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들으라!” 리하르트 폴셴이 방패를 땅에 내려찍었다. 쿠웅, 하는 소리를 내며 땅이 흔들렸다. 용이 땅을 밟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울림은 토벌대가 뒤를 돌아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킨 리하르트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가락 끝으로 목적지를 가리키며 그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길을 열어라.” 전장에서의 지시는 언제나 담백하고 강하게. 과거 기사단장으로서 숱한 작전을 수행했던 리하르트다. 그의 목소리와 손짓에는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신성(新星)이 달릴 길을 열어라!” 리하르트의 바로 뒤에는 나진이 서 있다. 만신창이에 상처가 가득한 몸. 위태로워 보이지만 그 손에 붙들린 검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광채를 끌며 나진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 모습을 백각 모험가들은 보았다. 그 모습을, 기사단은 보았다. 오직 나진의 공격만이 적룡에게 유효하다. 이 상황을 뒤엎을 가능성을 가진 것은 저 소년이다. 나진이 적룡을 피 흘리게 만드는 것을 보았으므로,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쿵, 쿵, 쿵! 더 이상의 지시는 필요 없었다. 남은 것은 행동으로 증명할 뿐. 리하르트가 앞장서 달리기 시작했다. 묵직한 걸음을 내디디며 그는 적룡을 향해 돌진했다. 그 뒤를 따라 나진 역시 걸음을 내디뎠다. 『————————!』 적룡 역시 나진이 자신에게 위험이 된단 사실을, 나진의 검기가 위험하단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마당이다. 기어코 다시 일어나 자신에게 달려드는 나진을 향해 적룡이 고개를 돌렸다. 백각 모험가들이 제 비늘에 흠집을 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적룡은 아가리를 쩌억 벌린 채 나진을 향해 포효했다. 저 광채, 저 검에 맺힌 광채가 거슬렸다. 제 영혼에 각인된 악몽과도 같은 빛. 자신을 땅 아래로 떨어트리고 돌기둥 아래에 봉인시켰던 인간이 가지고 있던 빛. 공포와 분노를 동시에 느끼며 적룡은 들이마신 숨을 뱉어냈다. 브레스(Breath). 섬광과도 같은 화염이 방사형으로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앞장서 달리고 있던 리하르트가 방패를 땅에 내려찍었다. 크기만 2M에 이르는 레어메탈제 대방패 위로 푸른 마나가 넘실거렸다. 떠올리는 것은 굳건한 성벽. 그의 심상이 방패에 휘감긴 순간 리하르트는 하나의 벽이 됐다. 그의 뒤에 숨은 나진은 불길이 방패를 녹이지 못하고 양옆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뜨겁군!” 크게 외치며 리하르트가 웃었다. “하지만, 버틸만하다!” 그가 대방패를 앞으로 밀었다. 땅을 끌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방패의 끝이 녹아내리고 팔뚝에 화상이 번짐에도 그는 도리어 앞을 향해 나아갔다. 길을 뚫어주겠단 약속을 지키겠다는 듯이. 그렇게 리하르트가 여섯걸음을 내디뎠을 때 불길은 걷혔다. 열기가 남아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진 풍경을 리하르트가 가리켰다. 그가 달려라, 라고 외치는 것보다 먼저 나진은 리하르트를 넘어 달렸다. 뜨거운 땅을 밟으며 나진은 달렸다. 하지만 적룡의 몸부림은 끝나지 않았다. 다가오지 말라는 듯 적룡이 몸을 회전하며 꼬리를 휘둘렀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꼬리. 회피를 위해 몸을 움직이려던 나진은 이전과 같은 도약이 불가능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발목은 이미 한계였으니까. 달리는 게 고작이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면에서 받아내야 하나? 저 꼬리를 쳐낼 방법이 나진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민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투웅! 거궁의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와 함께 작살이 쏘아졌다. 기사단에 속한 마법사들이 땅을 변형시켰다. 그 모든 게 용의 꼬리가 다가오는 속도를 늦추었다. 아주 조금뿐이지만······. “그리젤!” “말 안 해도 안다.” “지금!” 그 시간 끌기는 유의미했다. 마법사들이 변형시킨 땅을 밟고 세 모험가가 뛰어올랐다. 한계까지 응축한 마나가 넘실대는 날붙이를, 세 모험가는 동시에 용의 꼬리를 향해 휘둘렀다. 쩌억! 바셴 코르테의 대검이, 그리젤 파라멜트의 할버드가 용의 꼬리를 후려쳤다. 그리고 그들의 마나가 실린 메아리를 로젤린이 휘둘렀다. 키이이이이이이잉! 굉음과 함께 용의 꼬리가 처음으로 뒤로 밀려났다. 균형을 잃은 용이 주춤거리는 순간, 나진은 이를 악물고 속도를 더 올렸다. 길은 열렸다. 빈틈이 보였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였다. 용의 아가리를 향해 나진은 질주했다. 2. 나진이 가리켰던 곳은 용의 아가리. 처음부터 나진의 목적지는 쩍 벌린 용의 아가리 속이었다. 그것은 범인(凡人)이 떠올릴만한 방법은 아니다. 용의 특성을 안다면 더더욱 떠올리지 못할 방법이었다. 그야, 용의 내면은 전혀 다른 세계였으므로. 용은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제 몸 안에 다른 세계를 품고 있으며, 용의 입은 그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리고 그 세계에 발을 디딘 자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육신이 바스러지고 영혼이 분해된다. 분해된 영혼은 용에게 흡수돼 그 일부가 된다. 그것이 용의 식사였고 용의 소화였다. 용에게 삼켜진 이는 용의 일부가 돼 영원히 살아가게 된다. 안식을 맞이하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불멸의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이 이야기를 멀린에게 들었을 때. 나진은 하나를 질문했었다. 용의 내면에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심상과도 같은 것 아니냐고. 그렇다면 그 심상에도 중심이 존재하지 않겠냐고. 나진의 추측을 멀린은 긍정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이렇게 답했었다. 용의 내면에 자리 잡은 세계에는 용의 근원이 존재하고, 그 근원을 부수면 용은 죽는다고. 하지만 보통 쓰지 않는 방법이며 역사상 그 방법을 성공한 놈은 한 명밖에 없다고 그녀는 말했다. -있어, 너랑 같은 방법을 떠올린 놈이. -용살자라고 불리던 멍청이가 그랬거든. 멀린의 말에 따르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멍청이. 그리고, 세간의 평가에 따르자면 가장 많은 용을 죽였으며 아서와 함께했던 대영웅. -최초의 검성, 지크프리트. 검의 교단을 세운 최초의 검성. 그가 악룡의 입안에 뛰어들어 용의 근원을 박살 낸 일화는 수많은 음유시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영웅담이 되어 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렇기에 나진이 용의 입을 가리켰을 때. 리하르트가 용의 입을 가리키며 길을 열라고 말했을 때. 나진이 무엇을 시도하려는 지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이 눈치챈 것이다. 미친 짓이라고, 자살행위라고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그들은 기꺼이 나진을 위해 길을 열어주었다. 확률은 희박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상황을 통째로 뒤집을 수 있는 수였으니까. 용살(龍殺)의 신화를 재현한다. 수많은 대영웅 중에서, 유일하게 아서를 쫓아 아서와 같은 목적지에 도달했던 검성. 그자가 이루어낸 위업에 나진은 도전할 생각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절대 쓰지 않을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 방법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죽는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나진은 도전하는 쪽을 선택했다. 나진이 적룡을 노려봤다. 마녀에 의해 붉게 물들었던 눈동자는 본디의 검은색을 되찾았으며, 그 눈동자는 나진이 피워올린 광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포효와 함께 용이 나진에게 달려들었다. 그 빛을 삼켜버리겠다는 듯이. ‘삼킬 수 있다면.’ 그리고, 나진 역시 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얼마든지 삼켜봐라.’ 나진의 검이 빛을 끌었다. 검에 휘감긴 별자리가 나진의 걸음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바라보는 곳은 용의 아가리. 쩌억 벌린 아가리의 안에 자리 잡은 심연을 향해 나진은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적룡의 혀를 베어내고, 그 이빨을 긁으며 나진은 용의 혀뿌리에 발을 내디뎠다. 그 너머에 자리 잡은 심연을 향해 나진은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본디 위업이란 생(生)을 등지고 사(死)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 이가 쟁취할 수 있는 것. 지금 이 순간 나진은 위업을 이루었다. 언제나 강적에 도전해 왔으며,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했고, 때로는 초월자의 불길을 받아냈으며, 지금은 완전해진 용을 피 흘리게 만든 데 그치지 않고 용의 입으로 뛰어든다는 도박 수를 던졌다. 물론 각자가 별이 되기엔 부족한 위업들이다.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위업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별의 편린에 불과한 것들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도전’이라는 주제로 묶인 순간. 크고 작은 위업들이 하나로 합쳐진 순간, 그것은 하늘이 주목할 만한 위업으로 탈바꿈한다. 한계를 극복하며 도전해 온 인간의 위업을 하늘은 인정한다. 하늘에 자리 잡은 나진만의 성역(星域)에 별이 떠올랐다. 신성(新星)이 탄생했다. 새로운 별이 밤하늘에 밝게 빛났다. 그토록 바라던 첫 번째 별을 손에 넣었음에도 나진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다 죽어가던 몸에 갑작스레 힘이 들어차 당황할 뿐이었다. 그 마저 탈진하기 전 마지막 발악 정도로 여기며 나진은 심연을 향해 몸을 던졌다. 눈앞의 도마뱀 새끼를 족치는 게 우선이다. 오직 그 생각만이 나진의 머리에 가득했으므로. 그렇게 심연의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나진을 반겼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불길에 휩싸인 적룡의 심상이자 세계. “멀린.” 그리고 나진은 외쳤다. “여기라면 문제 없죠?” -그걸 몰라서 물어? 멀린이 이 정신 나간 계획을 허락한 것. 그것은 나진이 가진 가장 거대한 변수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 별빛을 잠시나마 가릴 수 있는 장소. 바깥과는 완벽하게 격리된 전혀 다른 세계. 그렇기에, 나진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꺼내 보일 수 있는 장소. 멀린이 적룡의 세계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근원을 가리키며 외쳤다. -베어버려. 나진은 대답 대신 허공을 움켜쥐었다. 나진의 눈동자가 백금색으로 물들고 손목에 새겨진 별자리가 찬란히 빛났다. 용의 세계에 가득한 불길이 만들어낸 빛도, 열기도, 나진의 손에서 검의 형상을 이루는 별빛에 비할 바는 못됐다. 소년이 별의 검을 쥐었다. 별의 검, 엑스칼리버 위로 신비를 꿰뚫는 백금색의 검기가 찬란히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엑스칼리버의 검신에 새겨진 열세 개의 별 중, 첫 번째 별이 빛났다. 3. 적룡의 내면세계. 거센 불이 가득한 그곳의 중심에 놓인 것은 용의 근원이자 심장이었다. 저것을 꿰뚫는 순간 적룡은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나진은 동시에 깨달았다. 용의 내면세계에서, 용의 근원을 꿰뚫는 다는 것이 어째서 위업으로 칭송받는지. 이 방법을 성공한 것이 대영웅 지크프리트 뿐이었는지 말이다. 치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육신이 타들어 갔다. 피부에 불이 달라붙었다. 거대한 압력이 몸을 쥐어짰다. 이곳은 적룡만을 위한 세계였고, 당연히 외부인의 출입을 거부했다. 용의 소화가 시작된 것이다. 타들어 간다. 몸의 수분이 증발한다. 영혼이 압력을 이기지 못해 비명을 내지른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고통이 엄습했다. 한껏 혹사시켜 이미 한계에 도달한 육체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까드드득. 나진이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눈에서 피가 흘렀다. 흐르는 피마저 증발하는 가운데, 나진은 손에 쥔 엑스칼리버를 강하게 움켜 쥐었다. 엑스칼리버의 회복력에 의지한 채 나진은 용의 근원에 다가갔다. 소화 시킬 수 있으면. 날 삼킬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삼켜봐라. 네가 나를 소화시키는 것과, 내가 네 심장을 꿰뚫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빠른지 겨루어보자. 콱! 눈을 부릅뜬 채 나진이 용의 심장에 엑스칼리버를 박아 넣었다. 충분히 힘이 실리지 않았기에 일격에 용의 심장을 양단하진 못했다. 하지만, 나진도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한 번으로 안 된다면 열 번. 열 번으로 안 된다면 백 번이고 찍어주마. 엑스칼리버에 휘감긴 백금색 검기가 불길을 밀어내며 빛을 흩뿌렸다. 그리고, 자신이 선별(選別)한 주인의 의지에 답하듯 엑스칼리버의 검신에 새겨진 첫 번째 별이 빛났다. 별을 손에 넣음으로써 소년은 자격을 증명했다. 해방된 첫 번째 권능이 엑스칼리버를 휘감았다. * * * 회색탑주, 나유타는 신음했다. 난데없이 마녀의 별자리로 하여금 하늘이 뒤엉켰다. 별자리들이 혼란에 휩싸여 요동치고 성역과 성역이 맞부딪치며 하늘이 엉망이 됐다. “쿨럭, 컥, 커흡······.” 별을 헤아리는 주문을 끄지 않은 채, 마녀의 별자리를 바라본 탓에 나유타는 피를 토해야만 했다. 눈가를 타고 흐르는 핏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포션을 털어 넣으며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대사건이다. 역사적인 대사건이 일어났다. 얼마 전에는 엑스칼리버가 뽑히면서 하늘이 발칵 뒤집히질 않나, 아서의 별자리와 멀린의 별자리가 요동치질 않나, 이번엔 마녀의 별자리까지? 어째 역사적인 대사건이 끊이질 않는 느낌이었다. ‘염병, 시프리아한테 뺑이 친다고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네······.’ 회색탑주 자리는 꿀 빠는 자리가 아니었단 말인가. 뭔 역사적인 대사건이 몇개월 단위로 일어난단 말인가. 신음하면서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어찌 됐든 일은 해야 했으니까. 뒤엉킨 하늘을 다시 관측해야 했고, 마녀의 별자리가 만들어 낸 변화가 있다면 빠짐없이 보고해야 했다. 이번만큼은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 그렇게 한참 동안 별을 바라보다가. 나유타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저건?” 그녀의 시선은 하늘의 한구석에 걸려있는 별을 향해 있었다. 저기에 저런 별이 있었나? 요동치는 별자리들에 떠밀려 밀려난 별인가? 아니, 저런 별은 없었던 것 같은데······. 관측을 위한 주문을 그녀가 하나둘 시전했다. 주문으로 눈동자를 강화하고, 하늘의 흐름을 분석하며 그녀가 다시금 별을 바라봤다. 신성(新星)이었다. 여태껏 없던 별이 갑작스레 나타났다. 가끔씩 이렇게 새로운 별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긴 하나, 이번 별은 무언가 이상했다. 나유타는 위화감을 느꼈다. 너무나도 밝게 빛나는 별. 그리고, 그 별의 곁에 새로운 별빛이 뭉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