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전이 무슨 악의가 있어서 아이들의 축제 출연 요청을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 정신적 연령은 한참 높다지만, 그도 사람이니만큼 이 아이들을 친하게 그리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안을 거절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현아 때문이라고?” “그렇지.” 어느새 자기 반 학생들에게도 이야기를 들었는지, 신나서 “야 우리 축제 나가자!” 라고 외치며 연습실에 들어온 이서. 명전은 그런 이서를 붙들고 설명에 들어갔다. “결국 나 혼자 단독 출연할 게 아니면 밴드 차원에서 출연해야 하잖아. 전에 우리가 현아네 학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치.” “그런데 현아를 데리고 와서 연습을 시킬 거야? 한창 입시에 바쁠 시기인데?” 명전 개인이 대학과 입시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별개로, 그는 친구의 중요한 기회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던지자 아차 하는 표정이 되는 이서. “그래도 뭐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루로는 안 되지. 얼마 전에 서하 드럼 연습하는 거 보니까 박자 다 틀리던데. 네명이 모여서 다시 맞추면 또 조율하는데 한참 걸릴 걸. 그 시간동안 현아는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아냐.” 그냥 대충 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만 맞춰서 공연을 한다 치면 시간 자체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3시간? 5시간? 아무튼 하루는 걸리지 않겠지. 하지만 명전은 세션 시절에, 그렇게 가자는 의뢰주나 후배들에게 “그렇게 갈 거면 씨발 때려쳐라!”라고 하며 악기를 집어던졌던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돈을 얼마 받던 간에 프로는 프로다. 최선을 다한 연주를 하려 노력하지 않고 멈춰버리는 인간은 영원히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 명전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런 명전의 성격상, 지금 상태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합주를 시작하면 하루 2~3시간 수준으로 최소 3일은 맞춰봐야 할 듯 했다. 하루하루가 중요한 아이에게 3일을 뺏는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럼 현아 언니 빼고 셋이서 하면 되지.” 그런 이서의 말에 명전은 오랜만에 이서를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서가 그 표정을 보고 움찔하는 사이, 그는 나지막히 읊조렸다. “너는 너 뭐 어디 갔거니 뭐니 해서 밴드 참여 못할 때 나머지 세명이 공연 나가면 기분이 좋을 것 같냐?” 그 말에 이서가 침묵하는 사이, 명전은 머리칼을 살짝 꼬았다. 아무리 그가 이 아이들을 통솔한다 한들 결국 고등학생. 멘탈 컨트롤을 사전에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수십년을 같이 지내온 밴드들도 불화가 있는데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고생들이 불화가 생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냥 바로 폭발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가 밴드를 하기 위해서는 다시 또 멤버를 모집해야겠지. 하지만 순수 여자로 구성된 밴드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러다보면 혼성 밴드. 그리고 그 다음 일어날 일은… 그는 팔에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쓸어내렸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그럼 2인조는 어때. 서하 언니는 다른 학교니까 제외하고, 나랑 너랑만 이제 하는 거지. 그거는 될 거 아냐.” 얘는 이때까지 뭘 들은 건지. 남 따로 내버려둘고 놀면 불화의 씨앗이 된다니까. 하지만 명전은 그 제안을 섣불리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서하야 같은 학교가 아니니까 서하만 데려오고 현아를 데려오지 않는 그림이 좀 이상하지만, 이서는 같은 학교 아닌가. “꼭 나랑 같이 해야 해?” “같이 안 하게?” 마치 버려진 강아지처럼 눈을 뜨는 이서를 보고, 명전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같이 하자. 해. 일단 다른 애들한테는 미리 이야기해야 하겠지만…” “슈퍼 이지 걸.” “뭐 잘못 먹었냐?”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축제 담당 교사가 내주었던 스케줄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세팅 포함 30분 가량. 지나치게 많지도 적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 * * “살려줘.” “그냥 죽어.” 연습실 바닥에 엎어진 이서를 두고, 명전은 그렇게 말했다. 틱톡에 뭐 코스프레 하고 베이스 치면서 홍보했다길래 연습 좀 한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게 박자나 리듬이 아예 다 무너져있는가. “너 휴식기 뒤로 베이스 잡긴 했냐? 그 뭐 영상 올린다 그런 거 말고.” “어…” 대답을 못 하고 있는 이서를 두고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러니까 뭐가 되지를 않지. “내가 쉬라고 했지 그냥 자빠져서 놀라고 했냐? 매일 집에서 2시간 연습은 기본인 거라고. 딱 봐도 그냥 연습이고 뭐고 자기 치고 싶은 거만 치고 살았구만.” “아니, 휴식할 땐 휴식을 해야지…” “그거야 기본이 다 잡혀 있는 경력 몇년 된 사람들이나 그러는 거고. 너는 지금 기껏해야 1년 반 정도 됐는데. 어? 니가 실력이 빨리 늘어난 것도 맞는데, 그만큼 안 다잡아주면 빨리 허물어지는 것도 맞아. 지금 그렇게 자빠져서 놀고 앉아있으면 뭐 그냥 아무것도 안 된다고. 너 같은 애들이 세상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 자기 기타니 베이스니 뭐니 다 잘친다고 어깨 올라가서 나 천재요 나만큼 잘 치는 놈 없소 이러면서 돌아다니다가 몇년 지나고 보면 그냥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서 나는 천재인데 왜 나를 안 알아주지? 이러는 소리 하는 놈들이 그냥 완전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고.” “야 너 뭐 한 오십쯤 된 사람처럼 말한다. 아이고 우리 수연씨 나이를 많이 드셨나봐요. 어? 이 미친 꼰대 코스프레…” 그런 이서의 말에 명전은 움찔했다. 옛 시절 재능있는 후배들을 볼 때마다 하던 소리가 버릇처럼 튀어나온 듯 했다. 원래 이런 이야기는 마음 속으로나 담아두던 편이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편해서 방심을 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락 역사에서도 둘러보면 그런 일 많아.” “아 예 예. 알겠쉽니더.” 대답을 하고는 다시 드러눕는 이서. 명전은 혀를 쯧쯧 찼다. 얘를 진짜 어떻게 해야 할까. 굴릴 때는 진짜 잘 따라오더니 휴식의 맛을 보고는 아예 맛이 가버렸다. 한번 날 잡아서 12시간 메트로놈만 시켜야 하는데… * * * 축제 당일. 흔히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묘사되는 고등학교 문화제(물론 일본에서도 그렇게 성대하게 치루지 않는다)와 달리, 한국의 고등학교 축제는 매우 간소하다. 안 만드니만 못한 부스 몇개를 애들이 만들고, 아이들은 학교 어딘가에서 처박혀 놀다가 강당에 가서 대충 재롱잔치를 본다. 그것이 끝이다. 한승고등학교의 축제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각 반에서 부스같은 것을 만들긴 하지만, 그게 학생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학교와 같았다. “그냥 집에 빨리 보내줬으면 좋겠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올해 한승고에 입학한 1학년 학생인 그는, 그냥 다 때려치고 집에 가서 게임이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뭐 짧은 치마 입고 춤추는 그런 선배들 없나?’ 그런 것 외에는 도저히 볼 게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축제에서 볼 게 뭐가 있을까. 기껏해야 좀 나간다는 애들이 막 춤추거나, 밴드니 뭐니 그런 재롱잔치 하거나 그 정도겠지. 그런 생각은, 강당에 걸려 있는 스케줄표를 보았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딱 봐도 일진 행세하면서 놀러다닐 것 같은 ‘한승고 여자 댄스부’와 좀 논다는 남자애들의 이름. 그리고 그 밑으로는 ‘하수연/최이서’의 이름. ‘하수연?’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수연이라고 하면, 2학년 선배였던가. 학폭하고 개과천선했던 걸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보기에는 그냥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다. ‘이쁘긴 하다고 들었는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무런 기대 없이 강당에 들어섰다. “한승고등학교 축제를 시작하겠습니다!” 학생회장의 말과 함께 시작된 축제. 강당 위에는 나름대로 노력한, 하지만 어설픈 기색이 역력한 공연들이 줄을 잇는다. 스탠딩 코미디를 하겠다고 올라왔다가 웃음 하나 없는 반응을 받고 내려간 아이라던가. 열광적인 반응을 받은 ‘한승고등학교 여자 댄스부’라던가. ‘김우석과 아이들’ 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달고, 남돌 댄스를 따라해봤지만 춤이라기보다는 꿈틀거림에 가까운 그런 동작들만 만들어낸 남자애들이라던가. “아 존나 못하네.” 꽤나 인상이 사나워 보이는 2학년 여자애가 내뱉은 말. 적막한 강당에서 나지막히 내뱉어져 상당히 크게 들린 그 소리는 학생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여자 댄스부’외에는 단 하나도 볼게 없는 이 상황. 그는 마음속으로 동감을 표시하고는, 다시 스케줄표를 보았다. 도대체 이 재롱잔치가 언제 끝나는지 알고 싶어서. ‘이건 왜 30분이냐?’ 다음은 그 ‘하수연/최이서’. 하지만 뭔가 좀 이상했다. 지나치게 길게 배정되어 있는 시간. 아까 지나갔던 허접한 밴드부의 공연도 세팅시간 합쳐서 15분이 안 되는 정도였는데. 이 둘은 도대체 왜 30분인 걸까. “하수연 나온다고?” “그런 거 같은데. 밴드한다고 하지 않았나?” “음악 한다고 듣긴 한 거 같은데.” “왜 30분이나 한대. 지겹겠다.” “수연이 밴드 하거든.” “진짜?” ‘음악한다고는 들었는데 보지는 못했다’라던가, ‘친구인데 그걸 안 듣냐’ 같은 이야기나, “아니 방송을 나왔는데 그걸 왜 몰라!” 같은 외침도, “하수연이 방송을 나왔다고? 어떻게?”, “뉴스도 안 보냐?” 라는 이야기들이 옆에서 들려온다. 학교폭력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하수연의 화제성에 비해, 그녀의 음악을 들은 사람은 적은 것 같이 보였다. '그럴 만 하지 않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자신도 하수연의 음악을 들은 적은 없었으니까. 어디선가에서 스쳐지나가며 들었을수는 있지만, 특별하게 '하수연'이 어떤 음악을 하는지에 대해서 찾아본 적은 없었다. 그럴 생각도 전혀 없었고. 그런 수연의 음악 실력에 대한 부정적인 웅성임. 그것을 잦아들게 만든 것은… 기타와 베이스를 들고 무대 옆에서 나타난 두 인영이었다. “안녕하세요. 세팅 시간 얼마 안 걸리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마이크를 통해서 나지막히 들리는 목소리. 뒤이어 “저희 공연 30분이나 책정됐는데, 들어보시면 짧다고 느끼실거에요~!” 라는 쾌활한 말투도 이어진다. 그는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킬링보이스도 30분짜리 들으면 질리는데. 무슨 대단한 프로도 아니고… 어디 한번 해보기나 하라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