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대부분 땅 위에서 태어나 땅 위에서 살아간다. 땅 밑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지하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인간에게 거부감을 준다. 습하고 어두컴컴한 분위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접근을 불허하는 그런 느낌이 있다. 동시에 그러므로, 라이브 하우스들은 지하에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월세가 싸고, 소리도 잘 새어나가지 않으며, 민원 등에도 자유로우니까. 아마 이 라이브 하우스도 그런 이유로 지하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뭔가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곳 들어가는 것 같고 그러네.” 짧은 계단을 내려가는 중, 이서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명전은 맞장구치는 현아를 잡아다가 앞에 세웠다. 그는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인간이었으므로. “어서 오세요. 예매하셨나요?” “아… 이에, 이에. 현장… 현장구입. 그 뭐더라… 현장 구입 가능한가요?” “오케, 오케. 몇명인가요?” “5, 5닌데스.” 현아가 짧은 일본어로 판매원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동안, 명전은 라이브 하우스 안쪽을 슬쩍 둘러보았다. 파라독스보다는 살짝 작은 규모. 하지만 내부 디자인이라던지 음향 장비라던지 저 안쪽으로 보이는 드링크 바의 인테리어라던지 그런 것들은, 확실히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여기… 티켓이요. 이걸로 저기 가서 교환하면 돼요. 음료수로. 플로어에 들고 들어오면 안 된대요…” 나눠준 티켓은, 상당히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명전은 티켓을 교환하기보다는 그냥 기념으로 가지기로 했다. 아까 오면서 생수를 냅다 들이부었기 때문에. “5분 후에 공연 시작합니다~!” 스태프의 안내를 배경 삼아, 명전은 다시 한번 천천히 라이브 하우스를 돌아보았다. 완판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이 꽤나 들어차있는 가게. 라인업에는 일본 락 씬에도 상당히 조예가 있는 명전조차 들어보지 못한 밴드들이 있다. 이서가 음료를 주문하고 있는 드링크 바에는, 전형적인 ‘일본 락 하는 남자’ 느낌의 험상궂고 수염이 난 청년이 음료를 내 주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이런 데에서 공연을 하는 거니?” “그렇죠. 저희가 공연하는 홍대 거기도 뭐, 여기보다 살짝 크고 지상이다… 그거 뿐이지 여기랑 크게 다른 건 없어요.” 혜인의 물음. 명전은 대답을 해 주고는, 자리 잡을 곳을 물색했다. 여고생 4명과 성인 여성 1명이 평온하게 음악을 들으면서 락 밴드의 퍼포먼스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을. “감사합니다!” 두 번째 밴드의 공연이 끝나고,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이서와 일행들 또한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다. “어때? 두 팀 본 소감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든 사이, 수연이 던진 질문. 이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떤가 하면, 노래는 두 밴드 다 좀 미묘한 부분이 있었다. 일본 감성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잘 즐기지 못하는 건가 싶었지만… 일행들의 반응이나 수연이 써 왔던 곡 등을 되새겨보면 확실히 좀 부족한 면이 있긴 했다. 아니 어쩌면, 수연이 곡을 잘 쓰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력적인 부분에서… 이서는 눈이 번쩍 뜨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서가 홍대 인디 밴드씬을 꿰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잘 모르는 편에 가깝다. 본 인디 밴드라고 한다면 파라독스에서 공연할 때마다 봤던 뒷 타임 밴드들과 서하가 끌고 갔던 밴드 공연 몇개. 그리고 오디션에 출연했던 밴드들 정도. 그 중 오디션에 출연했던 밴드들은 엄선된 실력자라고 치고 제외를 해 본다면, 나머지 밴드들은… 기본기적 측면에서 좀 미묘한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박자를 놓친다던가, 정확한 음정을 내지 못한다던가, 지나치게 어려운 연주에 치중하려 한다던가. 하지만 지금 본 일본 밴드들은 달랐다. 인베이전 2024에 출연한 밴드 수준…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난, 중상위권 밴드 수준의 기본기라는 느낌. 라이브 하우스를 매진시킬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굳이 실력을 고르고 골라서 들어온 곳도 아니다. 적당적당히 들어찬 수준의 관객을 유지하는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나쁘지 않은 기본기를 가지고 있었다. “두 밴드 다 멤버들 기본기가 좋네. 음악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귀에 좀 휴식을 줘야겠다며 잠시 바깥에 나간 혜인과 같이 따라 나간 현아. 세 명만 남은 일행 사이에서, 서하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 “왜 일본이 락 강국이니 밴드 강국이니…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지 알 것 같아. 한국이었으면 실력 좋다고 소문났을텐데.” “그렇긴 하지.” 이어지는 이서의 대답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도 입을 열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한국에서 100명 중 10등 정도의 실력이라고 한다면.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일까? 한 천명 중의 100등, 110등 정도 되겠지. 한국이나 일본이나 실력 분포도 자체는 비슷해.” 의외의 이야기라고 이서는 생각했다. 일본이 훨씬 더 수준이 높을 줄 알았는데. “다만 다른 건, 인구수 자체가 다르니까… 예를 들어 한국은 천안 광명 정도의 규모에 A라는 사람 한명만 딱 고수로 인정받을 수준이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으로 치면 비슷한 곳에 한 10명 정도의 고수가 있다… 그런 느낌. 인구가 많아버리니 분포도는 비슷하다 할지라도 절대적인 사람 숫자가 그냥 차이가 난다, 뭐 그런 거지.” 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정리를 하고 내려가고 있는 밴드를 가리켰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음악의 천국이다… 이런 말이 맞긴 하지만 또 아니기도 한 거야. 저런 실력의 밴드도 결국 이런 라이브 하우스를 꽉 채우지 못하는 걸 봐. Mystica로 예를 들어보면, 한국에서는 ‘인디에서 공연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상당한 실력의 밴드’ 같은 느낌이지만 일본에서는 그냥 원 오브 뎀인 거지.” 그리고 우리가 일본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들을 다 뚫어내야 되는 거지. 수연은 그렇게 말을 끝냈다. 그리고 찾아온 침묵에 살짝 숙연해진 분위기. 이서는 뻐근해진 뒷목을 살짝 주물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디션이 끝나고 나서 살짝 오만해진 것이 사실이었다. 워낙 탄탄대로를 걸었던지라 ‘나 정도면 어딜 가도 먹히지 않나?’라던가 ‘조금 있으면 월드투어 돌게 될 지도?’ 같은 생각을 하며 이불 속에서 즐거운 상상을 하던 것이 요즘 일과였는데. 수연이 데려다준 이 곳에서, 이서는 좋은 의미의 찬물을 맞은 느낌이 들었다. 최근에는 잘 한다 실력 좋다 이야기만 들었기에 더 그랬다. 한참 더 노력하고, 한참 더 연습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는 주먹을 살짝 강하게 쥐었다. 돌아가면 손에 피가 나도록 베이스를 연습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그럼, 3번째 밴드 시작하겠습니다!” 그런 스태프의 외침이 들려온 것은, 현아와 혜인이 돌아온 이후였다. 3번째 밴드의 공연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3번째 밴드 또한 이전과 비슷했다. 미묘한 곡과 썩 괜찮은 기본기. 조금 달랐던 것은, 이전보다는 정제된 사운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오리지널 곡만이 아닌 커버곡도 몇개 불렀다는 점. 그리고 그 곡 또한 아무런 징조 없이 흘러나왔다. 밴드 보컬의 말 몇마디 후에. “지금부터 들려드릴 곡은, 아 제가 한국 음악... 구체적으로는 한국 락을 좋아하는데요. 얼마 전에 차트를 뒤지다가 발견한 곡입니다. 대부분이 K-POP인 차트에서 밴드 곡이 하나 차트-인 했더라고요. 상당히 의외라 들어봤는데, 곡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기 위해서 연습도 해 봤구요...” “뭐라는 거야?” “한국 곡… 한국 락을 커버하겠대요. 자기가 차트에서 들어본 곡인데, 엄청 좋았다고…” 이서의 질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어떻게든 밴드맨의 이야기를 들은 후 해석을 해 주는 현아. 이서가 ‘한국 차트에 올라간 락 밴드 곡?’ 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보컬이 다시 일본어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들어주세요, 과오.” 그리고 흘러 나온 멜로디는, 이서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아니 이거 우리 곡이잖아?!” 아까까지만 해도 라이브 하우스에서 음악을 즐기던 관객들은, 처음 듣는 곡을 감상하기 위하여 한껏 정적에 빠져있는 상황. 그런 관객들 사이로 한국어 외침이 날카롭게 흘러나간다. 시선이 그들 사이로 쏠리는 가운데, 서하가 빠르게 이서의 입을 덮으며 관객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조용히 좀 해.” “아니, 근데 이거 우리 곡이잖… 아는 척 좀 해야…” 읍읍거리는 이서. 그런 이서를 두고 수연은 한숨을 푹 쉬어 보였다. “우리 곡이면 뭐 어때. 결국 지금 공연을 하는 사람들은 저 사람들인데. 뭐 어떻게 할 거야. 무대에 나가서 “이거 곡 만들고 부른 원작자는 우리에요! 다 꺼져! 지금부터는 우리가 공연한다!” 뭐 이렇게 외칠 거야? 완전 민폐야 그거.” “그래. 신난 건 알겠지만, 저 사람들 공연을 방해하는 일이잖니. 그냥 이런 일도 있구나, 기념으로 생각하고 넘어가는 게 좋단다.” 혜인까지 거드는 상황. 이서는 처음의 신났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다시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그랬다. 그들 그룹 사운드가 일본 밴드의 곡 하나를 커버했는데, 갑자기 관객석에서 “그거 우리 곡인데요?” 하면서 아는 척 하고 막 올라오려고 하면 상당히 난감하겠지. 그렇기에 그들을 무대 근처로 불러올린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다. “저기, 그쪽 아가씨들. 이 쪽으로 좀 와보시겠어요?” 공연을 하고 있던 밴드였다. * * * 스테이지 구석에 몰려 있는, 이 라이브 하우스와는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여성 집단. 살짝 떨어져 있어 자세히 보기는 어려웠지만, 멀리서 봐도 외모들이 상당해 보이는… 연령대로 보면 여고생 같아 보이는 애들이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해보이는 얼굴인 것은, 글쎄 착각일지도. ‘드디어 나도 여고생 팬이 생기는 건가. 길었다, 무명 밴드맨 생활…’ 그는 뭔가 인정을 받은 것 같은 느낌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저들은 첫 타임부터 계속 이 라이브하우스에 있었지만, 그런 정신건강에 도움되지 않는 사실은 떠올릴 필요 자체가 없다. 인생은 결국 자신을 납득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 감정은, 그가 ‘과오’를 부르는 중 그 애들에게서 한국어가 튀어나왔을 때 더 그러했다. 어떤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한국어로 말을 한 걸 보면 그와 그들 밴드에게 반응을 한 것으로 보였다. 아무튼 좋은 일 아닌가. “저기, 그쪽 아가씨들. 이쪽으로 좀 와보시겠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무대 앞을 가리켰다.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의 말에 서로 떠드는 아이들. “뭐라는 거야?” “이쪽…으로 와보라는데요…” “왜?” “저야 잘 모르…죠…” 전혀 알아듣지 못할 한국어 대화가 이리저리 오간 후, 그 중 한명이 살짝 뚱한 표정을 하며 무대로 걸어왔다. “와…” 정말, 아니 매우 이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외모에, 밴드의 베이스가 그런 탄성을 무의식적으로 흘렸다. 그도 동감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WHY?” 무대 앞에 와서 짧은 영어를 뱉는 아이. 그런 아이를 보며, 그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뒤졌다. 지인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당히 최근에, 뭔가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을만한 그런 것에서 봤는데. AV같은 건 당연히 아닐 것이고, 그럼 뭐지. 그라비아? 아니다. 유튜브 영상?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럼 어…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의 머릿속을 스쳐나가는 생각. “그룹 사운드! 과오! 기타! 맞죠? 그 보컬 맞으시죠?” 얼마 전에 봤던 영상. 방금 연주했던 곡, ‘과오’가 처음으로 공개되던… 한국의 오디션 프로그램, ‘Invasion from seoul 2024’의 결승전 무대. 단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곡으로 현장의 관객들을 울리고, 그리고 그들에게서 떼창을 유도해냈던… 그 밴드의 보컬이자. 그야말로 귀신이라고 해도 모자랄 정도의 기타 실력을 보여주었던 그녀, ‘하수연’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