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간의 바깥. 큰형님이 수금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조직원들은, 대장간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걸 확인하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겔 영감이 순순히 상납금을 낼 리가 없을 테니 분명 검을 잔뜩 털어왔으리라. 상자가 덜그럭 거리는 소리를 들은 조직원 둘이 잽싸게 튀어 나갔다. “형님, 제가 들겠습···?” 조직원이 말끝을 흐렸다. 대장간에서 걸어 나온 것은 형님이 아니었다. 정확하겐 형님도 오긴 했는데, 걸어 나온 게 형님은 아니었다. “끄, 으으으윽···.” 신음을 흘리며 엎어져 있는 형님. 그리고, 그런 형님의 머리칼을 붙잡아 질질 끌고 온 소년의 모습. 조직원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이다. 쿵! 소년이 품에 들고 있던 상자를 조직원 앞에 던졌다. 다름 아닌 대장간의 검들을 몰수하려고 그들이 챙겨온 상자였는데, 그 상자에는 검 대신 깔끔하게 잘려 나간 큰형님의 팔이 담겨 있었다. “허, 허억!” “형님!” 조직원 둘이 식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소년, 나진은 여기까지 끌고 온 팔 잘린 남자를 옆으로 내팽개쳤다. 조직원 둘은 나진의 눈치를 보며 내팽개쳐진 형님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제 형님을 챙기는 동안, 나진은 말 없이 시선을 늘어트렸다. 바깥에서 대기하던 인원은 셋. 둘은 별 볼 일 없는 잡졸이었으나 하나는 아니었다. 나진은 아까부터 미동도 하지 않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내. 깊게 눌러쓴 후드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나진이 짧게 숨을 뱉었다. “그쪽이 책임자 같은데, 이야기 좀 합시다. 해야 할 이야기가 좀 있지 않나?” 그 말에 사내가 헛웃음을 흘렸다. “허, 이 놈 봐라.” 사내가 깊게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렇게 드러난 얼굴에는 긴 흉터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귀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쭉 이어진 흉터. 그 흉터를 확인한 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땅거미의 조직원들 중 간부급의 얼굴은 외우고 있는 나진이다. 그리고, 저 얼굴은 나진의 기억에 있었다. “하이고.” 나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간부급까지 보내고 지랄났네 아주.” “날 아냐?” “땅거미 호르세의 여섯번째 다리. 짝귀 플릭스 아니에요?” “여섯번째가 아니라 여덟번째 다리다. 플릭스가 아니라 프릭스고.” “여덟 간부 중에 여덟번째면 제일 약하단 뜻이네요.” “그건 아니지.” 프릭스가 정색했다. “다리의 순번이 강함의 척도를 나타내는 건 아니지. 내가 여섯번째 놈보다 세다.” “혀가 기시네. 여섯번째든 여덟번째든···.” 나진이 제 앞에 놓인 상자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상자 안에 담겨있는 팔 하나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간부급이나 되는 양반이 이반의 영역엔 왜 들어왔습니까? 이건 명백한 계약 위반인데. 잡졸 팔 한 짝으론 못 넘어가요, 이거.” “하하. 그럼 내 팔도 내놓으란 소리냐?” “팔 까지는 너무 갔고.” 나진이 제 중지를 들어 올렸다. “손가락 하나만 자릅시다.” “제대로 미친놈이군.” 제 앞에서 조금도 쫄지 않는 소년의 모습에 프릭스가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그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스릉. 프릭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관리가 잘됐는지 윤기가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검이었다. 나진은 문득 제 손에 들린 검을 바라봤다. 거멓게 때가 타고 녹슨 검. 쩝, 괜스레 입맛을 다신 나진이 검을 한 바퀴 고쳐 잡았다. 2. 땅거미 호르세 휘하의 여덟 간부 중 하나. 여덟번째 다리, 프릭스. 윗동네에서 그는 기사를 모시는 종자였다. 물론 제대로 된 기사의 종자는 아니었다. 그가 모시던 기사는 늙고 병들어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기는커녕, 프릭스를 노예처럼 부렸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곤 하나. 프릭스는 기사에게 검술을 배웠고, 마나를 다루는 법을 미약하게나마 익혔다. 익힐 당시에는 몰랐으나 이 도시에 떨어지고 나니 그 가르침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도시에서 나는 강자다.’ 윗동네에선 별 볼 것 없는 기사의 종자에 불과했지만, 이 도시에서 프릭스는 명백한 강자였다. 그 사실에 프릭스는 우월감을 느꼈다. 쓰레기 같은 도시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자신은 특별한 존재였으니. 마나로 육체를 강화할 줄 아는 강자. 비록 검기를 뽑아내는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르진 못했지만, 마나를 다룰 줄 안다는 것만 해도 프릭스는 이 도시에서 손에 꼽는 강자였다. 그런 프릭스의 눈에는 날붙이를 들고 설쳐대는 놈들은 우스워 보였고, 사람 좀 담구고 다녔노라고 자랑하고 다니는 놈들은 한심해 보였다.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 놈들이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것만큼 웃긴 일이 없었으니. ‘저 놈도 비슷해 보이는군.’ 프릭스는 제 앞에 서 있는 애송이를 보았다. 저 애송이에 대한 소문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반이 아끼는 사냥개. 이반이 눈독을 들인 만큼 재능이 있기야 하겠지만······. ‘느껴지는 마나는 없다.’ 마나를 다루는 이가 자연스레 흘리는 기척이 소년에게선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잘난 이반에게서 마나 연공법을 전수받지는 못한 모양이지. 그렇다면, 결국 저 애송이도 저 잘난 맛에 설치고 다니는 어중이떠중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결론을 내린 프릭스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어이, 애송아.” 프릭스가 칼끝을 까딱이며 히죽였다. “첫수는 양보하마. 네 말마따나 여긴 이반의 영역이니 그 정도 메리트는 있어야지.” 기사의 검례(劍禮)를 흉내 내며 프릭스가 첫수를 양보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흘겨보던 나진이 검을 고쳐잡았다. 거절하진 않겠단 뜻이었다. 쿵. 나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내디딘 한걸음에 그가 무게를 실었다. 무릎을 굽힌 채로 검을 낮게 늘어트린 자세. 검을 휘두르기 위한 자세라기보단 도약을 위한 자세에 가까웠다. ‘무슨 저딴 근본 없는···.’ 기사에게서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운 프릭스의 눈에 나진의 자세는 형편없어 보였다. 저래서야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검에 휘둘릴게 뻔했다. 생각보다 더 별 볼 일 없는 상대인가? 그 사실에 프릭스가 실망감을 느낀 순간이다. 콰앙! 나진이 땅을 박찼다. 땅을 박차는 소리와 카아아아아앙! 하고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는 거의 동시에 울려 퍼졌다. 프릭스의 눈이 부릅 뜨였다. 자신과 소년 사이에 놓여있던 간격은 거의 열걸음 남짓. 그 열걸음 남짓한 간극을 한 번의 도약으로 좁히며 검을 휘둘러온 소년의 움직임은 프릭스의 예상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카, 가가각! 맞부딪친 검날을 타고 나진의 녹슨 검이 요동쳤다. 프릭스는 제 손아귀에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당황했다. 급히 마나를 끌어올린 프릭스가 나진의 검을 밀어냈다. 촤악, 미끄러지듯이 나진이 세걸음 물러섰다. 한순간의 공방에 불과했지만 프릭스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검을 쥔 손아귀가 얼얼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게 맞나?’ 그냥 검을 휘둘러서 나올 무게가 아닌데? 프릭스는 제 앞의 소년을 노려봤다. 세 걸음의 간격을 두고 가볍게 숨을 내쉬고 있는 소년은 조금도 무리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나진은 말 없이 프릭스를 보았고. 뒤이어 검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검을 잡은 손을 쥐었다 펴기를 두어번, 나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프릭스는 그 일련의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진 알 수 없었지만, 소년이 자신을 재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런 건방진 새끼가···.” 프릭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과 달리 마나를 완전히 끌어올린 프릭스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기사에게 직접 배운 제국 검술의 상단 자세. 프릭스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갈무리되지 못한 마나가 체내에서 새어 나오며 만들어 내는 현상. 숙련되지 못한 마나 사용자에게서 나타나는 흔적이었다. 나진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프릭스를 응시했다. * * * 나진은 마나를 다루는 방법을 모른다. 이반과 오펜이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자신은 마나를 다루지 못한다고 나진은 생각했다. ‘저게 마나인가?’ 나진은 제 앞을 보았다.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프릭스. 그의 몸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나진은 흘겨봤다. 이반, 그리고 오펜과 종종 대련을 해봤던 나진이다. ‘그 두 사람 몸에서는 저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진 않았던 것 같은데?’ 오펜과 이반은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숙련자다. 반면 프릭스는 그들에 비하면 초짜에 불과한 비숙련자였다. 저 아지랑이는 마나를 완전히 갈무리할 줄 아는 숙련자와, 갈무리하지 못하는 비숙련자 간의 차이였으나······. 그 차이점을 나진이 알 턱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진은 저것도 마나 운용법의 일종이구나,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순간 탁, 하고 프릭스가 땅을 박찼다. 제국 롱소드 검술의 기본자세. 짧게 숨을 내뱉으며 프릭스가 한걸음 크게 내디뎠다.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제국 검술의 교본과 같은 사선 베기. 쐐엑! 그러나, 마나로 강화된 육체와 맞물린 순간 가장 단순한 베기는 치명적인 일격이 된다.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날이 나진을 향해 떨어졌다. “······.” 밀려드는 검날의 앞에서 나진은 생각했다. 확실히 마나라는 게 신기하긴 하다고. 조금 전보다 눈에 띄게 빨라진 프릭스의 움직임에 나진은 혀를 내둘렀다. 마나를 다룰 줄 알면 저런 게 가능한 건가? ‘그런데···.’ 그렇게 빠르진 않은 것 같은데. 여전히 눈에 보일만한 속도고, 여전히 대응 가능할만한 속도였다. 판단을 내린 나진이 움직였다. 탁. 회피 대신 나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도리어 상대가 휘두른 검의 간격으로 파고들었다. 얼핏 보면 자살행위에 가까운 판단. 그러나, 나진은 프릭스의 간격으로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프릭스의 검이 완전한 궤적을 그리기 전에. 그 검격에 제대로 힘이 실리기 직전. 카아아아앙! 나진의 검이 프릭스의 검날을 후려쳤다. 적은 힘으로 상대의 기술을 깨트리며 나진은 프릭스의 빈틈을 노려 검을 내질렀다. “······!” 프릭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프릭스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아지랑이가 한층 짙어졌다. 튕겨 나간 검을 억지로 끌어당기며 프릭스의 육체가 한층 가속했다. 검의 궤적이 휜다. 기술이 파훼 되어 튕겨 나간 검이, 다시 제 위치로 돌아온다. 평범한 인간의 육체로는 불가능한 움직임. 마나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한 기이한 움직임이다. 기이한 움직임이 만들어 낸 검격은 지금의 나진이 취한 자세에선 회피도, 반격도 불가능하다. 예상을 벗어난 검격. 그 검격이 나진의 어깻죽지를 찢어놓으려는 순간, 프릭스는 보았다. 자신의 가속된 움직임을 여전히 따라오고 있는 나진의 눈동자를. 자신이 휘두르는 검 끝을 응시하고 있는 소름 돋는 시선을. 쿵! 그리고 나진이 발을 내려찍었다. 찰나의 순간 나진의 몸이 가속했다. 내질렀던 검을 비틀며 비스듬하게 들어 올렸다. 그 모든 움직임은 기이할 정도로 빨랐다. 마나를 다루는 프릭스보다도 더. ‘도대체 어떻게?’ 분명 아까까지 느껴지는 마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소년의 몸에서 프릭스는 마나를 느꼈다. 눈 한번 깜빡일 찰나의 순간 번쩍이고 흩어진 마나. 한순간이지만 소년은 분명 마나를 사용해 육체를 가속했다. 너무나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마치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듯이. ‘이, 새끼가···!’ 자신이 속았단 사실에 프릭스가 분노했다. 허나, 나진은 프릭스를 속일 생각이 없었다. 나진은 자신이 마나를 다루지 못한다고 생각했으며, 지금 자신의 움직임이 마나의 도움을 받았단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언제나 효율적으로.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효율을. 나진은 그저 머릿속에 박아놓은 전투의 기본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 부차적인 것들을 본능에 의지하고 있었다. 카, 가가가가각! 비스듬히 들어 올린 나진의 검을 따라 프릭스의 검이 미끄러졌다. 녹슨 검의 표면을 거칠게 긁으며 떨어지는 검.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은 빈틈이다. “···큭!” 나진의 검을 의식한 프릭스가 급히 검을 끌어당겼으나, 정작 나진의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인 것은 나진의 다리다. 나진은 들어 올린 발로 프릭스의 무릎을 내려찍었다. 우드드득. 마나로 강화한 덕에 무릎이 안으로 꺾이진 않았으나, 프릭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덩달아 자세 또한 흐트러졌다. 불완전한 자세에서 휘두른 검에 제대로 무게가 실릴 리가 없다. 가벼운 검을 나진은 가볍게 쳐냈다. 쳐내며 나진은 한 걸음 더 파고들었다. 검의 날로 베기에는 너무나도 근접한 거리. 하지만, 애당초 나진은 프릭스를 벨 생각은 없었다. ‘그럼 죽잖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살려서 정보를 빼내야 하니까. 프릭스의 코앞에서 나진은 움켜쥔 칼자루를 망치를 휘두르듯이 휘둘렀다. 뻐억! 칼자루 끝에 매달린 무게추, 폼멜로 나진은 프릭스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다른 검보다 더 무거운 이반의 검답게 그 타격음도 묵직했다. “컥···!” 예상치 못한 일격에 프릭스의 머리가 젖혀졌다. 그러나 여전히 눈에는 초점이 잡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진이 혀를 내둘렀다. ‘마나가 좋긴 좋아.’ 마나로 육체를 강화하면 관자놀이를 찍히고도 기절을 면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직 자신이 마나를 다루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나진의 입장에선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도.’ 나진이 손을 뻗어 프릭스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후리다 보면 기절하겠지.’ 한손으로 프릭스의 머리칼을 움켜쥔 채, 나진은 다른 한손으로는 칼자루를 휘둘렀다. 폼멜로 몇번이고 프릭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뻑, 뻐억, 그리고 우득···. 그렇게 대여섯번쯤 손을 휘두르고 나서야 나진이 프릭스의 머리채를 놓아줬다. 코뼈가 부러진 프릭스가 코피를 줄줄 흘렸다. 박살난 프릭스의 치아가 후두둑 떨어졌다. 털썩. 눈을 까뒤집은 프릭스가 바닥에 엎어졌다. 나진은 짧게 숨을 내뱉고선 고개를 돌렸다. 날붙이를 들고 달려드려다가 타이밍을 놓친 호르세의 조직원들을 흘겨보며 나진이 짧게 말했다. “그거 내려놓고.” 나진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손가락 하나씩만 자르고 가요. 그게 규칙이니까.” 호르세와 이반이 정한 규칙이었다. 그 규칙이 지켜진 적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마저 그 규칙을 외면할 수는 없음을 그들은 깨달았다. 3. “더럽게 무겁네.” 한손으로는 팔뚝과 손가락이 담긴 상자를, 다른 한손으로는 기절한 프릭스의 목덜미를 잡아 질질 끌며 나진은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선 아무 데나 던져놓고 싶은데···.’ 조직의 말단이라면 몰라도 간부급마저 대충 처리할 수는 없었다. ‘요 근래 시끄럽기도 하고.’ 땅거미 놈이 자꾸만 선을 넘는다. 그렇게 이반이 중얼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어디 듣기만 했던가. 나진은 조직의 처형인이었고, 근래 자신이 담갔던 이들 중 여럿이 땅거미와의 연결점이 있음을 직접 보았다. 거기에 이젠 명백한 영역의 침범까지. 뭔지는 몰라도 뭘 꾸미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조직의 간부급이라면 뭐라도 알고 있을 테니, 이번 기회에 정보를 빼내 볼 생각이었다. ···그건 그거고. 나진은 조금 전 전투를 곱씹었다. 전투에서 자신이 사용했던 기술과, 움직임을 곱씹어 보고선 나진은 옅은 웃음을 흘렸다. 마나를 다루는 이를 상대로도 자신의 검이 먹힘을 확인했으니까. ‘열심히 배운 보람이 있네.’ 이반과 오펜에게 배웠던 것들. 오펜이 검을 휘두르는 방법을 가르쳐줬다면, 이반은 나진에게 전투 그 자체를 알려줬다. 빈틈이 보이면 찔러라. 큰 동작을 보이면 파고들어라. 무기만 휘두르지 말고 쓸 수 있는 건 일단 다 쓰고 봐라. 몸을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방법. 최소한의 힘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는 방법. 검이 닿지 않는 지근거리에서의 박투전. 지형지물의 활용과 기절시키는 방법. 그 외에도 수많은 잡기술을 나진은 이반에게서 배웠다. 열 살 때부터 이반에게 두들겨 맞으며 배웠던 기술들을 떠올린 나진이 괜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제 어깻죽지에 길게 새겨진 흉터가 쑤셔왔으니까. ‘생각해 보면 기사가 가르쳐줄 만한 건 아닌데.’ 동화 속 기사들은 고결하고 고상했다. 그러나 윗동네에서 기사였다던 이반은 고문과 암행 등 온갖 더러운 일에도 능했다. 때로는 용병으로 활동했다던 오펜보다도 더. 「잘 봐둬라.」 「너도 언젠가 하게 될 일들이니까.」 이반이 행하던 고문.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다고?」 「웃기는 소리지. 사람의 신경이 얼마나 창의적인지, 얼마나 다양한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소리야.」 「이놈이 얼마나 버티는지 내기 한번 해보자고.」 꾹 다문 입을 강제로 열게 만들고 누군가의 정신을 짖물러 터뜨리는 과정. 일렁이는 등불. 사방에 흩뿌려진 핏물. 길게 이어지던 비명소리. 「봤지?」 「너도 한번 해볼 테냐?」 당시의 기억을 곱씹던 나진이 문득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선 끄으윽, 하는 프릭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찔거리는 걸 보아하니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프릭스가 나진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듯 프릭스가 이를 갈았다. 그러나 빠득,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폼멜로 내려치는 과정에서 이빨이 여럿 빠진 까닭이다. “하나 조언하는데.” 살기를 가득 담아 자신을 노려보는 프릭스에게, 나진은 무심한 시선과 함께 조언했다. “뻐기지 말고 그냥 입 여는 게 나을 겁니다. 어차피 열게 될 건데 몸 한 군데라도 성할 때 고문 끝내는 게 좋잖아요?” 나진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덩달아 프릭스의 눈동자도 움직였다. 나진이 가리킨 곳을 확인한 순간 프릭스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곳엔 이 지하도시의 거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건물이 하나 있었으니까. 지하 도시의 지배자, 이반의 거처. 그 건물을 가리키며 나진이 말했다. “이반은 당신들의 생각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