명뿐. 구두 굽 소리의 주인은 제 귓가를 맴도는 비명이 퍽 감미롭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구두 굽 소리의 주인, 파우베는 팔다리가 잘린 인간을 질질 끌며 수로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딛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경쾌하기까지 하다. 실제로 그녀는 지금 기분이 좋았다. “위대하신 선배께서 기반을 참 잘 다져 놓으셨단 말야.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그녀를 따르는 흑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셋의 흑마법사와, 산 제물 둘을 대동한 채 그녀는 지하수로를 따라 내려갔다. 수십 년 전, 빌어먹을 제국에 의해 위대하신 선배의 계획은 엉망이 됐다곤 하나······. 그 노력마저 물거품이 되진 않았다. 위대한 칠환의 흑마법사, 케팔론께서 이 도시의 지하에 만들어둔 시설은 끝내 제국의 눈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적색 마탑주가 피워올린 불길도 도시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공방마저 불태우진 못했다. 국가전복을 꾀한 전설적인 흑마법사의 숨겨진 공방. 그야말로 군침이 도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지하 수로의 깊은 곳에서 파우베가 손가락을 휘저었다. 피어오르는 검은 마나가 벽에 스며들곤··· 딸깍, 무언가 눌리는 소리와 함께 지하로 향하는 길이 만들어졌다. 또각. 그 길로 그녀가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이다. 수로의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수로를 순찰하던 병사였다. 눈을 크게 뜬 병사가 기사에게 신호를 알리고자 움직임을 보인 순간이다. 히죽, 하고 파우베가 웃었다. 그녀가 허리춤에 찬 등불을 손등으로 툭 건드렸다. 등불이 출렁인 동시에 지하수로에 불그림자가 드리웠다. 불에는 그림자가 없다는 상식을 깨고, 불의 그림자가 병사의 시야를 집어삼켰다. 그리곤 풍덩. 대뜸 병사가 수로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는 수로에 고개를 처박은 채 익사했다. 그 죽음에는 어떠한 비명도, 소음도 없었다. 쏴아아······. 물 흐르는 소리만이 메아리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