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러워진 상인의 거리. 패배한 기사와, 그 기사의 주인인 귀족 다노르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나진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명분과 신분을 앞세운 하잘것없는 이야기. 거리에 모인 군중들조차도 저것이 패배자의 발악임을 안다. 들을 가치가 없는 소음이란 뜻이었다. “소란스러워졌네요.” 디에타는 소음에 귀 기울이고 싶지도, 저런 소음에 지금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나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일어선 그녀가 나진에게 속삭였다. “저희 도망칠까요?” “도망쳐도 됩니까?” “뒤처리야 나중에 해도 되는 거니까요. 모처럼 기분이 좋은데, 이 기분을 방해받고 싶진 않거든요.”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기 싫다. 그렇게 말하는듯한 디에타의 모습에 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진은 거리를 쓱 훑어보곤, 디에타의 구두를 바라봤다. 신고 달릴만한 신발은 아니었다. 나진이 자세를 낮춘 채 디에타에게 등을 보였다. “···업어주시게요?” “도망치자면서요?” 구두를 신고 달리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사심이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말투. 잠시 망설이던 디에타는 조심스레 나진의 등에 업혔다. 흠칫. 나진의 등에 손바닥을 갖다 붙인 디에타가 짧게 어깨를 떨었다. 볼 때는 몰랐는데 등판이 제법 단단하다. 쩍쩍 갈라진 근육이 얇은 가죽옷 너머로 느껴졌다. “옷 말고 어깨 잡으세요.” 나진이 그리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란스러운 군중들의 목소리. 손가락질 하는 귀족과, 결투에서 패배한 기사의 그르렁거림. 그 모든 소음들을 뒤로하고 나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곤, 탁. “꺄악···!” 한순간에 디에타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나진이 자세를 낮추고 달리기 시작했으니까. 옷자락을 붙잡고 있자니 떨어질 것 같아서, 디에타는 나진의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어디로 갈지 생각은 해봤습니까?” “아무 데나, 사람이 없는 곳으로···!” 흔들리는 등 위에서 디에타가 소리쳤다. 귓가에서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휙휙 지나가는 풍경. 디에타는 조금 더 나진의 등에 밀착했다. ‘이거 생각보다 나쁘지 않···?’ 꼭 동화 속 여주인공이 된 느낌이다. 그런 생각을 하기도 잠시, 디에타는 이내 깨닫게 됐다. 동화는 동화일 뿐, 현실에서의 도주극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히끅!” 계속해서 흔들리는 등. 휙휙 바뀌는 풍경. 위아래로 출렁이는 시야. 소드 엑스퍼트급 무인의 질주는 디에타가 감당하기엔 쉽지 않은 것이었다. ‘토할 것 같아···!’ 나진의 등에 토하는 참사만을 피하고자 디에타는 입술을 꾸욱 깨물어야만 했다. 2. “도착했습니다.” 나진이 걸음을 멈췄다. 중간부터는 멀미를 이기지 못해, 눈을 감고 아예 나진의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디에타다. 디에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 나진의 목덜미에 묻은 침을 쓱쓱 소매로 닦아낸 디에타가 나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내, 내려주세요.” 후들거리는 다리로 디에타가 땅에 섰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그녀가 제 가슴팍을 두들겼다. 여전히 속은 울렁거렸지만, 깊게 숨을 들이마시니 좀 살 것 같았다. 디에타가 주변을 쓱 둘러봤다. 탁 트인 시야.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탁 트인 시야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썩 괜찮은 풍경이었다. ‘도시에 이런 곳이 있었나?’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상인의 거리와 중앙 길드 인근에서 생활하는 디에타에겐 제법 낯선 장소였다. 아마도 도시의 외곽에 있는 언덕인 것 같았다. “······.” 디에타는 말없이 나진을 흘겨봤다. 나진 역시 말없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모습이었다. 근 한 달 달간 뒤에 봐온 나진은 기본적으로 과묵하고 표정의 변화가 없는 남자였으니까. 다만, 그렇기에······. 조금 전 나진이 보였던 웃음이 잊혀지지 않았다. 마치 거울을 보는듯한 웃음이었으니까. 입술을 달싹이던 디에타가 입을 열었다. “왜 그런 기행을 벌인 거예요?” 디에타의 질문에 나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뭘 당연한걸 묻냐는 듯 디에타를 바라보며 나진이 답했다. “말했잖아요. 그냥 마음에 안 들었다고.” “제 웃음이요?” “정확하겐, 체념한 듯한 그 태도가 싫었습니다. 그거 되게 익숙한 거라서.” 나진이 말했다. “내겐 이런 취급이 당연하다. 지겹도록 받아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화내는 걸 기대하나 본데, 난 그럴 일 절대 없다. 계속 웃고 있을 거다······.” 지하도시에서 언제나 거짓 웃음을 짓고 있던 소년이, 중얼거렸다. “그런 웃음이잖습니까. 그거.” “······.” 디에타가 침묵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 “버릇이 돼서 아무렇지도 않다, 그거 착각입니다.” 나진이 디에타의 말을 끊어냈다. 디에타를 똑바로 바라보며 나진이 말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상대를 안 하면 그만 아니냐, 무시하고 넘기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거 다 개소립니다. 말로는 뭔들 못 하겠습니까?” 나진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하다 보면 쌓입니다. 계속.” 상대의 표정을 읽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된 나이부터 나진은 줄곧 그렇게 살았다.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고 체념한 채 살아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어딨어요. 계속 갉아 먹히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거지. 그래서, 그냥 그게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나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참견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냥 내가 답답해서 한 일입니다. 보고 있으니까 짜증 나서.” “···그게 다예요?” “더 이유가 필요합니까?” 시답잖은 이유였고. 또한 시답지 않은 이유였다. 디에타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제 앞에 서 있는 청년을 바라봤다. 그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당신 말이에요, 이런 사람이었어요?” “뭔 소립니까.” “과묵하고, 철저하고, 무감정하고, 계획적인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요.” 디에타의 안목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디에타가 나진에게서 보았던 모습은, 나진이 지하도시에서 사냥개로 활동할 무렵의 편린이다. 제 감정을 절제하고, 욕망을 체념한 채 살아가던 시절의 모습. 지하도시를 나오면서 떨쳐냈다곤 하나. 그 편린은 여전히 나진에게 남아있었으니까. 다만 그것을 나진의 본래 성격이라 말할 수는 없으리라. 그건 나진이 쓰고 있던 가면일 뿐, 본래 나진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인물이었으니까. “이렇게 즉흥적인 사람일지는 몰랐는데.” “원래 성격은 이쪽에 더 가깝습니다.” 나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가면을 쓰고 다니듯, 나도 가면을 쓰고 다닐 뿐이니까요.” 사람은 누구든지 가면을 쓴다. 단지, 두 사람의 가면이 유난히도 두꺼울 뿐이다. 불운했던 유년기를 감추기 위한 가면이었으므로. 그렇기에. “닮았네요. 저희.” 디에타와 나진은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디에타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의 정경을 내려다봤다. 가면, 가면이라고 했나. 참으로 옳은 표현이리라. 디에타는 쓰게 웃었다. 가문에서 도망쳤고, 버려진 자식이라는 낙인을 가진 채 쉴 새 없이 달려온 그녀다. ‘20년.’ 그녀가 살아온 20년의 생애가 만들어 낸 가면은 두껍고 단단하다. 가문의 가주에게, 누이들에게, 시종들에게, 하물며 제 어머니 앞에서마저 디에타는 거짓 웃음을 지으며 살아왔다. 20년에 걸쳐 만들어진 가면. 그 가면이 쉽게 깨어질 일은 없다. 하지만, 조금 전 눈앞의 청년은 가면의 틈새를 벌려 그 너머를 엿보았다. 얼떨결에 디에타가 짓고만 당황스러우면서도 통쾌한 표정. 그건 디에타의 진짜 얼굴이었으니까. 디에타는 천천히 숨을 내뱉은 다음 나진을 바라봤다. 나진 역시 평소보다 조금 풀어지고, 가벼운 표정을 짓고 있다. 저게 저 청년의 ‘진짜’ 모습이겠지. 「···아르베니아의 버려진 창녀가.」 벗겨진 가면의 틈새. 그 틈새로 나진과 마주하고 있자니, 조금 전 귀족이 떠들었던 이야기가 디에타의 귓가에 맴돌았다. “···저기요.” “말 하세요.” “제가 왜 버려진 자식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별로 궁금하진 않습니다.” “대답이 되게 빠르시네.” “굳이 그거까지 알아야 하나 싶어서요.” 나진은 심드렁히 대답했다. “숨기고 싶으신 거 같은데, 굳이 캐물어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명패. 그 명패에 긁혀있는 ‘아르베니아’라는 글자를 보고 나진은 짐작했다. 디에타에게 있어 제 가문은 떨쳐내고 싶은 과거라는 것을. 그렇다면 굳이 알려 할 필요가 있을까. 그건 어찌 보면 배려였고, 무관심이었으며,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디에타만큼이나 나진에게도 숨겨야 할 과거가 많았으니까. 다만, 그런 나진의 무관심한 태도가 디에타에겐 신선할 따름이었다. “신기하네요, 뭔가.” “그렇습니까.”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노을. 나진이 호위를 약속했던 시간은 해가 저물 때까지였다. 드리우는 노을과 함께 소란스러웠던 산책은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디에타가 말했다. “뭔가, 생각했던 거랑은 다르긴 한데··· 간만에 속이 통쾌하네요. 당신 말대로, 가끔은 이렇게 막 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해요.” 노을빛을 받아 아래 디에타의 머리칼이 반짝였다. 노을을 등진 채 디에타가 나진을 바라봤다. “으음.” 그녀가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이내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한숨과 함께 거짓 웃음, 능글맞은 뱀 같은 인상이 떨어져 나간 얼굴은··· 디에타의 진짜 얼굴이다. 가면을 벗은 디에타가 나진을 바라봤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 좋겠네요. 28세 모험가, 이반 씨.” 아마도 거짓된 신분. 그러나, 지금 나진이 보인 웃음과 행동만큼은 거짓되지 않았다. 온전히 제 성격을 드러낸 나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디에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스코트를 위한 손이 아니다. 다만 악수를 청하는 손. 진짜 얼굴을 보인 디에타에게 나진은 악수를 청했다. 디에타는 조심스레 나진의 손을 맞잡았다. 검을 무던히도 휘둘러 굳은살이 박여있는 손과, 금화의 쇠냄새가 밴 디에타의 손가락이 맞닿았다. “지난번에 말하려다 못 한 건데.” 손을 맞잡은 채 나진이 말했다. “도시에 온 이후, 당신에게 도움을 좀 많이 받았었죠. 당신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 말하긴 했지만······.” 나진도 안다. 모든 게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임을. 비록 온전한 호의가 아닌, 속내가 있었음을 알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디에타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덕분에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고, 빠르게 등급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건 당신의 실력 덕분···.” “실력이 있다고 해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건 당신 덕분이니까요.” 자리를 빠르게 잡은 것도. 붉은 눈 용병단의 의뢰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디에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빚을 진 거죠.” 그러니까. “언제든 딱 한 번.” 나진이 말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와드리겠습니다. 제 가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두루뭉술한 말이네요.” 디에타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이런 식의 구두 약속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한 태도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요, 말을 빙빙 돌리며 거절하는 경우를 없이 봐왔으니까. 그러니 차라리 계약서를 쓰자고. 정확한 조건 하의 법적인 효력을 가진 증거를 남기자고. 평소의 디에타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마음에 들었고, 시원한 공기가 마음에 들었으며, 무엇보다 눈앞의 청년이 짓는 시원한 미소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나중에 말 돌리기 없기예요.” “약속한 건 지키는 편입니다.” 3. “슐하우저 가(家)의 기사, 베르하이겐.” 아서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원탁. 그 원탁을 그대로 본뜬 듯한 광장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제 주인을 참살했다.”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계율을 어겼다. “그는 제 동료들을 살해했다.” 전우를 배반함으로써 계율을 어겼다. “그 모든 방식은 명예롭지 않은 습격으로 이루어졌으며, 그가 휘두르는 검에는 긍지가 없었다.” 긍지도, 명예도 없는 검. 계율을 어기고 휘두른 검. “마지막으로 그는 악마와 결탁했다. 악마가 봉인된 유물을 강탈해, 악마와 계약해 힘을 손에 넣었다.”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분노가 실린 목소리가 광장에 메아리쳤다. “베르하이겐은 명예를 잃었다. 긍지를 버렸다. 악마와 결탁함으로써 기사왕의 유언을 짓밟았다. 이런 존재를 과연 기사라 부를 수 있는가?”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광장에 모인 기사들이 입 모아 외쳤다. 결단코. 그는 더 이상 스스로를 기사라 칭할 수 없으며, 기사라 불려서도 안 됐다. “베르하이겐은 기사의 명예와 긍지를 더럽혔다.” 판결이 내려졌다. “이에, 우리는 베르하이겐을 심판한다.” 광장의 중심에 서 있던 이. 가장 기사다운 기사. 아탕가의 수장, 고디프가 외쳤다. “더럽혀진 기사의 이름은, 오직 기사의 검으로만 씻어낼 수 있으니.” 오래된 기사의 계율을 지키는 이들. 기사들을 심판하는 기사. 광장에 모인 아탕가의 기사들이 저마다의 곳에 새긴 아탕가의 문양을 두들겼다. 누군가는 갑주를, 누군가는 검을, 누군가는 깃창을, 누군가는 방패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베르하이겐을 추격해 처형하라.” 심판은 내려졌고 아탕가는 움직인다. 명예와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 기사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진 시대라곤 하나, 그럼에도 넘어선 안 될 선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