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모른다. 별이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 소년은 모른다. 태양이 얼마나 따스한 것이지. 모두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을 소년은 누리지 못했다. 소년이 태어난 곳은 별빛도, 태양 빛도 닿지 않는 깊은 지하도시였으니까.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곤 어두컴컴한 지하도시의 천장뿐. 버려진 것들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은 꿈꿨고, 별이 보이지 않는 천장을 바라보며 갈망했다. 별을 가지고 싶다고. 그 어디에 있던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동화 속의 기사들처럼, 영웅들처럼, 찬란한 빛을 가진 존재가 되고 싶다고. 낡아 해진 동화책을 손에 쥔 채 소년은 꿈을 꾸었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주제에 넘는 갈망임을 알고 있음에도. 소년은 꿈을 놓지 못했다. 2. 지하도시의 아이들이 가장 처음으로 배우는 것은 포기하는 방법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배운다기보다는 깨닫게 되는 것에 가깝지만··· 이 도시의 아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불현듯 깨닫고 만다. 자신은 한평생 이곳에서 썩게 되리란 사실을. 이 도시를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단 사실을. 무엇을 해도 위로 올라갈 수 없다. 그러니, 자연스레 포기하고 체념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꿈을 꾸며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지하도시에 깔린 안개처럼 탁해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나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진은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있었다. 재능을 과신하지 않는다고 말은 해왔지만, 자신이 가진 재능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지 나진은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지.’ 나진은 눈이 좋다. 관찰력이 좋으며, 타인의 표정 변화에 민감하며, 눈치 역시 빠르다. 그렇기에 나진은 줄곧 보아왔다. 자신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자신이 무언가를 할 때마다. 오펜과 이반이 놀라워하는 것을. 때로는 그 놀라움을 억지로 감추고선 대수롭지 않게 자신을 대하는 것을. 그 의도를 모를 만큼 나진은 멍청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전부 다. 자신의 재능이 이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강자인 이반과 오펜이 보기에도 자신의 재능이 비정상적이란 것도, 이반이 자신의 재능을 경계하며 성장 속도를 조절하려 하는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그저 모른 척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을 뿐. ‘그래봐야 어차피 올라가지 못할 테니까.’ 얼마나 빛나는 재능을 가졌던. 자신의 재능이 얼마나 거대하던. 자신은 결국 이 도시에서 썩어가야 할 테니까. 그렇기에 나진은 줄곧 체념해 왔다. 눈앞에 빛이 보여도 선의 너머에 있다면 붙잡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빛이었으니까. 체념하고. 포기하고. 잊고. 떨쳐내고. 그렇게 수없이 소년은 자신(自信)을 덜어냈다. 덜어내고 덜어냈지만 끝내 덜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별에 대한 갈망. 나진은 눈앞을 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놓지 못한 꿈이 있었다. 아서 일대기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아서왕의 상징과도 같은 성검 엑스칼리버. 별처럼 빛나는 검을 바라본 순간 나진은 직감했다. 이것마저 덜어낼 수는 없음을. ‘일이 어떻게 수틀리던 알 바 아니야.’ 소년은 오늘을 산다. 꿈을 꾸는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지금 이 순간 나진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지하도시의 어스름한 노을빛이 아닌 별과 같은 백금색으로. 이반이 자신에게 그어놓았던 선을 넘어서, 저 윗동네의 높으신 분들이 이 도시의 모두에게 그어둔 경계선을 넘어 나진은 검을 움켜쥐었다. 콱. 나진이 별의 검을 움켜쥔 순간. 엑스칼리버의 도신에 새겨진 열세 개의 별이 반짝였다. 별과 별이 이어지며 별자리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리곤, 구웅. 성검이 울기 시작했다. 수백 년 만에 울려 퍼지는 장엄한 검명(劍鳴)이 지하도시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다만 지하도시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곳에선 별이 보이지 않기에 알 수 없지만. 나진이 성검을 움켜쥔 순간 밤하늘의 천체가 뒤흔들렸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가장 거대한 별자리가 몸을 일으킨 까닭에. 3. 브리튼 제국의 넓은 초원. 게르드는 검을 휘두르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잠했던 밤하늘이 흔들리고 있었다. 격동하는 밤하늘. 그곳에 걸어놓은 자신의 별 일곱개가 뒤흔들림을 게르드는 느꼈다. 성좌가 되진 않았지만 별을 가진 검사. 제국제일검, 제국 유일의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노인은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검의 교단의 가장 높은 곳. 검을 손질하던 카론은 창문을 바라봤다. 그 너머에 드넓게 펼쳐진 밤하늘. 그곳에 걸어놓은 자신의 별 여섯개가 뒤흔들림을 느낀 그는 손질하던 검을 내려놓곤 창가에 다가갔다. 창문을 열고 바라본 격동하는 밤하늘의 중심에는 교단이 신봉하는 별자리가 있었다. 성좌, 선별의 검. 오랜 세월 침묵하던 별자리가 요동치고 있었다. 요동치는 별의 모습에 카론은 침음했다. 검의 교단의 주인, 검성(劍聖) 카론은 자신이 성검을 손에 넣을 기회를 놓쳤음을 직감했다. 성혈 교단의 처형장. 피로 물든 검을 늘어트린 채 술병을 기울이고 있던 유엘은 문득 하늘을 바라봤다. 그곳에 걸어놓은 자신의 별 여섯개가 흔들림을 느낀 까닭에. 마저 비운 술병을 탁, 하고 내려놓은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성혈(星血) 교단의 처형인, 유엘 라지안. 죽여야 할 인물이 하나 늘었단 사실에 살인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별의 시련, 선별에 도전할 만한 자격을 지녔던 이들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누군가 시련을 완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늘의 별을 연구하던 점성학자들과 별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천체학자들. 그들이 모인 회색탑은 때아닌 별자리들의 격동에 발칵 뒤집혔다. 거세게 요동치는 수많은 별자리들. 성좌들께서 이렇게 큰 움직임을 보이는 일이 없었기에 그들은 경악했으나······. 그 모든 움직임을 단 하나의 별이 만들어 내고 있단 사실에, 그들은 제 두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별이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가장 거대한 별. 열세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 선별의 검이 격동하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어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흔들리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들은 놀라워했고 또 누군가는 두려워했다. 하늘이 흔들린다. 별들이 요동친다. 저 깊은 땅 아래 지하도시에서 시작된 울림은, 지하도시를 넘어서 땅을 디디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리고 그보다 더 위인 밤하늘까지 전달됐다. 격동하는 밤하늘. 가장 거대한 별의 움직임에 휩쓸린 작은 별자리들은 비명을 질렀고,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킨 별자리들은 침묵했다. 침묵한 이들은 오래전 영웅의 시대에 별이 된 이들. 아서왕과 함께 대륙을 가로질렀던 이들이다. 그들은 깨달았다. 하나의 시대를 이끈 대영웅이 움직였음을. 그날, 아서에 의해 멈춰버렸던 시대의 흐름이 다시금 움직이려 함을 그들은 직감했다. 그리고. 또 어느 성좌는. 선별의 검과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별자리이자, 아서왕의 여정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으며, 엑스칼리버의 원본(原本)을 봉인한 별자리. 성좌, 선별의 지팡이. 호수의 마법사 멀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거하는 호수. 그 밑바닥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어야 할 엑스칼리버가 빛을 흩뿌리고 있었기에. 그것은 자그마치 수백 년 만에 나타난 변화였다. 수백 년 전, 여정의 끝에서 엑스칼리버는 주인과 함께 빛을 잃었다. 첫 번째 기사에 의해 호수에 반환된 뒤에 엑스칼리버가 빛을 내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엑스칼리버는 찬란한 별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멀린의 호수가 백금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곤, 번쩍. 엑스칼리버가 빛으로 변해 흩어졌다. 호수의 밑바닥에 봉인됐던 엑스칼리버의 원본을 포함해, 지상의 온갖 도시에 흩뿌려진 엑스칼리버의 복사본은 모조리 빛으로 변해 흩어졌다. 흩어진 빛들은 모여든다. 이제는 단 하나가 된 엑스칼리버를 향해서. 그 누구도 그 빛의 행렬을 볼 수는 없다. 설령 멀린이라 한들 마찬가지다. 그것을 눈에 담을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은 별의 시련을 통과한 어느 소년뿐이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 찰나의 순간 벌어진 변화.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멀린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기에, 멀린은 제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별의 시련을 누군가 완수했다. 수백 년 동안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던 성검이. 엑스칼리버가 제 주인을 선별(選別)했다.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왕의 다음을 이어갈 존재가. 그날 완결짓지 못한 아서 일대기의 다음 장을 써 내릴 존재가 나타나고야 만 것이다. 그것을 느낀 것은 멀린 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끝. 별이 추락하는 나락의 땅 캄란. 아서의 여정이 끝난 곳이자, 여정의 끝에서 아서가 스스로를 희생해 모든 것을 멈춰버린,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지 않는 땅의 존재들 역시 밤하늘의 뒤흔들림을 목격했다. 저주받은 용은 꿈틀거렸으며. 떨어진 것들의 마녀는 미소 지었고. 원탁의 배신자는 환희했으며. 머나먼 과거 추락한 별들은 분노했다. 지금 이 순간. 지하도시에 추락하고 만 모든 이들이. 그 위의 땅을 밟고 살아가는 숱한 강자들이. 그보다 더 위의 밤하늘에서 빛나는 초월자들이. 세상의 끝, 캄란의 저주받은 것들이. 그 모두가 가장 낮은 곳의 소년이 일으킨 변화에 주목했다. 소년이 일으킨 파문에, 소년이 가져올 변화에 주목했다. 카득! 검이 뽑혀져 나온다. 한 명의 소년에 의해서. 구웅, 구우우웅······. 검이 울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소년에 의해서. 울려 퍼지는 검명(劍鳴). 휘몰아치는 별빛. 별의 빛을 잊은 자들의 도시에 그 무엇보다 찬란한 별빛이 범람했다. 별빛의 파도가 지하도시 아트만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범람하는 별빛의 속에서 소년은 자세를 다 잡았다. 동화책에서 몇번이고 읽었던 문장, 그 문장을 떠올리며 나진은 아서왕과 같은 자세로 검을 쥐었다. 아서는 그 누구도 뽑지 못했던 검을 오직 한손으로 뽑아냈다.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검은 아서의 손이 닿은 순간 저절로 뽑혀 나왔다. 검이 아서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한 까닭이다. 나진 역시 마찬가지다. 나진이 검을 붙잡은 순간 엑스칼리버는 저절로 바위에서 밀려 나왔다. 백금색의 별빛을 끌며 뽑혀 나오는 성검은 소년을 선별(選別)했다. 스릉. 이윽고 엑스칼리버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백금색으로 빛나는 칼날. 열세개의 별로 장식된 도신. 아주 오래 전 빛을 잃었던 성검이 소년의 손에서 빛나고 있었다. 빛나는 검은 알린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멈춰있던 역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미완인 채로 다음 장이 쓰이기만을 기다리던 에 새로운 문장이 적히기 시작했다. 별의 검을 손에 쥔 소년의 이름은 나진. 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별을 향해 손을 뻗어온 소년은 끝내 별을 움켜쥐었다. 4. 밀려드는 중독자 무리를 베어 넘기며 갱도를 탈출한 이반은, 검을 휘두르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베어야 할 중독자들이 한가득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지하도시 아트만에 별이 떠올랐으니까. 아트만에 울려 퍼지는 장엄한 종소리. 범람하는 찬란한 별빛. 그것은 이 도시에 살아가는 이들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풍경이었다. “······.” 오펜도, 이반도, 그 둘을 상대하던 호르세조차도 그 누구 할 것 없이 침묵한 채 하늘을 바라봤다. 지하도시의 중심에서 터져 나와 하늘로 솟구치는 별빛이 그들의 눈동자를 비췄다. 그 누구도 그 빛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들이 윗동네에 놓고 온 꿈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별이 떠오름으로써 지하도시의 천장은 더는 천장이 아니게 됐다. 어두컴컴한 지하도시의 천장은 이제 드넓게 펼쳐진 밤하늘이었다. 밤하늘에 홀로 빛을 내는 별을 바라보며 이반은 헛웃음을 흘렸다. 별을 쫓는 기사, 이반. 한때 그렇게 불렸던 기사는 떠오른 별 앞에 환희했고, 또한 절망했다. 저 별빛을 누가 만들어낸지 알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반은 알고 있었으니까. “나진, 이 빌어먹을 애송아.” 이반이 신음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