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훌쩍 떠났다가 또 돌아오고, 돌아오기 무섭게 또 떠나네요. 얼굴 보기 정말 힘들다. 그쵸?” 캄브리아로 돌아온 나진이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은 툴툴거리는 디에타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나진을 힐끗 바라봤다. “내일 외륙으로 떠난다고 했죠?” “예, 그럴 생각입니다.” “좀 느긋하게 쉬다 가시지. 뭐가 그리 바쁘시대.” “바삐 움직이는 자가 더 많은 걸 가지고, 쉬지 않고 날갯짓하는 새가 높게 나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대요?” “지난번에 디에타가 빌려준 책에 나오더군요.” “책 빌려주지 말 걸 그랬네요.” 후우, 길게 한숨을 쉰 디에타가 나진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나진의 옷에 달린 휘장을 매만졌다. 오직 나진에게만 허락한 특별한 휘장이었다. 그녀와 계약한 용병이나, 상회의 고위 간부들이 달고 다니는 휘장에는 ‘금화를 삼키는 뱀’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나진의 휘장은 아니다. 나진의 휘장에는 샛노란 꽃이 새겨져 있었다. 금화(金貨)가 아닌 금화(金花). 오직 나진에게만 허락된 휘장. 나진을 특별취급하겠다는 증거요, 나진의 앞에서만큼은 그녀가 뱀이 아닌 소녀로 있겠단 뜻이기도 했다. 금색 꽃이 새겨진 휘장을 매만지며 소녀는 미소 지었다. “나진.” “예, 디에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말뿐인 걸로는 좀 모자라더라고요. 그래서 더 명확한 증거를 남길까 하는데.” 그녀가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달칵, 소리를 내며 연 상자에는 한 쌍의 반지가 담겨 있었다. 한 쌍의 반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는 나진의 눈동자가 조금이지만 흔들렸다. 이 사람, 설마 또? 다시 한번 기습을 허용한 나진이 당황하는 가운데 디에타가 짓궂게 웃었다. “설마 또 고백 공격이라도 하겠어요? 그런 의미 아니에요. 이거 아티팩트니까.” “아.” “뭐예요, 그 표정은? 설마 아쉬워요? 고백을 기대하셨어요? 못 할 것도 없는데. 나진, 저와······.” “에헤이.” 디에타가 쿡쿡대며 웃었다. 그녀가 반지 상자를 나진에게 건네며 말했다. “당신이 토벌했던 적룡과 백룡의 소재로 만든 거예요. 그거 알아요? 적룡과 백룡은 원래 한 마리의 용이었다는 거. 그래서 한쌍, 짝을 이룸, 연결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나 봐요.” 일종의 신비와도 같은 것. “그 성질을 살려서 만든 아티팩트에요. 이 반지를 끼고 있으면 서로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상대가 살아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다는 뜻이죠.” 디에타가 툴툴대며 말했다. “걱정돼서 그래요. 걱정돼서. 외륙에선 이쪽으로 편지를 보내기도, 연락하기도 힘들 텐데 그럼 당신이 찾아올 때까지 전 계속 기다리기만 해야 하잖아요? 당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그건······.” “그건 싫어요. 그러니 살아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알아야겠어요. 그 반지, 꼭 끼고 다니세요. 알았죠?” 그리 이야기하며 디에타가 나진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내밀며 디에타가 미소 지었다. “끼워주세요. 당신이 원하는 자리에.” 한 손은 나진에게 내민 채, 다른 한손으론 디에타가 제 머리칼을 귀 옆으로 쓸어 넘겼다. 밤이었고, 그녀의 집무실이었다. 창문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디에타의 머리칼이 반짝였다. 나진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춘 채로 디에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나진의 손이 닿은 순간 디에타가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에 나진은 미소를 지었다.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면 디에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금은 궁금했지만,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서는 건 디에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진은 디에타의 검지에 반지를 끼웠다. 왼손 검지. 우정, 친밀함의 상징. 제 손가락에 들어온 반지를 보며 디에타는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왕이면 약지에 끼워줬음 좋았을 테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뤄둬야겠네요. 지금은 이걸로 만족할게요.” 디에타가 제 검지 손가락에 맞춰 조여든 반지를 매만지며 고개를 까딱였다. 당신도 어서 껴보라는 뜻. 나진 역시 검지에 반지를 끼웠다. 백색 바탕에 붉은색 문양이 각인된 반지. 반지를 낀 나진의 손에 디에타가 손을 포갰다. 탁, 하고 반지가 맞부딪친 순간 반지에 새겨진 붉은 각인이 빛났다. 서로 연결됐다는 신호. 이윽고 반지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누군가와 손을 맞잡고 있는듯한 온기. “사실 품에만 지니고 있어도 될 거예요. 당신, 검사잖아요? 검을 휘두를 때 방해가 될 수도 있고. 전투 중에 손상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하고 디에타가 말했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지면 반지를 꽉 쥐어보세요. 저랑 손을 잡고 있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 들 테니까요.” 그녀가 나진의 손을 꽉 붙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나진의 손을 감쌌다. “어때요. 괜찮지 않나요?” “인상적인 선물이네요.” “그쵸? 사실 팬던트로 만들까 했는데, 반지 쪽이 좀 더 상징적이더라고요. 사실 좀 노렸어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별론가요?” 나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마음에 드네요.” 2. 나진이 캄브리아를 떠나는 날. 거리에는 수많은 모험가와 용병들로 가득했다. 그들 모두가 나진을 배웅하고자, 혹은 이 도시에서 전설을 써 내린 소년을 보고자 모여든 것이었다. 불과 1년. 모험가의 도시, 캄브리아에 발을 디디고 불과 1년만에 백각(白角)등급의 모험가가 된 소년. 최연소 소드 시커이자 쌍성 보유자이며 적룡을 상대로 용살(龍殺)의 신화를 이뤄낸 존재. 지금까지 캄브리아에서 배출한 최고의 인재가 대영웅 아서였다면, 그 뒤를 이을 인재로 저 소년이 지목되고 있었다. 1년만에 그만한 위업을 이루어냈으니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런 소년이 캄브리아를 떠나 더 큰 무대로 나아간다. 외륙, 세상의 바깥으로. 이 도시의 유명인이 도시를 떠나는 모습을 보고자 모여든 이들 사이로, 나진이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거리를 가득 메운 모험가들이 환호성을 쏟아냈다. 박수 소리가, 나진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진은 마차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느 귀족을 마주했다. 트레바체 가문의 주인. 에델마르 후작이 나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누구인가? 트레바체의 영원한 친구요, 현재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구애 1순위로 지목되고 있는 로맨티스트 아니신가.” “···예?” “음? 그대와 디에타 양이 주인공인 연극을 보러 온 영애들이 그대의 열렬한 팬이 됐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가? 그대 앞으로 구애의 편지가 제법 날아왔을 텐데.” 그런 게 있다고? 나진이 시선을 쓱 돌렸다. 나진에게 날아오는 편지를 모두 관리하는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인물은 참 공교롭게도 갈색의 머리칼과 샛노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 에델마르 후작의 옆에 서 있었다. “저는 모르는 일이네요···?” 그리 중얼거리며 디에타가 나진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 모습을 본 후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죄 많은 남자로군. 하긴, 그리 뛰어난 외모에 실력과 낭만까지 겸비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원래 잘난 남자는 무릇 숱한 레이디들의 마음을 훔치는 법 아니겠나?” 그리곤 나진에게 속삭였다. “조심하게. 버림받은 레이디의 칼날은, 소드 마스터의 칼날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법이니.” “······명심하겠습니다.” 뼈에 새길만한 충고였다. 그리 가볍게 잡담을 나눈 뒤 에델마르 후작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나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진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캄브리아 재단의 창립자이자, 캄브리아의 후원자인 나 트레바체의 주인. 나, 에델마르 트레바체는 이 자리에서 위대한 제국의 태양을 대신하여 선언한다.” 그가 나진을 향해, 어쩌면 이 도시의 모든 모험가를 향해 말했다. “그대가 보인 위업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그대가 한 자루의 검으로 새긴 공적은 이 도시의 가장 굳건한 비석에 새겨질 것이며,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다. 먼 과거 아서왕께서 그리하셨듯이.” 도시의 한가운데 새겨진 비석. 그 비석에는 캄브리아를 거쳐 간 이들이, 이 도시에서 세운 위업들이 빼곡히 기록돼 있다. 그곳에 나진의 이름과 나진의 이야기 역시 기록될 것이다. “이득을 좇는다. 금화를 탐한다. 하지만 모험가란 그뿐만인 존재가 아니지. 모험가란 금화를 탐할지언정 의리를 저버리지 않으며, 낭만을 아는 이들을 가리키는 단어다. 그대는 훌륭한 모험가였고 용병이었다.” 에델마르 후작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그대는 이제 영웅이 되려 한다. 머나먼 땅. 세상의 바깥. 외륙으로 향하는 그대의 길은 험난할 것이다. 영웅이 되는 길은 본디 그런 법이니. 시련과 역경이 가득할 것이며, 숱한 고난이 그대를 덮칠 것이다.” 하지만, 하고 후작은 미소 지었다. “긍지를 품은 채 나아가라. 명예를 좇아라. 이 도시에서 그대가 배웠을 낭만을 잊지 말라. 명예, 긍지, 그리고 낭만. 이 세 가지를 잊지 않는다면 그대의 길은 언제나 옳다. 옳은 길을 걸어라, 소년.” 후작이 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서라, 그리고 영웅이 되어라.” 나진이 후작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대의 앞길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빛나는 별을 얻어 성좌가 되기를 기원한다.” 그가 옆으로 한 걸음 빗겨 섰다. 그곳에는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고 있는 마차가 한 대 놓여 있었다. 외륙까지 멈추지 않고 향하는 마차. 나진은 후작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디에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찬사를.”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도시에 울려 퍼졌다. 기회의 도시에 찾아와, 기회를 붙잡아 제 이름을 알린 소년의 이름이 연호 됐다. 이 도시에 발을 디딜 때는 그 누구도 나진이란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이 도시를 떠날 때는 모두가 나진을 알았다. 나진. 여명성. 밤의 끝을 알리는 별. 찬사 속에서 나진은 마차에 올랐다. 외륙으로 향하는 마차가 나진을 태운 채 출발했다. 3. 마차가 나아가는 와중, 나진은 눈을 감았다. 제 내면에 집중했다. 나진의 심상. 지하도시의 풍경이 나진을 반겼다. 더욱 선명하고 넓어진 심상에는 이 심상에 첫 번째로 입주한 입주민이 나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입주민께선 집주인이 썩 달갑지 않은 모양인지 못마땅한 눈치로 나진을 흘겨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봅니까.” “아주 좋아죽더라. 응?” “예?” “반지 말야. 반지 받았다고 아주 어, 좋아 죽으려 하던데?” “또 무슨 소립니까. 그게.”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멀린의 말을 무시하며 나진은 그녀의 곁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래서 알려준다면서요? 외륙에 대해서.”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멀린이 입을 열었다. “외륙, 그중에서도 네가 지금 향하는 곳은 지난번보다 더 나아간 곳이야. 소위 ‘별들의 전장’ 이라 불리는 곳이지.” “성좌들이 거하는 곳입니까? 그때, 멀린이 처음 만났을 때 환상으로 보여준 거기.” “그래, 거기 맞아.” 멀린과 처음으로 마주했던 그날, 그녀가 나진에게 보여줬던 환상들. 나진이 앞으로 견뎌야 할 무게. 그 환상을 나진은 떠올리려 했지만,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딱. 멀린이 손가락을 튕기자 환상이 나진의 눈앞에 펼쳐졌으니까. 별들이 탄생하고, 별들이 저 너머로 저문다. 하늘에 자리 잡은 별들은 텃세를 부리고, 그들에게 농락당해 수많은 샛별이 땅 아래로 추락한다. 타락한 성좌들이 나진을 바라보고 거대한 존재감으로 나진을 찍어 눌러 바스러트리려 한다. 나진의 존재의 근간을 부정하려 드는 초월자들. 그러나, 그때와 달리 나진은 바스러지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을 받아넘길 뿐. 이젠 나진에게도 별이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에 무너지기엔 나진의 별이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환상은 깨졌다. 순식간에 환상을 깨고 나온 나진을 보며 멀린이 만족스레 웃었다. “네게 자격이 있다는 게 뭔지 알겠지?” “확실히.” “얼마 전에 그 소드마스터도 네게 말했지만, 외륙에서 가장 중요한 건 흔들리지 않는 거야. 너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지.” 그리고, 하고 멀린은 말했다. “별을 사용하는 방법이지.” 그녀가 손짓했다. 손끝에서 별빛이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