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ve Vai. 일본인이 사랑하는 기타리스트 중 한명이자, 통칭 ‘기타와 성교하는 남자’. 그런 그의 전성기를 나타내는 Tender Surrender. 음악, 특히 락을 좋아하는 일본인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노래. 만약 들어보지 않았더라도, 일본인의 영혼에 박힌 ‘테크니컬 & 속주 기타리스트를 좋아하는 정신’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룹 사운드의 연주에 박수를 보내게 했다. 환호라기보다는 갈채에 가까운, 경건함을 담은 소리. “감사합니다.” ‘나 일본인 아니에요’를 명백하게 알려주는 기타리스트의 발음은 그 갈채에 세기를 더했다. 딱 봐도 한국인인데. 요새 K-POP으로 음악 시장의 패권을 노리고 있는 한국인이 일본까지 와서 락으로 버스킹을 한다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존중 아니겠는가. “와… 대단하다.” “죄송합니다,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아, 못알아들으시나… 픽쳐 픽쳐~.” “OK, OK. Feel free to snap a photo.” “여고생이야?” 일정한 간격을 둔 채로 국적 불명의 여고생 밴드에 대해 와글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여고생 밴드는 그런 사람들을 무시한 채로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숙덕이다, 세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쯤, 관객들의 주의를 돌리는 소리와 함께… 어디서 많이 들은 애니메이션 풍의 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청춘 컴플렉스?” 정석적인 J-Rock. 청춘에 대한 컴플렉스를 노래한 그 가사는, 일본어이기에 사람들의 반응을 더 자극했다. 무명의 한국인 밴드가 일본에 와서 일본풍 락을 버스킹에서 부른다? 그런데 상당히 잘 한다? 어떻게 반응을 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만약 정 반대의 케이스가 있었다면, 아주 인터넷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드디어 일본이 한국 음악을 인정했고 어쩌고 저쩌고. 여고생 밴드 비주얼 미쳤다 어쩌고 저쩌고. 실수 없이 펼쳐지는 연주. 현장의 분위기를 송두리째 지배하며 그저 이끄는 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듯 불꽃을 튀겨대던 아까의 기타.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기타는 밴드의 연주에 적절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나는 이런 것도 잘 할줄 안다’라고 말하는 듯. 그리고 마지막, 합창과 함께 짧고 명료하게 곡을 마무리하는 밴드. 다시 한번 더 쏟아지는 환호성. 이전의 박수는 경탄이었으나, 지금의 박수는 순수한 기쁨과 즐거움이다. 쏟아지는 박수에 고개를 숙이는 밴드 멤버들. 그 모습에 더 큰 반응이 이어진다. “에또… 에또네… 저, 저희는…” 그 중 키보드를 잡고 있던 아이가, 쭈뼛쭈뼛거리며 입을 연다. 전혀 안 그래보이는 살짝 화려한 외모이지만, 뭔가 잔뜩 움츠러들어서 귀여운 모양. “귀여워~”, “엄청 귀여워!”, “위험해!” 등 살짝 지능이 떨어지는 듯한 언어가 남발된다. 그런 말이 들릴 때마다 조금씩 움찔거리면서도 피식피식 웃는 키보드. “언니, 이쁜 외모 돌아보기도 좋지만 일단 이야기부터.” “어, 어… 엑, 미안해요… 저희는 밴드 ‘그룹 사운드’ 입니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구요, 데뷔한지는 아직 1년이 안 된…” 베이스를 잡고 있던 아이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다시 입을 열기 시작한 키보드. 그녀가 이야기한 그들의 약력은, 눈 앞의 사람들이 경악할만한 정도였다. 데뷔한지 아직 1년도 안 된 밴드. 한국에서 오디션을 우승하고, 24시간 차트에 들어가고… “기타, ‘하수연’. 베이스, ‘최이서’. 키보드, 저… ‘정현아’. 드럼, ‘유서하’.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밴드, ‘그룹 사운드’ 입니다…!” 마지막의 멤버 인사에는 열렬한 박수가 이어진다. 새로운 락 밴드의 등장이라던지, 한국인 밴드라는 것에 대한 환호라던지, 그냥 박수라던지… 많은 의미를 담으며. 걸즈밴드 최단 기간 무도관 라이브에 빛나는, 일본인이 사랑하던 밴드 サイサイ… SILENT SIREN. 다음으로 연주된 노래는 그런 그들의 히트곡, ‘八月の夜’과 ‘チェリボム’이었다. 청춘과 사랑을 노래한 그야말로 ‘걸즈밴드’ 다운 곡에 열광하는 사람들. 분명 사람이 많다 해도 시부야의 어느 한 구석일 뿐인 곳. 유동인구가 많다 해도 사람들이 어느 한 곳에 몰릴 이유는 전혀 없는 거리. 하지만 그 거리에 운집한 사람들은, 일반적인 형태를 뛰어넘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노래에 끌려 발을 멈추고 밴드에게 달라붙고, 이미 몰려버린 군중들을 신기하게 여긴 다른 행인은 뭘 하나 싶어 고개를 내밀어 공연을 구경하다 또 한명의 군중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것은, 드디어 나온 그들의 자작곡. [잿빛의 나날들] 이었다. 일본인이 너무나도 좋아하다 못해 환장하는 ‘청춘’이라는 감성을 노래한 곡. “하지 않았던 숙제, 사물함 속에는 거북이가 있어…” 그들의 국적을 증명하듯 한국어로 불러지는 노래. 곡의 분위기는 명백히 그들 자신의, J-Rock의 영향을 받은 곡임이 분명하지만… 노래를 듣고 있던 사람들 중 삐딱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역시 일본이 락의 종주국이네. 이렇게 베낄 정도면.” 라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왜냐하면 지금 연주되는 곡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조차 승복하게 만들 정도의 곡이었으니까. 청춘의 끝자락. 명백히 이런 감성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사람들에게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노스텔지어’를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의 아련함. 누군가는 눈을 감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이고. 누군가는 하늘을 쳐다본 채로 살그머니 스며드는 비단결 안개와도 같은 감성에 저며들었다. 외부의 소음이 그들을 깨우기 전까지는. “어이 이거 뭐하는 거야. 해산하라고, 해산. 거기 학생들은 왜 버스킹 하고 있어. 너희들 허가 받았냐?” 어느새 슬쩍 다가와 사람들을 밀어내며 ‘그룹 사운드’에게 등장하는 경찰들. 순찰하는 사이 와본 모양인지, 가벼운 분위기로 인파와 버스킹의 해산을 명령했다. “아, 알겠습니다. 저희 장비 이거 치우고…” “그래. 허가 안 받았지? 너희들 그 악기점 애들 아냐? 가끔 여기 와서 자리 피더라. 자꾸 그러면…” “아이, 저희도 먹고 살아야…” 익숙한 듯 경찰과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밴드에게 “이제 접어야 할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는 악기점 점원.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참지 못한 것은 밴드도, 점원도, 경찰도 아니었다. “임마! 지금 사람들 다 노래듣고 있는데 새꺄! 지금 어! 곡 하나는 끝내게 해 줘야 할 거 아냐! 세금 처 먹고 뭐 하는 거냐!” 감성을 자극받다가 갑자기 방해를 받은 시민들이었다. 군중속에서 누군가가 거칠고 굵은 목소리로 외치자, 거기에 동감을 표시하는 사람들. “그래! 공연 잘 하고 있구만!” “한 곡은 끝내줘야 할 거 아니에요!” “이거 뭐 도리가 없네, 도리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있는 거냐!” “아니 이 녀석들 뭐야! 해산해 해산!” 경찰이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모여 있는 군중들의 분노는 점점 끓어올랐다. “쳐죽여버린다!” “한 곡 좀 듣게 해달라고!” “병신(畜生)아! 귀라는 게 있는 거냐!” 같은 과격한 단어들이 점점 들려오고, 이런 상황이 될 줄 몰랐던 경찰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뚜렷해졌다. “이 새끼들… 그래! 한곡만 더 불러!” 결국 항복을 표시하는 경찰. 환호성을 지르는 관객들 사이로, 밴드원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다시 곡의 연주를 준비했다. * * * 그렇게 한바탕 일을 벌인 후. “그룹 사운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버스킹을 지원해주신 … 악기점! 저희 지금 악기는 전부 여기에서 구매했습니다! 정말 좋아요! 오챠노미즈 거리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 미리 번역해놨던 문장을 읊자, 관객들은 왁자지껄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이렇게까지 해 줄 줄 몰랐던 점원 또한 머쓱하게 일어나 고개를 90도로 마구 숙였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제의 일이다. 오늘은 오늘의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괴롭거나 힘들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지만… 아니, 명전은 괴롭긴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이런 게 어울린다니까.” “그… 글쎄요…” “내가 보기엔 좀 아닌 것 같은데.” 십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렇게 입씨름을 하고 있으니, 어느 누가 괴롭지 않겠는가. 그는 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리쉬었다. “힘드니?” “아니, 힘든 건 아닌데요… 언제 끝나나 해서. 그냥 대충 입으면 되는 거 아닌가?” 혜인의 이야기에, 명전은 그렇게 대답하며 질린다는 듯 세 명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몇분째인가. 어제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들이 옮겨온 곳은 요코하마였다. 도쿄 인근의, 항구가 매력적인 도시. 쇼핑보다는 야경이나 관광을 더 즐겨야 할 것 같은 그런 도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전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은… 오늘도 또 쇼핑을 벌이고 있었다. ‘누가 여자 아니랄까봐… 아니, 나도 이제 여자긴 한가.’ 명전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직도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미나토미라이인지 어쩌고인지를 구경하던 5인방은, 문득 보이는 구제샵을 보고 “한번 들어가보자!”라고 외친 이서에게 딸려들어갔다. 그리고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일행의 목표(이서가 강제한)는 [구제옷으로 5명 풀세트 구매하기!] 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딱 봐도 쉽지 않은 난이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원활하게 진행되던 목표는… 딱 현아의 순서에서 막혀버렸다. “어울린다니까.” “아니 아까… 입어 봤는데 너무 화려… 해서 좀 그, 그렇달까…” “화려할 수도 있지. 원래 옷은 주목받으려고 입는 거야.” “아니, 전 좀 그런…” “주목받으려고 입는 건 맞는데, 이런 옷은 좀 아니라니까. 내가 보기에 현아 너한테 이런 옷은 안 어울려.” 정작 본인은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 현아를 상대로 두고 피를 튀기고 있는 두 명. 패션에 관심이 많은 두 명의 대결이기 때문인지 상당히 치열한 모습이었다. “아니 언니는 약간 웜톤에 강아지상? 이런 느낌이라서 이렇게 루즈핏으로 헐겁게 입어주면서 귀여운 이미지로 가야 한다니까. 약간 소매도 길게, 펑퍼짐하게.” 이서가 흔드는 것은 빈티지한 느낌이 강하지만, 더럽다고 느껴지지는 않는 하얀색 셔츠. “이제 이렇게 입고! 팔 좀 걷어올리면 활동적인 느낌도 나고! 완전 딱 피부 톤에도 어울리는데.” 라는 이서의 어필에 움찔하는 현아. 그러나 맞은편의 서하는, 조금 다른… 아니 정 반대의 의견을 제시했다. “내가 보기엔 안 어울려. 현아는 좀 밋밋하기보다는 화려한 무늬를 입어줘야 어울리지. 악세사리도 달고. 약간 그런 얼굴이야.” “아니 저는…” “으! 그런 거 완전 안 어울린다니까… 이런 고급진 얼굴에 이상한 무늬를 넣으면 안 돼.” “원래 꽃도 좀 꽃봉우리가 있어야 돋보이듯이, 그런 쪽으로 가 줘야 하는 거거든?” “아니… 제 말좀…” 과열되는 분위기. 싱글싱글거리는 혜인과 불이 붙은 두 사람,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존중받지 못한 채 말도 붙이지 못하는 현아. 그리고 이게 무슨 일인지 하며 한심하게 상황을 쳐다보고 있는 명전과, 왜 내 가게에서 이러고 있냐는 듯 난감해하는 점장까지. “아~ 그래서 안 어울리는 그런 무늬 입고 막 그러신다? 응? 어두운데 무늬까지 있으니까 티도 잘 안나는데. 완전 어둑어둑해가지고.” “… 야 너는 그 자꾸 이상한 뭐 멘헤라처럼 악세사리 달고 그렇게 주렁주렁 다니고 그거 좀 유행도 지났는데. 언제까지 그럴 거야?” 그러던 와중, 이야기는 점점 더 불꽃이 튀는 방향으로 휘몰아친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상대 패션 센스 지적과, 그로 인해 점점 더 치솟는 열기. “야, 둘이 나가서 싸워.” 명전은 그렇게 밀려내지면서도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둘을 보면서 생각했다. 참, 음악으로도 한번도 안 싸운 녀석들끼리 패션으로 싸우는 게 어처구니가 없다고. 이 일이,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그룹 사운드 내 ‘패션 대전’의 시발점인지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