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세도, 나도, 이용당했을 뿐이란 사실을!”
 
크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나진은 주점 앞에 모여있는 조직원들을 밀쳐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비켜봐요.”
 
“악! 누구··· 나진?”
 
나진은 아놀드에게 달려드는 조직원의 뒷목을 붙잡아 뒤로 잡아당겼다. 나진이 가장 앞으로 나서자 남은 조직원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잠깐의 정적.
 
숨을 몰아쉰 아놀드가 나진을 바라봤다.
 
“너는 누구지?”
 
“나진. 이반의 대리인입니다.”
 
나진이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툭, 건드렸다.
 
이반의 상징과도 같은 검이었다.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이반을 데려···.”
 
“말 같은 소리를. 당신네 같으면 대뜸 찾아온 적대 조직 간부랑 보스를 만나게 해줄 것 같습니까?”
 
나진이 표정을 콱 구겼다.
 
“지금 이것도 많이 봐주는 겁니다. 사정이 있어 보이니까요. 그러니까, 규정대로 팔 하나 자르기 전에 할 말 있으면 하십쇼. 십초 드립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칼이 뽑혀 나왔다. 검을 움켜쥔 나진이 칼끝으로 아놀드를 겨눴다.
 
“그 안에 말 안 하면 자릅니다.”
 
“건방진 애새끼가···.”
 
“건방진 게 누군데 지금. 아쉬운 게 있으니까 여기서 깽판 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나진이 짧게 숨을 뱉었다.
 
“말하던가 팔 한 짝 내놓던가.”
 
까득. 아놀드가 이를 갈았다.
 
십, 구, 팔··· 나진이 소리 내 세던 숫자가 셋 아래로 줄어들었을 때 그제야 아놀드가 입을 열었다.
 
“···호르세가 아니다.”
 
“뭐라고요?”
 
“너희한테 싸움을 걸어온 건 호르세가 아니다. 우린 그 미치광이한테 이용당했을 뿐이야.”
 
아놀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와중.
 
아놀드를 둘러싸고 있던 조직원들이 몸을 짧게 떨었다. 나진 또한 숨을 헛삼켰다. 눈을 크게 뜬 채 나진은 아놀드를 바라봤다.
 
후두둑. 무언가 떨어졌다
 
떨어진 것은 검붉은 피였다.
 
핏발이 선 아놀드의 눈동자에서, 입에서, 귀에서, 코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말을 이으려던 아놀드는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봤다. 제 발밑에 고여가는 피와 붉게 물드는 시야를 확인한 그가 웃었다.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어이 애송이.”
 
나진을 바라보며 아놀드가 말했다.
 
“당장 이반에게 전해라.”
 
울컥.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그가 유언했다.
 
“약쟁이 하칸이 움직였다고.”
 
나진이 눈을 부릅떴다.
 
2.
 
갱도와 연결된 호르세의 거처.
 
십년 전, 내전 당시 호르세가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지하 갱도. 그곳에 잠입한 이반과 오펜은 기척을 죽인 채 갱도의 깊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볼 땐 그 새낀 땅거미가 아니라 두더지 아니면 개미야. 뭔 굴을 이렇게 깊게 파놔?”
 
“목소리 줄여라. 기껏 잠입했는데 들킬 일 있냐?”
 
“기척도 안 느껴지는구먼. 뭘.”
 
이반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펜도 그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입구 쪽에야 인원이 꽤 배치돼 있었지만 정작 깊은 곳으로 들어오니 인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쥐 죽은 듯 조용한 갱도.
 
이 분위기에 이반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나치리만치 갱도가 조용했으니까. 조용한 것 뿐이라면 몰라도, 길이 너무 뻥 뚫려있었다. 흔하디 흔한 함정 하나 설치돼 있지 않았다.
 
‘너무 쉽다. 수상할 정도로.’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내전 당시, 이반은 이 갱도를 뚫으려다가 결국 실패했었다. 발을 내디디는 곳마다 함정이 깔려 있었고, 어둠 속에선 호르세의 화살이 날아와 댔으니까.
 
땅거미 호르세는 레인저였고, 궁지에 몰린 레인저는 어디까지고 성가셔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결국 호르세를 마무리 짓는 것을 포기하고 내전을 끝마치지 않았던가. 물론 지금이야 오펜과 함께라면 갱도를 뚫을 수 있으리란 확신을 가지고 들어온 거긴 하지만······.
 
‘이건 이상하다.’
 
이반이 눈살을 찌푸렸다.
 
슬슬 이 갱도 자체가 함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무렵, 인기척이 느껴졌다. 갱도의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이반이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짧은 시선 교환.
 
직후 이반과 오펜이 땅을 박차고 달렸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가장 깊은 곳을 향해 두 사람은 질주했다. 갱도의 끝자락에 놓인 나무 문. 오펜보다 한발 앞서 문 앞에 도달한 이반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콰앙!
 
오히려 한 번 더 힘을 주어 내디디며 가속이 붙은 검을 휘둘렀다. 검에 맺힌 검기가 나무 문을 통째로 우그러트렸다. 문을 박살 내며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선 이반이 시야 확보를 위해 눈을 크게 떴다.
 
문을 부수고 들어서자 나타난 것은 넓은 공간.
 
거대한 돔 형태의 공동이었다.
 
개미굴처럼 이리저리 뻗어있는 갱도가 교차하는 곳. 광석을 운반하기 위한 철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다른 길목으로 향하는 구멍이 사방에 뚫려있는 것을 확인한 이반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공간이 있었나?’
 
내전 당시에 갱도에 발을 디뎠을 때 이런 공간은 못 봤던 것 같은데. 이래서야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뚫려있는 길만해도 수십 개인데 저걸 일일이 뒤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순간이다.
 
투둑.
 
작은 돌조각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이반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휙 돌아갔다. 철로가 끊겨 올라갈 수 없는 위쪽 길. 그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허.”
 
이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찾을 수고를 덜었구만. 뭐냐, 땅거미? 마중 나왔냐?”
 
땅거미 호르세.
 
모습을 드러낸 그는 한손에는 석궁을 움켜쥔 채,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이반.”
 
“그러게 말이다. 눈에 띄면 잡아 죽여버리려 했는데, 잘도 피해 다니더라고.”
 
이반이 히죽였다.
 
그가 칼을 고쳐 쥐며 오펜에게 손짓했다. 호르세가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움직일 준비를 하라는 듯이.
 
“그래서 뭔 깡이냐?”
 
파스슷.
 
이반의 검 위로 검기가 솟아 올랐다.
 
“내 간격 안으로 들어오고. 자신 있나 봐?”
 
이반은 소드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기사다. 그런 이반에게 있어 지금 자신과 호르세 사이에 놓인 간극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두 번의 도약으로 좁힐 수 있는 거리.
 
어째서, 호르세는 모습을 드러냈는가.
 
호르세는 레인저다. 결코 기사와의 근접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다. 하물며 지금처럼 소드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검사가 둘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숨겨둔 수라도 있나?’
 
하지만 이 거리에선 의미 없을 텐데.
 
수작질을 하기도 전에 목을 떨어트릴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이반이 숨을 내뱉으며 땅을 박차려는 순간이다.
 
“자신 없지.”
 
호르세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반, 난 너와 싸우고 싶진 않아. 아직도 네가 새긴 흉터가 욱신거리거든. 내가 왜 지난 십년간 몸을 숨기고 살았겠어?”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광석등의 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호르세가 빠져나왔다.
 
“하지만 어쩌겠나.”
 
광석등의 빛이 닿는 곳.
 
어스름한 광석등의 빛이 호르세의 얼굴을 비추었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호르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더 자세히 보라는 듯 깊게 눌러썼던 후드를 벗었다.
 
“살려면 널 꾀어내야 했는걸.”
 
흉측하게 일그러진 절반의 얼굴. 실명이라도 한 듯 초점을 잃고 탁하게 물든 한쪽 눈동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호르세의 입가가 경련했다. 그것은 약에 취한 약쟁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너···.”
 
이반이 뭐라 말을 하는 것보다 먼저.
 
“그 미치광이한테 살아남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거든.”
 
호르세가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그가 겨냥한 것은 이반이 아니었다. 화살이 향한 곳은 돔 형태의 공동의 천장. 그곳에 매달려 있는 무언가를 호르세는 화살로 맞혔다.
 
찌르르르르르···.
 
공동에 울려 퍼지는 기이한 소음.
 
그 소음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호르세가 뭔가 수작을 부린 건 확실했다. 이반이 땅을 박차며 호르세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이반이 걸음을 멈췄다. 걸음을 멈춘 채 이반은 사방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헛웃음을 흘렸다. 공동에서 사방으로 뻗어있는 길. 수십 개의 통로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둘이 아니었다.
 
수십도 아니었다.
 
불규칙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통로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으며 벌어진 입에선 침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약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저건 또 뭔···.”
 
이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손에는 날붙이가 쥐어져 있었지만, 수만 많을 뿐 썩 위협적이진 않았다. 약에 취해 굼뜨고 느릿느릿한 움직임이었으니까.
 
‘의도가 뭐지?’
 
그 수를 어림잡아 세보던 이반이 시선을 돌려 호르세를 바라봤다. 호르세는 쓰게 웃고 있었다.
 
“너나 나나 놀아났을 뿐이다. 이반.”
 
주어진 상황과 정보.
 
그것을 토대로 이반은 상황을 판단한다. 판단함으로써 그는 이해했다. 이곳 자체가 함정이었단 사실을. 호르세와, 호르세가 일으키려는 것처럼 보이던 내전 자체가 누군가 던진 미끼였단 사실을.
 
‘무엇을 위한 미끼인가?’
 
답은 금방 나왔다.
 
자신과 오펜을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그렇다면 이 일을 꾸민 것은 누구인가? 사방에서 진동하는 약품의 악취가 정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하 도시의 세 지배자 중 하나.
 
내전에도, 잦은 세력 다툼에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던 매립지의 지배자.
 
“···약쟁이 하칸.”
 
매립지의 연금술사가 개입했다.
 
그러나 이반은 어째서 하칸이 자신을 이곳으로 꾀어내려 했는지 알지 못한다. 약쟁이에 대한 정보가 충분치 않으며, 그가 연금술사라는 족속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반.”
 
그것은 오펜도 마찬가지다.
 
오펜 역시 약쟁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오펜은 연금술사가 어떤 족속인지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용병단의 단장을 맡았던 시절, 빌어먹을 연금술사들의 의뢰를 몇번이고 수행해 봤으므로.
 
달리 말하자면.
 
“비켜라.”
 
오펜은 연금술사가 ‘어떤 식’으로 인간을 써먹는지 잘 알고 있다. 검을 휘두르려는 이반을 밀치며 오펜이 앞으로 나섰다. 선두에서 다가오는 놈을 오펜은 발로 걷어찼다.
 
걷어차여 밀려난 놈이 짧게 경련하기를 잠시.
 
놈의 몸이 크게 부풀었다가, 펑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위로 치솟았다가 비처럼 쏟아지는 피와 살점을 맞으며 오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를 쏟으며 몸을 떠는 놈들을 조심해라.”
 
오펜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 살아있는 폭탄이니까.”
 
3.
 
나진이 눈을 부릅떴다.
 
“약쟁이 하칸이 움직였다고.”
 
아놀드가 던진 말의 뜻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부릅뜬 나진의 눈동자가 본 것은 아놀드를 중심으로 팽창하는 흐름이다.
 
팽창하는 흐름. 피를 게워 내는 아놀드.
 
아놀드를 중심으로 옅게 떨리는 땅.
 
그리고, 죽음을 직감한 듯한 아놀드의 표정.
 
눈동자를 통해 얻어낸 네 가지의 정보.
 
그 순간 나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한 줄의 문장이다. 전투 중에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진이 의지해 온 것이다.
 
직감, 그런 식으로 나진은 이해하고 있는 것.
 
하지만 이는 직감과 같은 모호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진이 가진 재능은 보는 것. 이는 그 재능의 연장선이다. 봄으로서 얻어낸 정보를 토대로 즉각적으로 판단을 내린 것이다.
 
타고난 재능. 그리고 실전에서 기른 전투 감각. 그 두 가지가 맞물려 만들어 낸 한시적인 미래시.
 
쾅!
 
그리고, 이를 의심치 않고 곧장 실행으로 옮기는 판단력을 나진은 갖추고 있다. 땅을 박차고 달려든 나진이 피를 게워 내는 아놀드를 발로 걷어찼다.
 
쩌억, 소리를 내며 복부에 꽂히는 발차기.
 
발이 아놀드의 복부에 닿는 순간 굽혔던 무릎을 나진은 쭉 뻗었다. 밀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발차기. 충격에 떠밀린 아놀드가 건물과 건물 사이에 놓인 골목길에 처박혔다.
 
“당장!”
 
직후, 나진이 뒤를 돌아 달리며 소리쳤다.
 
“모두 물러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조직원들의 모습에 나진이 표정을 콱 구겼다. 골목길 가까이에 있던 조직원의 목덜미를 잡아끌며 나진이 몸을 던졌다.
 
직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골목길에 처박혔던 아놀드의 몸이 폭발했다. 폭발의 여파에 떠밀려 엎어진 조직원들과, 눈앞에서 사람이 터지는 모습을 목격한 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에 주변은 한순간에 요란스러워졌다.
 
도망치는 조직원과 비명을 지르는 일반인.
 
그들이 만들어 내는 혼란 속에서 나진이 이를 악물었다. 약쟁이가 움직였다, 라고 호르세 조직의 간부는 말했다. 그리고 그제야 나진은 자신이 조금 전 느꼈던 악취의 정체를 깨달았다.
 
언젠가 이반의 영역에 마약을 풀려던 중독자 놈을 잡아 족쳤을 때 맡아본 적이 있는 악취.
 
환각제와 온갖 화학적인 약품이 뒤섞여 만들어 내는 코를 찌를듯한 악취. 그것이 아놀드가 폭발한 골목길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진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똑같은 악취를 맡았었다.
 
탁.
 
나진이 땅을 박차고 달렸다.
 
자신이 달려왔던 길을 되짚으며 달리다 보니, 악취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휙, 고개를 돌린 나진의 시선이 향한 곳은 철창으로 잠겨있는 골목길이다.
 
‘저긴.’
 
하수와 오물, 쓰레기 따위를 지하도시의 매립지로 흘려보내는 곳.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진은 보았다.
 
콱.
 
철창의 안쪽에서 창살을 움켜쥐고 있는 손아귀를. 그 손아귀가 경련하는 것을. 부풀어 오르던 손아귀가 임계점에 이르러 폭발하는 모습을.
 
콰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철창이 우그러졌다.
 
어둠이 짙게 깔린 철창의 너머. 악취가 진동하는 그곳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조금 전 폭발한 인간의 핏물을 뒤집어쓴 여인.
 
그녀와 나진이 눈을 마주쳤다.
 
시선을 마주친 순간 나진은 온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섬을 느꼈다. 얼마 전 이반과의 대련에서도 느꼈던 것.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른 강자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과도 같은 것.
 
그것이.
 
제 앞에 서 있는 여인이 누구인지 나진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나진이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카각, 소리를 내며 검집을 박살낼 기세로 뽑혀 나온 검을 움켜쥔 채 나진이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이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감이 좋네.”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찌르르르르, 하고 마치 벌레가 우는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메아리치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나진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지만.
 
소리가 울려 퍼진 직후 여인의 너머에서 느껴지는 수십의 인기척,  지하도시의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이 저 소리와 모종의 관계가 있음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저 여자의 정체 또한.
 
“약쟁이.”
 
여자의 물음에 나진이 답했다.
 
“약쟁이 하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