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보기 호수의 마법사, 멀린. 언제나 잔잔한 물결이 이는 아름답고 정적인 호수와 같은 별자리. 그런 별자리가 지금은 냄비에 담긴 물처럼 미친 듯이 들끓고 있었다. “와, 와, 와···.” 그녀는 열이 잔뜩 오른 제 뒷목을 움켜쥐었다. “어떤 정신 나간 새끼야?” 별은 인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그 실상은 조금 달랐다. 앞에 하나의 조건이 더 붙어있었으니까. 별은, 자질을 갖춘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애당초 모든 인간의 목소리가 별에게 가닿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목소리는 작은 소음이 되어 성좌의 곁을 스쳐 지나갈 뿐, 자질을 갖춘 이의 목소리만이 소음이 아닌 뜻을 가진 문장이 될 수 있다. ‘하물며 그마저도 아주 작은 중얼거림으로 들릴 뿐인데···.’ 분명 그럴 텐데, 어째서일까. 멀린은 조금 전 자신의 귓가에 울린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뜻을 가진 문장의 수준을 넘어, 그 비아냥대는 억양까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들은 선명한 목소리. 그야말로 영웅의 자질을 갖춘 이의 뚜렷한 의지. 그리고 그 목소리가 전한 의지는 잠잠했던 멀린의 호수를 들끓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목소리는 정면으로 아서왕의 업적을 부정했다. 멀린이 섬겼던 왕인 아서왕을 ‘시대의 풍운아’라며 조롱했다. “진짜 미친 건가?” 멀린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아서 일대기의 주인공인 성좌, 선별의 검은 대륙을 통틀어 가장 많은 신도를 보유한 성좌였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서를 모욕해? 그것도 그딴 말도 안 되는 말로? 혹시 죽고 싶어 환장했나? 멀린은 눈을 부릅뜨고 땅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시선은 별빛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까지고 뻗어 나갈 수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의 귓가에 울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하지만 좀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귓가에 목소리가 울릴 무렵 건방지기 짝이 없는 소년을 하나 본 것 같은데··· 어딜 보아도 그 소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별빛이 안 닿는 곳으로 숨었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디 한 번 평생 숨을 수 있다면 숨어봐라. “내 눈에 걸리기만 해봐.” 까득, 하고 멀린이 제 손톱을 깨물었다. 핏발이 선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아주 작은 흔적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곱게는 못 죽을 거란다, 애송아.” 영웅의 자질을 갖춘 희대의 천재던, 다른 성좌를 모시는 별의 사도이던, 소드 마스터가 아끼는 제자이든 간에 그런 건 멀린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다만 자신의 왕을 모욕한 대가를 알게 해줄 뿐. 호수의 마법사는 자신의 별자리에 맹세했다. 그 건방진 꼬맹이를 기어코 찾아내 조져버리겠노라고. 2. “쓰읍, 뭐지.” 내가 뒷목을 매만졌다. 갑자기 뒷골이 땅기는 게 기분이 좀 쌔했다. 누군가 날 잡아 족치겠다고 하늘에 대고 맹세한듯한 기분. ‘누구지?’ 사실 여기저기 원한을 좀 많이 쌓고 다녀서, 나 조지겠다고 벼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긴 했다. 뭐 별거 아니겠지. 얼마 전에 팔을 분지른 소매치기 투스일수도 있고, 주정뱅이 벨가일수도 있고···. 아무튼간 별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후우···.” 잡다한 생각을 털어내며 내가 감았던 눈을 떴다. “오펜, 명상 이거 효과 있는 거 맞아요?” 내가 고개를 돌려 공터의 한구석을 바라봤다. 그곳엔 후줄근한 차림의 사내가 한 명 앉아있었다. 내게 검을 가르쳐 주는 스승 비슷한 남자였다. 내 질문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명상으로 마음을 갈무리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검 끝도···.” 또 시작이군.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런 건 됐고, 검 휘두르는 거나 봐줘요.” “쯧.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란 걸 좀 가져봐라, 이 빌어먹을 애송아.” “그럼 입에 물고 있는 술병이라도 내려놓던가요.” 이른 아침부터 술을 들이붓고 있는 오펜을 내가 한심한 눈빛으로 흘겨봤다. 분명 지하도시로 추방당하기 전, 윗동네에선 이름 좀 날리던 용병이었다는데···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소문에 의문이 좀 들었다. 정리를 하지 않아 거친 턱수염. 후줄근한 복장과 술에 찌든 눈빛. 오펜은 누가 봐도 열이면 열 ‘음, 주정뱅이군.’ 하고 중얼거리며 넘어갈 것 같은 인상의 사내였으니까. ‘그래도 뭐···.’ 내가 자세를 잡고 검을 휘둘렀다. ‘실력만큼은 확실하니까.’ 내가 검을 휘두르자마자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너무 딱딱하다. 힘 좀 빼라. 팔꿈치는 안으로 더 집어넣고.” 오펜의 지적이었다. 나는 그 지적에 맞춰 자세를 수정했다.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검을 휘두를 때 나는 소리가 조금 더 묵직해졌다. 힘을 뺐는데 오히려 무거워진 소리에 내가 짧게 감탄했다. 후웅. 나는 계속 검을 휘둘렀고, 오펜은 짧게 한두 마디씩 조언했다. 오펜의 가르침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걸 보여주지도, 자세를 직접 잡아주지도 않지만 조언만큼은 해주었다. ‘그리고···.’ 그 조언만큼은 진짜였다. 얼핏 보기엔 주정뱅이 같아 보여도, 실제로도 주정뱅이긴 하지만··· 적어도 검(劍)을 이야기할 때만큼은 오펜은 한없이 진지해졌으니까. “자세를 낮춰라.” 바로 지금처럼. “눈을 똑바로 떠.” 날카로운 목소리. “호흡. 숨 뱉어라. 힘이 너무 들어갔어.” 술에 찌든 눈빛이 아닌, 날카로운 눈동자. “무게로 찍어누르는 게 아니다. 네 손에 들려있는 건 둔기가 아니야. 베기 위한 날붙이지. 찍어누르지 말고 스치듯이 휘둘러라.” 오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는 한참 동안 검을 휘둘렀다. 등줄기를 타고 땀방울이 흘렀다. “다리에 힘을 주고 내디뎌라. 힘으로 휘두르는 게 아니다. 검이 휘둘러지는 곳을 끝까지 봐라.” 그 조언에 귀 기울이며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시간상 이번 휘두름이 마지막이리라.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좀 많았으니까. ‘마지막은 깔끔해야지.’ 내가 검을 고쳐 잡았다. 오늘 들었던 조언들을 머릿속에 새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귓가에 환청처럼 오펜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발을 크게 내딛고.’ 쿵. ‘숨을 가다듬고, 딱딱하게 몸이 굳지 않은 상태에서 칼끝을 끝까지 봐라.’ 숨을 뱉어내며 내가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검술이라 부르기도 뭣한 가장 기초적인 휘두름. 그러나 검을 휘두르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평소와는 다르다고. 쉭!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울려 퍼졌다. 칼끝이 그리는 궤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흔들림 없이 깔끔하게 그어지는 은백색의 궤적. 스걱, 하는 절삭음이 울려 퍼지고 나서야 내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켁, 콜록!” 이유는 모르겠지만 들이마신 숨이 뜨거웠다. 뜨거운 공기에 당황해 마른기침을 뱉으며 내가 오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펜, 방금 거 좀 괜찮지 않았어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깔끔한 검격. 조금의 기대감, 그리고 흥분과 함께 질문했지만 정작 오펜은 떨떠름한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오펜이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뭐···.”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오펜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괜찮지 않았냐?” “그 애매한 답변은 뭔데요?” “아니 뭐, 괜찮았다고. 깔끔하네.” “그쵸?” 내가 피식 웃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고 내가 검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뒷정리를 하고 있자니 오펜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어디 갈데 있냐? 오늘은 평소보다 빨리 끝내는 것 같은데.” “제가 갈 데가 어딨겠어요. 일이지.” “···이번엔 누구냐?” 단번에 오펜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나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트릭시에요.” “라일락 주점의 트릭시?” 내가 고개를 끄덕였고, 오펜은 짧게 혀를 찼다. “그놈 기어코 선을 넘은 모양이군.” “애들 데려다가 배 갈라서 팔다가 이반한테 걸린 모양이에요. 어쩌겠어요, 정리해야지.” “네가?” “제가 해야죠. 명색이 이반의 사냥개인데.” 하여간, 하고 중얼거리며 오펜이 술을 들이켰다. “이반 그 녀석, 너 같은 애송이한테 별의별 일을 다 시키는구먼. 하여간 글러 먹은 새끼고, 글러 먹은 조직이야.” “그러는 오펜도 이반 패밀리 소속이잖아요.” “그건 녀석이 하도 부탁해서고··· 후우, 됐다.” 오펜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빨리 꺼지라는 뜻이었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나진.” 그렇게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들려온 내 이름에 내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비어버린 술병을 바닥에 내려둔 채,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오펜이 있었다. “내일도 와라.” “말 안 해도 올 겁니다.” 3. 나진이 사라진 공터. 오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조금 전까지 나진이 검을 휘두르던 자리로 다가섰다. “······.” 오펜의 말없이 나진이 남긴 흔적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나진이 마지막으로 검을 휘두른 자리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후우···.” 오펜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 지하도시에 처박히기 전에 그는 이름을 날리던 용병이었으며, 검을 다루던 검사였다. 제대로 된 강자들과 붙을만한 실력을 갖추진 못했지만···. 최소한, 상대의 수준을 알아볼 정도는 됐다. 오펜은 나진이 마지막에 휘두른 검의 궤적을 곱씹었다. 그 빌어먹을 꼬맹이는 마지막에 자신이 휘두른 게 뭔지도 모르는 눈치였지, 아마. ‘소리가 들렸을 텐데.’ 서걱, 하는 소리가. 별 대수롭지 않게 넘긴 거겠지. 허공을 베었는데도 무언갈 베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오펜은 검흔이 새겨진 땅을 매만졌다. 나진의 검이 스치고 지나갔던 땅이었다. 땅이 뜨거웠다. 땅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흙을 퍼내 보니 땅에 섞여 있던 자갈들이 녹아내려 눌어붙어 있었다. 그냥 검을 휘둘러선 이런 묘기를 부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펜의 입가가 경련했다. 이게 무엇인지 오펜은 알고 있었으니까. 마나, 그리고 검기의 편린. “미친놈. 가르쳐준 적도 없는 걸 배우고 앉았어.”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음을 깨달은 오펜이 헛웃음을 흘렸다. 애송이의 고용주이자, 자신의 오랜 친우인 이반의 부탁으로 나진의 검을 봐준 지가 어언 2년이다. 2년, 재능을 가늠하기에 충분한 시간. 나진이 싹수가 있는 놈이란 건 옛적에 알고 있었다. 하나를 가르쳐도 열을 깨우치는 놈이었고, 가르쳐주지도 않은걸 스스로 깨닫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놈이 천재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나진이 지닌 재능을 헤아려보던 오펜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쯧.” 그가 짧게 혀를 찼다. 나진이 지닌 재능의 가치를 알기에. 그리고, 이 빌어먹을 도시에선 그 재능은 결코 빛날 수 없음을 알기에 오펜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애송아, 여기선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어봐야 비참해지기만 한단 말이다.” 이 쓰레기 같은 도시에도. 쓰레기들밖에 없는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도. 빛을 가진 아이들은 태어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말로가 어떨지는 굳이 오펜이 아니더라도 이 도시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찬란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났다 한들, 그 누구도 이 도시에서 나갈 수 없다. 그게 규칙이니까. 결국, 나진 그 애송이도. 빛을 잃은 채 이 도시에서 천천히 썩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죽어가는 것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들 사이에 매립되어 썩어가는 것. 그 사실을 알기에 오펜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콱. 오펜이 거칠게 땅을 밟아댔다. 땅에 남은 검기의 흔적을 지우며 그는 생각했다. 술이 땡긴다고. 평소보다 조금 더. 그렇게 자리를 뜨려다 말고. 오펜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윗동네에서 용병으로서 살아가던 시절에 들은 소문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찬란한, 별에 닿을 재능을 가진 이들은 어디에 있던 별의 주목을 받는다는 이야기. “······.” 별 대신 광석이 박혀있는 하늘. 지하도시의 천장 바라보던 오펜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순간이지만 ‘어쩌면’ 하는 생각을 품은 자신이 우스웠다. “그게 쉬우면 말을 말지.” 헛된 꿈일 뿐이다. 저 밤하늘의 성좌들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지하도시의 애송이에게 시선을 두겠는가? 애초에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헛된 꿈을 꿔봐야 비참해지기밖에 더할까. “후우···.” 체념한듯한 한숨 소리와 함께. 오펜은 빈 술병을 집어든 채 공터를 떴다. [성좌, 선별의 지팡이가 비명 지릅니다.] [선별의 지팡이는 건방진 꼬맹이를 반드시 잡아 족치겠노라고, 자신의 별에 맹세합니다!] 저 밤하늘의 별자리가 나진에 집착하다 못해, 펄펄 들끓고 있음은 꿈에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