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이 종료된 후. 인사를 나누는 출연진과 촬영팀. 유나 또한 고개를 연신 숙이며, 인파를 가로질러 목적했던 곳에 도착했다.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촬영장을 떠나려고 하는 수연의 앞에. “무슨 일이신지…” “혹시 시간 되세요? 커피라도 한잔 마시죠.”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 들어간 카페. 따라온 수연은, ‘일단 따라오긴 했지만 왜 날 부른 건지 알 수가 없네’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나는 일단 앉으라고 한 후 커피를 주문하고, 수연 앞에 앉아 입을 열었다. “MBTI가 어떻게 되세요?” “…네?” 다른 사람들과 말을 잘 트지 못하는 유나를 위해, 아이돌 시절의 동료들이 만들어준 필살기. ‘여자들치고 MBTI 안 좋아하는 사람 별로 없으니까, 일단 그거로 이야기를 시작해!’ 같은 조언을 통해 만들어낸 ‘MBTI신공’.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수연의 표정은, 뭐라고 할까. 표정이 없는 것에 가까웠다. 마치’ 너 그런 거 믿니? 정말 실망이구나. 아니 기대도 안 했다.’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 ‘다행이다. 얘도 안 믿는구나.’ 수연이 자신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에 유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머쓱하게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그런 유나에게, 수연이 질문을 던졌다. “MBTI가 뭐… 였죠?” “…네?” MBTI 같은 것을 믿지 않는 유나조차 당황하게 만드는 질문. 하지만 수연은 “아니, 아닙니다.”라고 말한 후 “그래서 어떤 일 때문에 저를 보자고 하신 건지.” 같은 말을 했다. “음… 뭔가 엄청난 용건이라거나 특별한 이유 같은 것은 없구요. 그냥 한번 친해져 보고 싶어서요.” 유나는 명함을 한 장 건넸다. 기획사가 만들어준, 가수 이유나라고 박혀있는 물건. 수연이 받아들여 넘겨본 뒤쪽에는, 아이돌 시절 냈던 음반들이 주르륵 적혀 있음과 동시에… 그 시절의 예명도 적혀 있었다. ‘해연’. “저는 사실 돌려 말하는 걸 잘 못해요. 그래서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는데, 솔직히 말해서 저는 수연 학생이 성공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것도 아주 큰. 대성이라고 하던가요, 그런걸.” 뭔가 체계화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나는 연예계에서 수년간 구르면서 어떤 경험, 빅데이터 같은 것을 얻었다. 저 애 정도면 되겠구나, 저 애는 안 되겠구나!' 하는. 그리고 그 경험이 수연을 보고 말해주고 있었다. ‘쟤는 무조건 된다.’, 하고. “그래서 친해지고 싶어요. 계산적인 이야기긴 한데, 뭐 세상이라는 건 다 그렇잖아요. 전부 다들 계산을 하고 살죠.” “그렇긴 합니다.” 유나는 생각했다. 아무튼 대성할 것 같은 애와는 미리 인연을 맺어놓는 것이 이득이다. 장기투자라고 하던가. 어려울 때 손을 빌려준 사람이 더 인상에 남기 마련이니, 할 수 있으면 최대한 빨리 투자하는 것이 맞다. “혹시라도 여성 보컬이나, 아니면 뭐 연예계 관련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연예계 관련이요?” “제가 또 그래도 아이돌을 했으니까. 아직 그 시절 인맥이 살아있긴 하거든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요. 너무 큰 건은 안 되겠지만.” 그 말을 들은 수연은 살갑게 웃었다. 마주 웃어주며, 유나는 생각했다. 이 애와는 왠지 잘 맞을 것 같다고. * * * 사실, 현재 김가은 피디가 녹화하고 있는 것은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정규 방송국에서의 그것처럼 한번 해 보고 안 되면 바로 잘려버리는 그런 파리목숨은 아니지만, 완전히 안정되었다고도 할 수 없는 프로그램. 그 때문에 최초 출연자 6명 중 2명은 꽤 인지도가 있는 사람을 데려왔다. 정태영 피디의 메인 채널이라면 모를까, 서브 채널 프로그램에 출연할 급은 아닌 연예인. 원래 가은의 계획은 두 사람을 기반으로 나머지 네 명을 곁들여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밑반찬의 중심이 될 사람은 전직 아이돌, 유나. 수연은 밑반찬 내의 별미를 맡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촬영을 이어 나가면서, 그리고 촬영본을 보면서. 가은은 극심한 갈등에 빠졌다. ‘촬영 분량 하나하나가 전부 다 버리기 아까운 것들이야.’ 다재다능은 무능과 동의어라고 했던가. 방송도 마찬가지다. 모든 롤을 다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수연은 최소한 오늘 촬영된 분량에서만큼은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위 ‘꼰대’ 개그로 웃길 땐 웃겨주고. 말투 소재로 귀여움도 잡고. 음악 예능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 실력’도 보여주고. 게다가 이런 힐링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무조건 나와줘야 할, 자연스러운 감동 또한 만들어냈다. 보물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활약. ‘젊은 애라 그런지, 진짜 뉴미디어 최적화 인재네…’ 가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스태프를 소집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봐야 할 때였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맥락 하나 없이 던져진 질문. 하지만 스태프 전원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순조롭게 촬영을 마친 현시점에서, 가은 피디가 고민할 만한 포인트는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허나 질문에 따라오는 대답은 없었다. 질문을 알아듣는다고 해서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당연할 따름이었다. “저는…” 손을 들고 대답한 것은, 제작팀의 스태프 중 하나였다. “그래도 애초 계획대로 그대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죠?” “첫 방송이니만큼 기존 출연진의 팬 분들이 많을 텐데, 그분들의 분량이 적어버리면 안 좋은 평가가 나오지 않을까요.” 그 말에 가은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그리고 스태프 사이에서 반박이 흘러나왔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팬들만 방송 보는 거도 아니고. 일반인도 볼 거니까 상관없지 않나?” “입소문 퍼트리는 건 열성 팬들이 잘하지.” “애초에 모셔서 데려온 사람들인데 안 내보내는 것도 좀…” “그런 게 중요하냐? 방송의 재미가 더 중요하지. 뭘 그런 걸 고려해.” 설왕설래가 오가는 가운데, 누군가가 손을 들고 말했다. “일단은 안정적인 쪽으로 가죠. 수연 학생 분량이 재미있긴 했는데 그렇다고 다른 두 분 쪽이 재미없었던 것도 아니고, 이번에 그런 쪽으로 갔다고 해서 다음번에도 그렇게 가야 하는 게 아니니까요.” “아니, 재미없으면 접어야 된다니까?” “그렇게 쉽게 접히는 게 아니잖아요.” 갈리는 의견. 가은은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떤 쪽을 택해야 할까. 어느 쪽도 일리는 있다. 첫 방송이니 안정적으로 가자는 것도, 재미를 노리자는 것도, 그런 것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도, 그래도 재미있어야 임팩트가 있다는 것도. 가은은 눈을 떴다. 그녀는 항상 새로운 도전을 즐겨왔다. 이렇게 나온 것도 그렇다. 태영 피디 밑에서 얌전히 일을 배우며 경력을 쌓고 더 안정된 자리에서 프로그램 제작에 도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굳이 서브 채널로 튀어나와 프로그램 제작을 시작했다. “수연 학생 위주로 가는 걸로 할게요.” 그리고 그런 그녀의 성미에는, 수연을 미는 것이 맞았다. 그녀가 밀지 않아도 뜰 아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발굴했다!’ 정도는 말할 수 있어야 체면이 서지 않을까 싶었다. * * * 그룹 사운드의 활동이 ‘멤버의 입시 문제’로 인해 잠시 멈춘 후. 세윤은 무기력한 상태로 유튜브만 딸깍딸깍거리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한 달에 두어 번 열리던 파라독스에서의 공연도 완전히 멈춘 상태. 갱신된 콘텐츠라고는 ‘김지연의 음악편지’ 촬영본과 [White Room] 채널에 올라왔던 일본 여행 영상뿐. “이대로 가면 굶어 죽는다고…!” 세윤은 절규하며 울부짖었다. 그런 모습을 본 남동생, 세현이 한심하다는 듯 쯧쯧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 새끼는 지는 아닌 척하면서도 매일 밤 그룹 사운드나 White Room 채널에 들어가 새 영상 안 올라왔나? 같은 소리나 하는 놈이니까. 자기에게 솔직하지 못한 녀석… 하지만 그렇게 남동생을 비난해 봐야 그녀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도리어 남매가 둘 다 그룹 사운드의 콘텐츠 부재에 고통받는다는 사실밖에 남지 않았을 뿐. 그녀는 괴로워하며 마음을 달래기 위해 꽤 유명한 채널을 켜 영상을 보았다. 새로 시작한 것 같은, ‘버스킹’을 소재로 한 꽤 재미있을 것 같은 프로그램이 올라와 있었다. 그 영상을 킨 그녀는, 몇초 후 소스라치게 놀랐다. “흐아아악!” “왜? 왜?” 집 전체를 울리는 비명 소리에 급하게 뛰어 들어온 남동생, 세현. 세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모니터만 가리켰다. 그리고 그 가리킨 모니터를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던 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하수연’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둘은 경건하게 모니터 앞에 물을 떠다 놓고 절을 한번 했다. 한 번 더 절을 하려는 세현의 뒤통수를 때린 후, 세윤은 물을 정중하게 싱크대에 내버려둔 후 영상을 재생시켰다. 우리 수연이가 제발 망가지지 않았길 바라면서.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다가온 수연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주로 좋은 쪽으로. “이해가 안 되는다에요.” “이 정도는 잘할 수 있습니다에요.” “그런 속셈은 속기 쉽지 않습니에요.” 얼마 전부터 수연이 장착한 ‘에요’ 말투. 처음부터 끝까지 ‘에요’ 같은 말투를 하고 있다면, 팬인 그들조차도 수연이 방송에서 뜨고 싶어서 해괴한 말투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연은 대다수의 경우에는 평범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런 경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라거나 “제가 먼저 해볼게요.” 같은, 딱딱한 말투와 포근한 말투, 두 개를 사용한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아마 ‘다에요’ 같은 말투는, 세윤이 보기에는 첫 번째 말투를 두 번째 말투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겨난 에러의 부산물 같은 것으로 보였다. 인베이전 2024 시절에는 첫 번째 말투를 사용했던 수연이니까. ‘그래서 더 귀여워.’ 딱딱한 말투를 쓰던 여고생이, 점점 푹신하고 나이에 맞는 말투를 쓰려고 노력한다. 이 어찌 귀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두 번째 충격 포인트는, 수연이 보여주었던 공연이었다. - ㅠㅠㅠㅠㅠㅠ - 이 곡을 저 나이에 소화하기 힘들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학생이네요. 장래가 기대됩니다. - 할머니 우는거봐 ㅠㅠㅠㅠㅠ -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포스 분위기 진짜 다 미쳤다 - 하수연!! - 진짜 대박이다.....강약조절, 감정, 음색 뭐하나 빠지지않네요 - 왜 이렇게 빨리 돌아가셨는지 모를 분 ㅠㅠ 역시 하늘은 천재 먼저 데려간다더니 추천순으로 봐도, 최신순으로 봐도 칭찬만이 가득한 댓글. 수연의 실력보다는 원곡에 대한 호평이 주를 이루는 것이 조금 심술이 나긴 했지만, 세윤은 그런 쪽에 집중하진 않았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면모가 있었기에. ‘원래 밴드 음악만 하는 거 아니었어? 완전 락만 하는…’ 이때까지의 수연은 소위 말해 ‘강한 음악’만을 보여주었다. 어떤 음악을 하든 일렉 기타를 들고 거침없이 질주하는 솔로를 치며, 비브라토 암과 벤딩으로 폭풍을 만들어내는 것이 세윤이 알던 수연의 모습이었다. 주현의 콘서트에서 봤던 첫 모습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는 쭉 그런 모습만 봐왔기에 세윤은 수연이 그런 음악만 하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의 밴드, 그녀의 가수. 그녀의 아이돌은 자신이 락을 하는 이유를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 표현력이 흘러넘치는 통기타 연주. 대중이 미치도록 좋아하는 그런 요소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가지고도 수연은 밴드 음악을 하고 있었다. 단지 그녀 자신이 밴드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세윤은 그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밴드’를, ‘음악’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건, 홍보를 돌릴 수밖에 없잖아…’ 세윤은 잘 하지도 않던 페이스북과 인스타를 킨 후 유튜브 영상의 링크를 따며, 그렇게 생각했다. 세윤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그룹 사운드 팬들이 동시에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