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과 금색이 공존하는 검기. 두 가지 색을 섞으려면 섞을 수 있었지만, 나진은 의도적으로 색을 분리해서 펼쳐 보였다. 백금색의 검기를 내보인 순간 최소한의 변명을 입에 담을 여지조차 사라질 테니까. ‘백색으로 통일할 수도 있지만···.’ 그래선 검기의 형태가 흔들릴 것이다. 물론 그 흔들림은 미세하여 대부분의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지금 나진은 소드 마스터 셋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 검이란 무구에 통달한 초월자. 인간을 까마득히 넘어선 감각을 지닌 그들은, 나진의 검기에 발생한 미세한 흔들림조차 꿰뚫어 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곧장 눈치채겠지. 아, 이놈이 힘을 숨기고 있노라고. 황제가 ‘네 가치를 증명해 보아라.’ 하고 외쳤는데 그 앞에서 힘을 숨기는 기만을 했다간 문답 무용으로 처형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진은 검기의 형태가 흔들리지 않는 선에서 색의 분리를 선택했다. ‘그래도 아서왕의 검기를 닮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지만요.’ -꼭 그렇지만도 않을걸? 멀린이 말했다. -아서의 상징은 백금색의 검기. 하지만 금색과 백색의 검기가 역사상 없던 건 아냐. 두 개를 동시에 가진 사람은 없었지만······ 아무튼. 그녀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네 검기의 형태, 아서의 검기와는 달라. -이건 내가 보증해. 가장 가까이에서 아서의 검기를 보았던 내가 확신할 수 있어. 본질적인 부분에서 다르거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금색이라는 특징적인 색에 시선을 빼앗겨서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검기를 뽑아낸 시점부터 나진은 멀린이 제 곁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는 착각이 아니었다. 흐릿하게나마 멀린의 모습이 나진의 눈에는 보였으니까.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르며 변한 것. 오직 나진의 눈에만 보이는 멀린의 모습. 그녀가 손가락을 뻗어 황제를 가리켰다. 눈을 부릅뜬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제국의 태양. 그자를 가리키며 멀린은 말을 이었다. -저곳에 앉아있는 황제는 달라. -아서와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 한들, 아서가 직접 선택한 현왕(賢王)의 핏줄이니까. 그 총명했던 현왕의 피가 옅어지고. 세월의 흐름에 고여 썩어 문드러지지 않았다면. -알아보겠지. 통치자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만물을 꿰뚫어 보는 안목이니까. 만약 알아보지 못한다면? 아서의 후예가 나타났다며 두려워하고 이쪽을 억압하려 한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멀린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코웃음 쳤다. -그때는 돌려받아야지. 무엇을? -팬드래곤의 이름과 브리튼을. 2. 브리튼 제국의 황제. 제국의 태양, 엘드윈 팬드래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상황에 따라 과장된 행동을 연출하는 것이 황제의 일상이라곤 하나, 이번 경우에 한해서는 연출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놀란 나머지 몸이 저절로 움직인 것이다. ‘백금색의 검기!’ 아니, 아니다. 정확하겐 백색과 금색이 공존하는 검기다. 하지만 소년이 그려낸 검기는 별자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백금색을 닮았으며. 별자리의 형태를 가진 검기. 누가 보아도 저 밤하늘의 별을 연상케 할 검기이며, 별을 연상케 하는 검기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검기를 가졌던 것은 역사상 단 한 명밖에 없었으므로. ‘브리튼의 진정한 주인, 대영웅 아서.’ 소년이 피워낸 검기는 그분의 것을 닮아 있었다. 일천년의 시간을 건너뛰어선, 이 자리에 그분의 진정한 후예가 나타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황제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고 그 눈동자가 흔들리려는 순간이다. 쿵, 하는 한 번의 박동과 함께. 황제의 심장이 한순간에 차가워졌다. “······.” 어느새 황제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놀란 나머지 몸이 먼저 움직였지만, 그는 빠르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찬물을 들이붓고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상황을 판단했다. 어렸을 때부터 길러온 버릇이었다. 만인지상의 황제는 결코 당황해서도, 흥분해서도 안 되는 법이라고 선왕들께서 말씀하셨으니. 호흡을 가다듬은 엘드윈은 차분히 나진의 검기를 관찰했다.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 때 엘드윈은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색에 눈을 빼앗긴다면 닮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근간을 들여다보면······.’ 다르다. 역사상에 기록된 아서의 검기와는 명백히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다. 황실 대대로 내려오는 아티팩트에 새겨진 아서의 검기는 저것과는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저 소년의 검기는 별자리이지만. 아서의 검기는 다만 별이었으므로. 위대하신 그분의 검기는 단 하나의 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차게 빛나는 백금색의 별. 하나이자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이자 하나인 것. 그에 비해 저 소년의 검기는 하나를 상징하진 않았다. ‘하지만.’ 닮았단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저 소년의 검기를 보거든 세상은 가장 먼저 아서왕을 떠올리고 말 것이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검기를 거두어도 좋다.” 나진이 납검했다. 칼집에 검을 밀어 넣고 나진이 도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완벽한 기사의 예법이었다. 기사도 아닌 이가 기사의 예법을 취했다고 나무랄 만큼 속 좁은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황제는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최연소 소드 시커가 나타났단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제국에 보물이 제 발로 굴러들어 왔구나, 하고 손뼉을 쳤지만 정작 까고 보니 이게 무엇인가. ‘18세. 최연소 소드 시커. 활동 기간은 반년. 아서왕을 연상케 하는 검기의 소유.’ 반년이라. 황제의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것참 우연하게도 반년이로군.’ 반년 전 하늘과 땅을 가리지 않고 온 세상을 뒤흔드는 대사건이 일어났었다. 선별(選別)의 시련을 누군가 완수했다는 역사적인 대사건. 반년 전 엑스칼리버는 뽑혔다. 정체 모를 누군가에 의해서. 내륙의 소드 마스터 셋 중 하나가 엑스칼리버를 뽑았고, 제국이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세간은 떠들어댔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제국은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엑스칼리버의 소유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단지 ‘알아낸 것’처럼 연기하고 있었을 뿐. 이는 오직 제국의 황제와, 그 최측근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눈앞의 소년을 바라봤다. 18세에 최연소 소드 시커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세웠으며, 반년 전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아서왕과 닮은 검기를 가진 인물. 정말 우연하게도 모든 것이 겹치는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합리적인 의심을 품을 만 하다. 저 소년이 엑스칼리버의 주인이 아닌가? 하고. 이는 황제 혼자만이 품을 의심이 아니다. 숱한 이들의 머릿속에서도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겠지. 물론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고 물증은 없다. ‘어떠한 성좌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백금탑주의 정밀 검사에도 엑스칼리버와 연관된 점은 없었다.’ 하지만 때로는 심증만으로도 충분하다. 황제의 입장으로 보자면 저 소년은 무척이나 위험한 존재다. 제국의 보물인 줄 알았더니 화약을 담뿍 담은 폭탄이지 아니한가. 경우에 따라 황제를 능가하는 정통성을 가질 수도 있는 존재다. 그 정통성에 물증이 없다 한들, 심증만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명분이다. 만에 하나 반역도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황권을 위협할 존재가 될 수도 있는 소년이다. 제대로 된 기반이 없으며. 출신은 불명하고.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지도 않은 인물. 신뢰할 요소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거대한 분란의 씨앗이 될 요소가 한가득한 인물이다. 여기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은, 저 소년에게 목줄을 채우거나 이 자리에서 죽여 없애는 것이다. 왕국의 주인, 혹은 연합국의 주인이라면 분명 그리 판단하고 망설임 없이 행하겠지. 그게 통치자로서 옳은 판단이니. 하지만. 브리튼 제국의 황제로서는 명백한 오답이다. “······.” 황제가 자리에 앉았다. 턱을 괸 채 나진을 바라봤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정보가 조합되고 선택지를 지워나가고 있으나, 현실에선 고작 몇 초의 시간조차 지나지 않았다. 제국의 황제, 엘드윈 팬드래곤은 떠올린다. 브리튼의 황제들에게··· 팬드래곤의 이름을 물려받은 이들에게 내려지는 현왕(賢王)의 유언을. 『나는 그분에게 이름을 빌렸을 뿐이다.』 『잠시 그분의 부탁을 받아 브리튼을 맡아두었을 뿐, 나는 브리튼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다.』 『브리튼 제국의 주인은 오직 그분뿐이니.』 초대 황제, 아서 팬드래곤. 그 위대한 기사왕에게 팬드래곤의 이름과 함께 제국을 물려받았던 두 번째 황제, 현왕이라 불리던 그는 제 혈육에게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은 제국의 중심에 새겨져 천년이 넘게 이어져 왔다. 『위대하신 아서 팬드래곤.』 『그분의 이름을 결코 더럽혀선 안 된다. 공명하라. 정대하라. 선해라. 명예를 알라. 긍지 높게 살아라. 비록 피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우리는 대영웅의 후예다. 그 사실을 망각하지 말라.』 『이를 망각하거든.』 『원탁이 모든 자격을 박탈하리라.』 계약이었고 맹약이었으며 경고였다. 팬드래곤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하는 순간, 저 하늘 위의 원탁이 직접 제국에 개입해 모든 것을 박탈한다는 경고. 그렇기에 제국의 황제는 언제나 선해야 했고 공명정대해야만 했다. 황권이란 언제든 저 하늘 위의 별에 의해 빼앗길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스스로를 갈고 닦고.’ 명예와 긍지를 망각하지 마라. 그게 팬드래곤의 이름을 이어받은 자의 숙명이다. 유년기부터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어온 외침을 떠올린 엘드윈은 쓰게 웃었다. 정말이지 황제 해 먹기 더럽게 어렵군. “그대, 고개를 들라.” 무릎을 꿇은 채 나진이 고개를 들었다. 엘드윈은 나진과 시선을 마주했다. 노을빛 눈동자를 마주하게 된 순간, 황제는 마치 그 시선에 꿰뚫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존재가 그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범인(凡人)의 눈동자가 아니다.’ 하기야, 18살에 소드 시커에 이른 놈을 세상 그 누가 평범한 인간이라 부르겠냐마는. “본인은 아직 그대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한낱 글줄로 이름을 읽었을 뿐. 이름을 말해라.” “나진입니다.” “그래, 나진. 본인은 지금 무척 고뇌하고 있음을 그대에게 밝힌다.” 황제가 쓰게 웃었다. “그대의 검기는 위대하신 아서왕의 검기와 닮아있다. 그 근간은 다를지언정, 아서왕을 연상케 하기엔 충분하지. 그대도 이를 모르진 않을 거야..” 황제의 말에 소드 마스터들이 숨을 헛삼켰다. 그들 역시 같은 생각을 했으나,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다른 문제였으니까. 황제의 앞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간 몹시도 복잡한 문제로 번지고 만다. 그러나, 그 사실을 황제가 먼저 입에 담았다. “그대가 특정한 가문, 혹은 특정한 집단에 속한다면 그들에겐 명분이 생긴다. 위험이 생겨. 물론 지금의 제국은 평온하며 분란과는 거리가 멀지. 선왕들께서 수고해 주신 덕분이지 아니한가.” 황제가 미소 지었다. “하지만 반란의 불길이란, 분란이란,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지. 그리고 본인이 보기에 그대는 불길이다. 제국을 불태울지도 모를 불길.” 저 소년이 엑스칼리버를 가졌던, 가지지 않았던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미 아서와 너무나도 유사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니. “그러니.” 황제가 나진을 바라봤다. “나를 설득해 보아라. 내가 그대를 불길로 여기지 않을 이유를 이야기해 보란 뜻이다.” 3. 본래대로라면, 나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진은 황실에 속한 기사가 되어야만 했다. 그것이 황제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일 테니까. 허나 황제는 기회를 주었다. 자신을 설득해 보라고 말한 것이다. 그 사실을 나진이라고 모를 리는 없다. 나진의 귓가에 멀린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맹약을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며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나진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이었다. 아마도,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삶이 다시 한번 결정되리라고 나진은 확신했다. 이곳에서 나눈 대화는 필시 어딘가에 기록되어 제국의 역사서에 새겨질 것이다. 훗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될 부분이란 뜻이었다. 세상에 제 포부를 밝히는 것. 그것은 영웅에게 필연과 같은 일이었으므로. 이곳은 세상이라기엔 좁다. 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인물이라 해보아야 네 명에 성좌 하나뿐이다. 하지만 그들 한 명 한 명의 존재감을 생각해 보면 이곳은 나진에게 있어 하나의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검의 교단의 주인, 검성 카론. 성혈 교단의 처형인, 유엘 라지안. 제국의 첫 번째 기둥, 게르드. 제국의 황제, 엘드윈 팬드래곤. 호수의 마법사, 멀린. 셋은 소드 마스터고 하나는 성좌이며 또 하나는 제국의 황제이다. 거물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이들이다. 이만한 인물들 앞에서 포부를 밝힐 기회가 다시 올 것 같진 않았다. 나진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제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영웅담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여전히, 나진은 영웅담을 동경하는 소년이었다. “제국의 태양에게 아뢰옵건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입으로 역사에 쓰일 문장을 선택한다. “저는 그 어떠한 집단에도 소속될 생각이 없습니다. 만일 제가 소속되어야 할 곳이 있다면, 제 이름보다 앞서 불러야 할 것이 있다면.” 어찌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