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도시 아트만에는 아침에도 노을이 진다. 태양이 뜨지 않는 아트만의 아침을 밝히는 것은 햇빛이 아닌 광석을 연료로 삼는 등불이었고, 광석이 발하는 빛은 노을빛이었다. 그렇기에 아트만은 언제나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태양 빛을 잊어버린 이들은 광석 등의 인위적인 노을빛으로 태양을 추억하곤 했다. 물론 지금 거리를 거닐고 있는 소년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지하 도시에서 태어나 바깥을 경험하지 못한 소년은 태양이란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편지 왔습니다.” 이른 아침, 노을빛으로 물든 거리. 우편부 차림의 소년, 나진은 주점의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주인이 나오지 않으면 적당히 편지를 꽂아두고 돌아가는 게 우편부의 덕목일 텐데, 소년은 줄기차게 주점의 문을 두들겼다. “아이씨, 누구야!” 기어코 참다못한 남자 하나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는 문 앞에 서 있던 우편부의 멱살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야 이 새끼야, 적당히 꽂아두고 돌아가면 될 걸 눈치 없게······?” 남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린 소년. 그 소년이 꾹 눌러쓴 우편부의 모자를 살짝 위로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까닭이었다. 나진과 눈을 마주친 순간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빈.” 나진이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카빈을 바라보며 소년이 미소 지었다. “트릭시 안에 있죠?” “···트릭시 형님은 왜.” “이반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트릭시 앞으로.” “······.” 카빈이 말없이 가게의 안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앉아있는 제 형님과 짧게 시선을 교환한 카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곤 나진의 멱살을 놓았다. “형님께서 들어오시란다.” “오. 혹시 마실 거 있나요? 목이 좀 말라서.” “······쯧.” 혀를 차면서도 카빈은 주방으로 향했다. 그가 물을 떠 오는 사이, 나진은 털털한 걸음걸이로 주점의 안으로 들어섰다. 주점에는 저마다 허리춤에 날붙이 한 개쯤은 채워둔 남자들이 가득했다. 어림잡아 일곱에서 여덟. 그들이 날카로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나진은 느긋하게 주점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곳에 놓인 손님용 소파에 그가 털썩 주저앉았다. “소파가 좋네요. 트릭시.” “비싼 돈 들이고 사들인 고급품이지.” 나진의 중얼거림에 답한 것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중년의 사내였다. 트릭시, 그렇게 불리는 사내는 술잔을 흔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나진?” “말했잖아요. 트릭시.” 나진이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나진을 노려보고 있던 남자들이 움찔, 하고 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들의 손길이 허리춤에 묶인 날붙이로 향하는 것을 흘겨보며 나진은 피식 웃었다. “이반에게서 편지가 왔다고.” 그가 품에서 꺼내든 것은 편지. 긴장 풀라는 듯 나진이 손에 든 편지를 그들의 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경계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우편부의 탈을 썼을 뿐, 저 소년이 우편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 자리의 모두가 알았으니까. 지하 도시, 아트만. 최소한의 법만이 존재하는 무법지대와도 같은 이 도시를 지배하는 건 세 명의 강자였고, 그중 하나가 외눈의 이반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그리고, 눈앞의 소년은 이반의 패밀리에 속한 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트릭시.” 트릭시 또한 이반의 조직에 속한 인물이기에 이반의 이름을 저렇게 함부로 입에 담는 소년이 ‘어떤’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티 안 나게 조금만 해 처먹으라 했잖아요.” 이반의 오른팔. “이번에는 너무 심했어요.” 조직의 징수관. “어린애들 데려다가 배 갈라서 파는 건 좀 아니잖아요? 이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면서. 이건 선을 넘었어요.” 우편부의 탈을 쓴 조직의 처형인. 이반의 사냥개. 그렇게 불리는 소년, 나진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그 모습을 흘겨보며 트릭시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건방진 애새끼가···.’ 그는 이반만큼은 아니지만 이 바닥에서 제법 이름을 알아주는 상인이었다. 조직에서도 높은 위치에 속해있었고. 그런 자신에게 저리 건방지게 대하는 소년에게 좋은 감정이 들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입에 담을 수는 없다. 저 소년은 이반의 대행자로서 자신의 앞에 앉아 있으며, 그럴만한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으니까. 트릭시는 술로 목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냥 물어보려고요. 대체 왜 그랬어요?” “장사치가 하는 일에 이유는 하나뿐이지. 그편이 더 많은 돈을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랬다.” “이유는 그거뿐?”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하나?” 트릭시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도 살다 보면 알거다 애송아. 쉬운 길이 눈에 보이면 사람은 가게 되는 법이야. 어린놈들 좀 잡아다가 배 가르면 금화가 쏟아지는데 안 할 이유는 또 뭐냐?” “쉬워 보인다고 대뜸 발부터 들이밀면 발목 날아간다는 건 알죠.” “한마디를 안 지는군.” “이반이 그렇게 가르쳐서.” 탁, 하고. 트릭시가 손에 쥔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술잔에 들어찬 얼음이 잘그락 소리를 냈다. 서로 눈치나 보는 이야기는 질렸다. 본론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그래서 이반 형님께서 뭐라 하시던?” “읽어 드릴까요?” “그거 좋군.” 트릭시가 턱짓했다. 나진은 편지를 촥, 펼쳐든 채 목을 가다듬었다. “트릭시.” 나진의 입술이 움직였다. “세 번의 기회는 끝났다.” 최후통첩. “······.” 그다음에 이어질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트릭시는 눈짓했다. 그 순간 나진을 둘러싸고 있던 부하들이 허리춤에서 날붙이를 뽑아 들었다. 물을 가지러 간단 핑계로 어딘가로 향했던 카빈은 주점의 뒷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열어젖힌 문의 너머에서 남자 다섯이 주점의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큼지막한 날붙이가 들려 있었다. 그들을 흘겨보며 나진은 말을 이었다. “번 돈은 모두 뱉어내라. 그간의 정을 봐서 살려는 주겠다··· 라고 적혀있는데, 어쩌실 거예요 트릭시?” “보면 모르나?” 트릭시가 손짓했다. 철컥, 소리와 함께 주점의 뒷문과 앞문이 굳게 잠겼다. 그 의도는 분명했다. 나진의 도주로를 미리 차단한 것이다. “오우.” 나진은 혀를 내둘렀다.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트릭시의 부하만 해도 자그마치 열셋이었다. 그들의 살벌한 시선을 흘려넘기며 나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트릭시, 믿는 구석이라도 있어요? 나한테 칼 들이미는 건 이반한테 들이미는 거랑 똑같은데.” “쓸데없는 규칙을 두는 이반 형님보다 더 좋은 형님을 한 분 찾았거든.” “땅거미 호르세? 약쟁이 하칸?” 지하도시를 지배하는 남은 두 명의 강자. 트릭시는 굳이 자신이 누구의 밑에 들어갔는지 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그는 안타깝다는 듯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깝게 됐어, 나진.” “그러게요. 정말······.” 나진이 편지를 내려놓은 순간이다. 열세명이 동시에 나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점의 싸구려 조명을 받아 번들거리는 날붙이들을 바라보며,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유감이에요, 트릭시.” 나진의 발이 움직였다. 쾅! 자신과 트릭시 사이에 놓여있던 테이블을 나진은 위로 걷어찼다.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술잔이 박살 나며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공중에 떠오른 테이블. 조명빛을 난반사하는 물방울. 그것들에 트릭시가 한순간이나마 시선을 빼앗긴 순간이다. 트릭시는 들었다. 서걱, 하는 소름 끼치는 절삭음을. 책상과 함께 묵직한 무언가가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비명 소리는 뒤늦게 따라왔다. “흐, 흐아아아아악!” 공중에 떠올랐다가 추락한 책상. 그 책상과 함께 떨어진 것은 누군가의 팔이었다. 팔 한 짝이 잘려 나간 부하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쩌억, 하고 나진의 발차기가 비명을 지른 남자의 안면을 함몰시켰다. 고개가 뒤로 젖혀진 채 부하 하나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순식간에 한명이 쓰러졌다. 남은 수는 열둘이었다. “덮, 덮쳐!” “시발, 애새끼가···!” “달려들어!” 갑작스레 공중에 뜬 책상에 물러섰던 부하들이 다시금 나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눈동자는 천천히 뒷걸음치던 트릭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트릭시.” 나진이 웃었다. “도망치면 당신 하나로 안 끝나.” 이반의 사냥개가 제 이빨을 드러냈다. 3. 주점의 천장에 매달린 등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등불이 흔들리며 불그림자가 한번 일렁일 때마다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소리. 요란스러운 발걸음 소리. 무언가 박살 나고 부서지는 소리. “끄아아아아아아악!” “미친 새끼가···!” 핏물이 길게 튀었다. 튀어 오른 핏물이 주점의 테이블을, 술병을, 유리창을 검붉게 물들였다. 진동하는 피비린내와 비명 속에서 트릭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하나가 쓰러진다. 잘려 나간 팔과 다리들이 곳곳에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었다. 팔이 잘리고도 달려드는 이들의 안면과 턱에는 나진의 무릎이 꽂혔다. 쓰러지는 부하들 사이를 움직이는 나진의 움직임은 기이하다 못해 소름 끼쳤다.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날붙이들 사이를 마치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간다. 가볍게 걸음을 내디디며 나진이 들어 올린 발로 부하의 무릎을 내려찍었다. 우드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부하의 무릎이 반대로 꺾였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남자의 안면에 나진의 무릎이 꽂혔다.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진 부하의 머리가 쿵, 소리를 내며 땅에 채 닿기도 전에. 스걱. 빈틈을 노리고 나진에게 달려들던 부하의 팔이 허공을 날았다. 튀어 오르는 핏물 사이로 어느새 검을 휘두르고 있는 나진의 모습이 보였다. 직후 나진이 쾅,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그 모든 움직임이 기이했다. 빠르다, 너무나도. 소문이 과장됐다고 생각했거늘 그 반대였다. 쓰러진 부하의 수가 절반이 넘어가자 트릭시는 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림을 느꼈다. ‘미친.’ 트릭시가 뒷걸음질 쳤다. 열셋이었다. 자그마치 열셋이었단 말이다. 저 나진이라는 애송이가 괴물 같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래도 이만한 수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열셋, 그중의 절반은 땅거미가 보내준 조직원이었다. 땅거미 호르세의 곁에서 수년간 칼 밥을 먹어온 실력 좋은 칼잡이들이 고작 한두합 만에 고꾸라지고 있었다. ‘착각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자신의 계산이 틀렸음을. 자신의 생각보다 저 애송이가 더 괴물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트릭시가 뒷걸음질 치다 못해 아예 몸을 뒤로 돌려 문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철컥. 문고리를 붙잡고 돌려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침입자가 도망칠 수 없도록 조금 전 잠가버린 문. 그 문이 이제는 도망치려는 주점의 주인을 붙잡고 있었다. “씨발···!” 트릭시가 욕을 내뱉으며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가 간신히 열쇠를 뽑아 들고 문고리에 걸려는 순간이다. 콰앙! 트릭시의 바로 옆에 무언가 처박혔다. 움직임을 멈춘 채 트릭시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엔 자신이 아끼는 부하의 얼굴이 있었다. 땅거미가 보낸 조직원이 아닌 자신의 부하, 카빈.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흐르는 카빈과 트릭시의 눈이 마주쳤다. 트릭시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이반의 사냥개가 서 있었다. “도망치면 당신 하나로 안 끝난다니까. 내가 꼭 당신 아들이랑 부인 이름까지 입에 담아야 해?” “너 이 새끼···.” 카빈의 머리를 문에 처박은 장본인. 지금도 그의 머리를 한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나진이 피곤한 눈동자로 트릭시를 바라봤다. 트릭시의 시선은 나진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으으으윽···.” “끄, 끄읍···.” 서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죽은 이도 없었다. 신음을 흘리며 널브러져 있는 이들은 반병신이 되었을지언정, 모두 살아 있었으니까. 그러나 자신마저 그럴 수는 없으리란 사실을 트릭시는 직감했다. 눈앞의 소년은 이반의 대행자다. 그리고, 이반은 우두머리에겐 결코 손속을 두지 않았다. 이 자리의 우두머리는 자신이었으니 책임을 피해 갈 수는 없으리라. 죽음을 직감한 트릭시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린 트릭시가 문에 등을 기댄 채 털썩 주저앉았다. “······.” 트릭시를 내려다보던 나진이 문에 처박았던 카빈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부서진 나뭇조각이 얼굴에 박혀 끄으윽, 하고 신음을 흘리는 카빈의 뺨을 나진이 손등으로 툭툭 쳤다. “카빈.” 공포로 흔들리는 카빈과 시선을 마주한 채, 나진이 짧게 말했다. “내가 목마르다고 했잖아요.” 카빈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진이 그를 놓아주자, 카빈은 절뚝거리며 이번에야말로 진짜 물을 가지러 주점의 한구석으로 움직였다. “후우···.” 길게 숨을 뱉으며 나진이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피가 묻은 얼굴을 옷소매로 닦아내며 나진이 무릎을 굽혀 트릭시와 눈높이를 맞췄다. “왜 되도 않는 일을 벌여서 귀찮게 만들어요? 트릭시, 당신 이렇게 계산 못 하는 사람 아니었잖아요.” “큭, 크흐윽···.” 트릭시가 실소를 흘렸다. “미친 새끼. 보통은 열셋 정도 불러 모았으면 너 같은 거 하나는 담글 수 있다고 계산할 거다.” “상대가 이반이어도?” “그 괴물 같은 놈은 예외지.” “그럼 저도 예외로 두지 그랬어요.” 트릭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 지하도시를 주름잡는 이반이 어떤 사내인가. 이반은 과거, 윗동네에서 이름을 날리던 기사였다.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리 검기를 뽑아낼 줄 아는 강자 중의 강자. 그런 강자와 자신을 동일 선상에 두라고 말하는,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를 바라보며 트릭시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트릭시는 나진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눈앞의 소년에겐 기이한 무재(武才)가 있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다면 분명 높은 곳까지 올라갈, 빛나는 재능을 지닌 천재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곳은 지하도시 아트만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이곳에 버려지거나 이곳에서 태어난 이들은 결코 이 도시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도시에서 재능이란 비웃음거리에 불과하다. “크큭, 나진.” 제 죽음을 직감한 트릭시는 삶을 애원하는 대신 비웃기를 선택했다. 비웃음을 머금은 채 트릭시가 입을 열었다. 덜덜덜 떨리는 턱을 움직여 그가 조롱을 입에 담았다. “너는 평생 이곳에서··· 컥!”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나진이 내지른 칼끝이 트릭시의 목을 관통한 까닭이다. 핏물에 목이 막혀 컥, 커헉 하고 억눌린 숨소리를 뱉어내던 트릭시가 옆으로 고꾸라졌다. 꿀렁이는 핏물이 주점의 바닥을 적셨다. 트릭시의 움직임이 멈추자, 그제야 나진은 시체의 목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알고 있어요. 트릭시.” 그리 중얼거리며 나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보자 덜덜덜 떨리는 손길로 자신에게 물잔을 내미는 카빈이 있었다. 나진이 카빈에게 턱짓했다. “예, 예···?” “한 모금 마셔보라고요.” 카빈이 급히 물을 들이켰다. 한 모금만 마시라 했는데 물컵의 거의 절반을 비운 카빈을 보며 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독은 안 탄 모양이네. “고마워요 카빈.” 나진은 카빈이 원샷을 때리기 전에 물잔을 뺏어 들었다. 남은 물을 홀짝이며 나진이 주변을 둘러봤다. “뒷정리는 오늘 내로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반은 이 가게가 문 닫길 원하진 않는 것 같으니··· 깔끔하게 정리하고 당신이 이어받으면 되겠네요.” “제, 제가 말입니까?” “그러라고 팔 안 잘랐잖아요.” 나진이 칼등으로 툭, 하고 카빈의 팔을 건드렸다. 카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죄다 반병신이 된 이곳에서 오직 카빈만이 사지가 멀쩡히 달려있었으니까. “여기서 말하는 ‘정리’는 헛짓거리로 번 돈을 포함해서, 땅거미 호르세와의 관계도 말하는 겁니다. 일 두 번 하게 만들지 마요. 카빈.” 땅거미 호르세. 트릭시는 자신이 어느 쪽에 줄을 댔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나진은 그게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단 눈치였다. 카빈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예, 제발 좀.” 나진이 피곤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카빈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