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기(劍氣), 소드 엑스퍼트의 상징. 일정 경지에 오른 강자들의 전유물이라곤 하나, 멀린과 같은 초월자에게 있어서 검기란 그닥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활약하던 무대에선 널리고 깔린 게 검기를 좍좍 뽑아대는 놈들이었으니까. 검기 그 자체는 놀랄만한 것이 안 된다. 소드 엑스퍼트의 경지 역시 마찬가지다. 소드 엑스퍼트를 넘어선 시커, 마스터에 오른 이들을 숱하게 봐온 멀린이었으니까. 이는 그녀가 어지간한 재능에는 놀라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의 말문이 막힌 것인가? 그 답은 단순했다. -···너, 나이가 어떻게 되지? “열여덟입니다.” -제국 기준으로? “예. 브리튼 제국 기준으로.” 첫째는 소년의 나이. 18세.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검기를 뽑아내기엔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다. 세상살이 돌아가는 데 큰 관심이 없는 멀린이라곤 하지만······. 「멀린!」 「이것 좀 보십시오. 역대 최연소 소드 엑스퍼트가 나왔습니다. 무려 스물셋에 검기를 뽑아냈다지 뭡니까?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 스물셋이라니!」 지금으로부터 대략 십수 년 전, 최연소 소드 엑스퍼트의 탄생에 베디비어가 야단법석을 떨었던 건 기억하고 있었다. 소식을 확인한 자신이 놀라움을 표했던 것 역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스물셋에 검기를 뽑는 건 확실히 놀랄만한 일이었으니까. 이례적인 경우였던 아서왕을 제외하면 역대 최연소 소드 엑스퍼트라 불리던 사내. 지금은 검의 교단의 수장직을 맡고 있다고 하던가?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는 이가, 검기를 뽑아낸 나이가 스물셋.’ 그런데 눈앞의 소년의 나이는 열여덟이다. 아서가 검기를 뽑아낸 게 언제였지? 자신과 마주쳤을 때 아서는 이미 검기를 다루고 있어서 확신하진 못하겠지만, 눈앞의 소년과 나이가 비슷했던 것 같다. -······. 멀린은 침묵한 채 소년의 검을 바라봤다. 어린 나이에 검기를 뽑아낸 건 그렇다 쳐도, 지금 제 앞에서 반짝이는 검기의 색(色)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 백금색의 검기. 그것은 오직 아서만이 다룰 수 있던, 아서의 전유물이었다. 물론 검기의 색만을 두고 판단하기엔 이르다. 눈앞의 소년이 검기에 제 심상을 담아낼 수 있는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올랐을 때 다시 확인해 봐야 하겠지만······. 정말 만에 하나라도. 소년의 검기가 아서의 검기와 비슷한 성질을 가졌다면, 이는 쉽게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백금색의 검기는 캄란과 관련된 것들에겐 역린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龍)들이 소년의 검기를 확인한 순간,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년을 죽이려 할 것이다. ‘···좀 복잡하게 됐네.’ 나진이 엑스칼리버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더라도, 나진의 검기가 노출된 순간 수많고 수많은 것에게 소년은 노려질 것이다. 소년이 가진 빛은. 지금의 소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기껏 해 봐야 마나를 좀 다룰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소년에게서, 멀린은 상상 이상의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헛웃음을 흘렸다. 소년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것들 투성이었으므로. 들킨다면 온 세상에게 노려질 만한 것들. 이것들을 간직한 채, 소년이 세상에 노려지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소년을 성장시키는 것. 그것이 멀리 이 길잡이로서 수행해야 할 역할이었다. 쉽지 않은 일. 수틀리면 모든 게 무너지는 길. 하지만, 소년의 말을 빌리자면··· 그렇기에 도전할 가치가 있는 길이었다. 멀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2. 이동하며 나진은 멀린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나진은 그 정보를 한번 정리해 봤다. “우선 당신을 비롯한··· 제 우군이 되어줄 만한 별자리들은 이곳에서 멀다고 했죠?” -그래. 우린 캄란의 근처에 묶여있으니까. 원탁의 기사들. 그리고 아서와 함께했던 영웅들. 그들은 내륙이 아닌 세상 끝의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곳에서 아서가 만든 봉인의 틈새로 넘어오는 캄란의 저주받은 것들을 사냥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멀린은 이야기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성좌들은 보통 내륙 쪽에 개입하기 어려워. 개입하려면 교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거든. 보통의 성좌는 내륙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점. 성좌들이 개입할 수 있는 곳은 내륙에서 벗어난 중간지역이나, 별들의 전장과 캄란의 인근이란 이야기. -원래대로라면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데만 해도 어마어마한 부담을 짊어져야해. 엑스칼리버를 매개로 내 의식체를 옮겼으니까 이렇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멀린은 자신이 한 일이 무척이나 대단하고, 보통의 성좌라면 꿈도 못 꾸는 일이라고 으스댔다. 이야기를 듣는 나진의 입장에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뿐이었지만. -요점은 이거야. 멀린이 말했다. -네가 너만의 별을 가지고,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 별의 전장까지 오지 않는 이상 우리는 너를 지켜주기 힘들어. 내륙 안에선 넌 홀로 살아남아야 한단 뜻이야. “아서왕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래. 아서는 숱한 악마와, 악마들을 숭배하는 국가에게 쫓겨 다녔지만··· 넌 그게 좀 다른 놈들로 바뀌었을 뿐이지. 물론 아서에게 호의적이며, 나진에게도 호의적인 성좌와 세력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단순히 호의에 기대기엔, 작정하고 널 죽이려는 것들의 악의가 좀 찐하지. 호의에 기대기엔 적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 중얼거리며 멀린이 쓰게 웃었다. -내가 뭔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 “대충은요.” 나진은 이해가 빠른 편이었고, 멀린이 뭘 이야기하려는지 얼추 눈치챘다. “제가 가진 특별한 것들을 숨겨라. 그 소리 맞죠? 이걸 들켰다간 성가신 것들에게 노려질 테니까.” -바로 그거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진이 엑스칼리버를 뽑았단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교단 쪽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그들도 자신의 치부를 바깥으로 드러내고 싶어 하진 않을 테니까. “당장은 성휘 교단 쪽만 조심하면 되겠네요.” -······. 교단의 이름이 나온 순간 멀린은 침묵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나진의 출신과, 나진이 살아온 배경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전해 들은 멀린이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내 불찰이야. 조금은 수그러든 목소리. -교단의 심판기관이 그런 식으로, 그딴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 하물며 검을 뽑은 후보를 대뜸 죽이려 들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아서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일지도 모르는 것을, 그들은 교단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행했단 말인가? -내가 아는 ‘등대’에게 그럴 깜냥은 없을 텐데. 아랫것들의 독단인지, 아니면 등대가 개입했는지는 차차 알아봐야겠지. 베디비어에게 부탁해서······. “하지 마세요.” 멀린이 그렇게 교단의 일을 어떻게 대응 해야할지 중얼거리고 있을 무렵이다. 나진이 입을 열어 멀린의 말을 끊어냈다. -···뭐라고? “하지 말라고요. 건들지 마세요. 교단은.” 나진이 딱 잘라 말했다. “교단에게 복수를 하든, 벌을 주든··· 그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제 손으로 할 겁니다.” 그렇게 약속했다. 이반은 말했다.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서, 자신의 명예를 되찾아 주라고. 그렇게 말하며 이반은 나진을 자신의 종자로 삼았다. 비록 그 약속은 깨지고. 새로운 맹세에 덮어씌워졌지만. 나진은 여전히 자신이 이반의 스콰이어라 여겼다. 이반이 교단에 의해 짓밟힌 명예는, 오직 이반의 스콰이어인 자신의 손으로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남의 도움을 받아서 되찾은 명예를 이반이 달가워할 것 같진 않았으니까. ‘언젠가.’ 소드 엑스퍼트를 넘어서. 이반이 오른 경지의 다음인 소드 시커에 오르게 된다면.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그보다 더 높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서······. 충분히 자격을 갖추고. 충분한 힘을 갖추게 된다면. 그때 저 도시로 돌아와 나진은 외칠 것이다. 아탕가의 기사, 이반의 명예를 돌려받으러 왔음을. 너희가 짓밟으려 했던 별빛이 이렇게 돌아왔음을. 아직은 먼 미래를 그려보며 나진은 말했다. “제 손으로 무너트려야만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이, 그래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건들지 마세요.” 멀린은 침묵했다. 소년의 목소리에 실린 무게를 느꼈기에. -네가 그렇다면, 알겠어. 오직 자신의 힘으로 목적한 것을 이루려 한다. 그 고집스러움을 가리켜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비웃겠지만, 멀린은 그 미련함을 좋아했다. 아서와 함께했던 이들은 누가 뭐라 한들 그런 멍청이들밖에 없었으니까. ···이끌어 줄 맛이 있는 애송이네.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멀린은 본래의 역할로 돌아왔다. 길을 가르쳐주는 길잡이. 그녀는 어디까지나 조언할 뿐, 길을 걷는 것은 소년의 몫이었다. 3.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 아서왕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그 서사시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배경이 되는 도시. 아서가 캄브리아에서 명성을 쌓고 동료들을 모았던 탓일까. 아니면, 그 여정의 본격적인 시작점이 캄브리아였던 탓일까. 언젠가부터 캄브리아는 ‘기회의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마수와 온갖 이상 현상이 발생하는 곳이라는 배경과, 그 배경에 얽힌 아서왕의 전설은 자연스레 모험가와 용병들을 끌어들였고. 그렇게 형성된 모험가의 도시에는 숨겨진 인재를 발굴하려는 귀족가와, 모험가와 용병을 대상으로 한 외부의 자본과 상인들이 몰려들었으며. 그렇게 발전한 도시에는 아카데미의 학생, 마탑의 견습 마법사, 견습 기사 등등··· 본격적으로 사회에 나가기 앞선 어린 새싹들이 현실 감각을 기르기 위해 찾아오곤 했다. 그렇기에 붙은 별명이 기회의 도시. 재능이 있다면, 자질만 갖추고 있다면, 제아무리 출신이 천하더라도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기에 캄브리아는 기회의 도시라 불렸다. 기회를 쫓아서. 혹은 금화와 권력을 쫓아서. 매년 수많고 수많은 이들이 커다란 꿈을 품은 채 기회의 도시에 찾아온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군가가 성공하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재능의 한계를 깨닫고 도시의 골목길에 틀어박히곤 한다. 그러니까.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지금의 나진처럼. -······. “······.” 나진도 멀린도 침묵했다. 지금의 참담한 상황을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상황의 맥락은 이러하다. 멀린이 안내한 길을 따라 장장 열흘에 걸쳐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에 도착한 나진이다. 숲에서의 야영, 동물을 사냥해 배를 채우고, 간신히 마차를 얻어 타 이 도시에 도착한 것까진 좋았다. 이 도시에 도착한 것까진 다 좋았는데. 문제가 조금 있었다. 수중의 돈이 다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당장 배가 고파 죽을 것 같다는 것. 쟁여놨던 비상식량은 진작에 다 털어먹은 뒤였고,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한 지가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굶주린 배를 붙잡고 도시를 떠돌기를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땐 나진은 후미진 골목길에 들어와 있었다. 버릇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긴 왜 들어왔는데? “쓰레기라도 뒤질 생각으로요.” -···진짜? 나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멀린은 식겁했다. -그건, 그건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아? “아니, 당장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차라리 동냥을 해···!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를 뒤지는 건 아니잖아···! 멀린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나진은 웃었다. 사실 나진도 쓰레기를 뒤질 생각은 없었다. 정말 몰릴때로 몰리면 그렇게 하겠지만, 당장은 조금 여유가 있었으니까. 이런 골목길로 들어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농담이고.” 나진이 길게 숨을 뱉었다. “조금만 쉬고 움직일 생각이에요.” -진짜? “제가 거짓말을 왜 해요. 이런 거 가지고.” -···왜 바깥에서 안 쉬고? “너무 밝아서 눈 아파요.” 아직은 햇빛이 낯선 나진이었다. 움직일 때야 그냥저냥 움직이겠지만, 휴식할 때는 자꾸만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늘을 찾게 됐다. ‘뭔가 아늑하기도 하고.’ 지하도시를 떠난 지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18년의 세월 동안 몸에 남은 버릇은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골목길의 벽에 기대어 나진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 도시는 동화 속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으며, 나진의 생각보다 훨씬 거대했다. 넓어진 무대. 넓어진 배경. 엑스칼리버를 뽑고 지하도시를 탈출함으로서 제 이야기의 서장은 끝마쳤다. 이젠, 제 1장에 접어들 시간이었다. 나진은 문득 시선을 옮겨, 골목길에 기대어 졸고 있는 이들을 흘겨봤다. 아마도 이 도시에서 낙오된 실패자들이리라. 지하도시에도 저런 자들은 많았으니까. ‘아늑함에 안주하면···.’ 자신도 저들같이 낙오되고 마리라.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은 뒤, 제 몸을 채찍질했다. 가만히 있는다고 굶주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뭐라도 해야겠지. 그렇게 나진이 골목길에서 몸을 일으키러던 순간이다. 나진은 다가온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골목길의 입구. 나진의 앞에 햇빛을 등진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이제 몸을 일으키려는 나진을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나진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소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까부터 날 보고 있던···.’ 정확하겐 자신이 아닌, 이 골목길을 보고 있던 소녀였다. 골목길이 훤히 보이는 벤치에 걸터앉은 채 줄곧 골목길을 관찰하고 있던 소녀였으니까. “보아하니.” 소녀가 미소 지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연갈색의 머리칼. 반쯤 감긴 소녀의 눈동자는 마치 뱀을 떠올리게끔 했다. 저런 종류의 눈동자를 나진은 잘 알고 있었다. 대부업자, 혹은 장사꾼의 눈동자. 지하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탐욕에 젖어 번들거리는 눈동자였다. 하물며 소녀는 그 탐욕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 탐욕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나진은 직감했다. “제대로 식사를 못 하신 것 같은데.” 그녀가 나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좋은 가게를 아는데, 같이 가실래요?” 소녀의 이름은 디에타 아르베니아. 도시의 귀족들은 그녀를 아르베니아의 버려진 자식이라 부르지만, 이 도시의 모험가와 용병들은 그녀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 금화를 삼키는 뱀. 돈이 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달려들어 삼키고 보기에 붙은 별명. 디에타는 금화가 나오는 곳엔 분야를 막론하고 달려든다. 그것이 유물이든, 의뢰든, 하물며······. “제가 한 끼 살게요.” 인간이라 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