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인 이미지를 주고 싶은데…’ 명전은 노트를 끼적이다, 입술 위에 펜을 올렸다. 당시에는 “초장부터 박살을 내겠다!” 라고 했지만, 그렇게 본격적으로 뭔가를 하려고 하니 잘 안 나가는 느낌. “뭐 하냐?” 그런 와중 옆에 털썩 앉은 것은 다인이었다. 끼적이는 노트를 보고 이게 무언가 하고 쳐다보는 그녀. “작곡해? 안 듣고도 그게 돼?” “공부하면 가능해.” 예나 지금이나 악보 모르고 이론 몰라도 작곡 잘 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명전은 그렇지 않았었고, 그 때문에 필사적으로 작곡 지식을 습득했다. 화성학부터 시작해서 블루스나 재즈 이론에 대한 것들을 마구잡이로 배웠던 적이 있었지. 지금 작곡을 하는 것도 명전이 그 시절에 배웠던 이론들을 바탕으로 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굳이 곡을 쳐보지 않아도, 당시 배웠던 이론과 ‘하수연’의 재능이 합쳐지면 어느정도는 머릿속으로 구상이 가능했으니까. 물론 그런 게 가능하다 한들… 당장 다음 회차에 연주할 곡을 뽑아내고 있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다인아.” “응?” “압도적인 게 뭐라고 생각하냐?” 다인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명전을 쳐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살짝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것?” 이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살짝 새어나왔다 떨어졌다. “그건 왜?” “전에 말해줬잖아. 오디션 프로그램 나간다고.” “그러긴 했지.” “첫 번째 과제가 ‘이상향’인데, 나는 이 주제로 남들이 “우리가 쟤들 이길 수 있겠지?” 라는 생각 자체를 못 하게 만들려고 하거든. 엄청난 실력을 보여줘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다인. 명전은 골치아프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고는 말했다. “그런데 그런 막연한 이미지만 있으니까 뭔가 떠오르는 게 없단 말이지.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뭔가 떠오르는 그런 게 있나 싶어서.” “글쎄… 그런 거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따로 없는데. 압도적이라.” 다인은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그런 와중 뒤늦게 들어오는 삼인방 중 2명. 명전은 수현과 채린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채린. “뭐 잘못 먹었냐? 왜 이래?” “강채 왜그럼?” 채린의 그런 모습에 놀라는 두 사람. 명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아~ 압도적이라고 하니까 예전 생각 나서.” “무슨 예전 생각.” “그때 있잖아. 수연이가 주희 선배 싸다구 날리던 날. 그때 나는 진짜 ‘와 얘는 진짜 압도적인 미친년이다,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 라고 생각했었거든.” 이전에 한번 들었던 이야기. 채린은 그때의 심정을 다시 풀어놓기 시작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우리 중3시절에 막 노는 여자애들 언니들 자기들끼리 기싸움하고 그랬잖아.” “그랬었지.” “나는 그래서 뭐 술먹었으니까 선배한테 개기고 말대꾸 따박따박하면서 기싸움 안 지고 ‘아 나는 기존나쎈년임~’ 뭐 이런식으로 나갈 줄 알았는데. 바로 선배 뺨을 날리니까. 그때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와 얘는 안 된다. 뭔가 따라할 엄두가 안 나는…” 신난 채린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과거의 자신이 저질렀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듣다, 명전은 ‘압도적임’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따라할 엄두가 안 난다, 뭐 그런 거지?” “어? 어… 보통 선배 뺨 치는 걸 따라할 엄두가 나는 사람이 있나?”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명전의 질문에 살짝 당황한듯한 채린. “그러고 보니 다인 너 뭐 그거는 어떻게 됐는데. 주희 선배 이야기.” “권지가 그거 관련해서 말할거 나한테 있다고 하던데…” 같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명전은 아이들을 무시한 채로 작곡 노트에 음표를 끼적이기 시작했다. * * * 인베이전 프롬 서울 2회차. 정식 명칭은 INVASION FROM SEOUL 2024. 1회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탓에 2회의 제작 여부가 상당히 불투명했고, 공식적으로는 제작발표회조차 들어가지 않은 상황. 하지만 이름을 밝히지 않은 [밴드 오디션 프로 참가자 모집] 공고라던가, 서울 곳곳에 등장했던 밴드들의 촬영 장면이라던가, 최근 인터넷에 돌기 시작한 [인베이전 2024의 0화와 1화 분량은 촬영되었고 현재는 2화 분량이 촬영되고 있다]는 루머들을 볼 때… 인베이전 2024가 촬영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아, 진짜 더럽게 방청하기 힘드네.’ 그리고 여기에, 인베이전 2024를 누구보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반쯤 밀수하다시피 핸드백에 아빠백통(캐논의 망원렌즈를 말함)과 DSLR을 넣어온 여성. 그녀는 보이밴드 [2MAJOR]의 골수팬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2MAJOR]의 기타인 ‘한승윤’의 팬이었다. 유망한 연습생 시절부터 팬질을 하며, 한승윤의 남돌 데뷔를 자신의 대학 입시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그녀였건만… 정작 그녀 본인은 생각지도 못하게 대학을 잘 갔는데, 한승윤은 무슨 이상한 결정을 했는지 남돌이 아니라 밴드돌이 되어버렸다. 기타도 잘 치지도 못하는 놈이 도대체 뭔 지랄이냐 머리를 뜯으면서도, 그녀는 애정 50% 의무감 50%로 한승윤과 [2MAJOR]의 팬질을 계속해나가고 있었다. ‘아니 쓰발. 콘서트나 시키고 예능 스케줄이나 잡던가 하지 이런 프로에는 도대체 왜 내보내는 거야?’ 그녀는 그런 푸념을 내뱉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솔직히 2MAJOR는 어떤 식으로든 이런 프로에 나와서 실력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좀 뜨고 사진이나 몇장 건질 수 있으면, 그거로나마 만족해야 하는 처지의 그룹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에 뜬다는 [TWR]이나 [WEKIDS] 같은 돌밴드(솔직히 돌밴드란 점에서 그놈이 그놈이긴 했다)들도 이 프로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나마 좀 유명한 애들 있어서 다행이네.’ 어차피 2MAJOR가 우승 못할 실력인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 인디밴드들 오디션에 꼈다가 광탈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팬들은 고개도 못 들고 다닐텐데, 그나마 같이 탈락할 동지가 있어 다행이었다. 스포일러 방지용 서약서를 쓰고, 방청객석에서 방송을 기다린다. 어둑하고 따뜻한 환경 탓에 슬 잠이 올 때쯤, 시작된 촬영. “오늘의 무대는, 밴드들의 자작곡 경연이 펼쳐질 예정입니다. 방청객 분들께서는 배부받은 투표기를 통해 투표를 하실 수 있으며…” 투표 방식 및 안내를 맡은 스태프의 멘트. 이후 잠시 더 기다리니 입장하는 밴드들. 무대를 정중앙에 두고, 좌우로 15팀씩 총 30팀이 계단식 무대에 앉아 대기를 시작한다. “여러분,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첫 무대! 큰 박수로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4인조도적단!” 첫 무대가 시작되고, 소개와 함께 4명의 밴드가 올라와서 자신들의 곡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어쩌고 저쩌고. 관객석에는 잘 들리지도 않아, 그녀는 핸드폰을 슬쩍 켜 이번 오디션의 밴드 명단을 살펴보았다. ‘4인조도적단… A티어.’ 어떤 인디밴드 빠가 만든 리스트. 30개의 밴드를 전부 정리하고, 장단점과 함께 티어와 우승 가능성까지 나눠놓은 자료. 이 자료에 의하면, 지금 공연을 하는 밴드는 A급에 속했다. 우승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밴드. ‘얼굴도 나쁘지 않네. 노래는 솔직히 잘 안 들리지만. 음향 장비 때문인가?’ 발전을 하면 뭐 하냐. 이런 기본적인 퀄리티에서 개좆소 티를 내는데… 라고 Mtown에 대해 푸념하며, 그녀는 2MAJOR의 위치를 다시 바라보았다. B급. 우승 가능성과 실력 모두 중간인 밴드. 다행인 것은 WEKIDS나 TWR도 똑같이 B급이라, ‘~ 선에서 정리’ 소리까지는 안 들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쟤들은 진짜 잘하네.’ 밴드 이름이 [Mystica]라고 했던가. 아까 전 뭔가 준비해온 것 같았는데 삐걱대다가 무대를 제대로 못 했던 [쿠바미사일위기](무려 A급이었다), 보컬이 삑사리를 냈던 [울림 스톤즈], 밴드 음악은 2MAJOR 외에는 그다지 들어본 것 없지만 그런 그녀의 귀에도 영 아닌 것 같이 들린 NOTK. 그런 밴드들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은 느낌의 공연. “저희 팀은 Mystica를 픽하겠습니다.” “저희도 Mystica를 선택하겠습니다.” “와… 이거 경쟁 이렇게 붙을 줄은 몰랐네. 그런데 이쪽도 픽이요.” “아 이러면 나가린데… 일단 저희도 끼겠습니다.” 그래서인지, Mystica를 픽한 멘토 팀은 4팀이나 되었다. 그런 멘토 팀의 반응에 호들갑을 떠는 MC. “아! 멘토 4팀이나 Mystica를 픽했습니다! 4파전인가요! 지금까지 픽을 아껴뒀던 것은 이 때를 위해서였을까요!” ‘2MAJOR는 한놈밖에 픽 안 하더니… 여기 경쟁 붙으려고 그런 거였나?’ 그래도 픽을 받은 게 어디인가. 0픽 받고 바로 떨어진 밴드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흥미롭게 서로 선택받기 위한 멘토들의 입씨름을 지켜보았다. “[김수찬밴드]를 픽한 멘토 팀은… 없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방금 전 공연을 마친 밴드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러나 그럴만한 연주였다. 그녀가 듣기에도 뭔가 거창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 정도만 느껴진… 픽을 받지 못하는 게 이해가 될만한 공연. 그런데 밴드는 내려갔으나, 바로 진행 사인이 나오지는 않는다. 잠시 소강상태가 된 공연장. 세트 옆쪽을 보니 스태프들과 MC가 회의를 하는 듯한 모습. 몇분이 지나고, “뭐지?”, “무슨 일 있나?” 라는 관객들의 웅성이기 시작하자… 산만한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MC가 무대 위로 올라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벌써 6번째 0픽 팀이 나왔군요.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멘토들이 픽을 전부 소진하지 않을 경우, 한번 더 차례가 돌게 됩니다.” 그런 MC의 말에 시끄러워지는 공연장. “부활이 가능한 건가?” 라고 되뇌이는 사람도 있고, 자제하지 못해 대기석에서 “야쓰!!” 라고 소리를 지르는 밴드도 있다. 이런 상황이…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왜 픽을 아끼고 있는 것인가. 4번이나 기회가 있다던데 그게 아낄 이유가 되는가. ‘하긴 아까 룰 설명 들을 때, 멘토가 맡은 팀이 우승했을 경우 멘토에게도 상금이 나간다고 했었지…’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만 했다. 뭔가 뒤에 유력한 우승후보가 있으면, 그 밴드를 픽하고 상금을 타갈 확률을 높인다 뭐 그런 전략인가? 그녀는 다시 한번 더 밴드의 리스트를 보았다. ‘근데 S급이라는 Mystica도 4픽이잖아. 그럼 이 다음은 누가 남은 거야?’ S급에는 팀이 하나밖에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핸드폰 화면의 일부를 가리고 있던 손가락을 치웠다. 밴드의 이름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럼 드디어 이 차례가 되었군요. 많은 멘토 여러분들께서 기다리던, 바로 그 차례!” MC의 말에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한 밴드들. Mystica 때에도 그러긴 했지만, 지금은 강도가 훨씬 심한 느낌. 관객석에 들릴 정도의 목소리도 들린다. “쟤들이라고?”, “좆된다니까.” 말들. 그리고 밴드들의 주목을 받으며 세트로 걸어내려오는 것은 4명의 여자아이들이었다. 밴드들 사이에 묻혀 보이지도 않을만한 체격의… 잘 쳐줘봐야 여대생. 적정 연령은 여고생으로 보이는 그런 아이들. 하지만 촬영장은 그 어느때보다도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마치 저 4명이, 여기 합친 모두들을 상대해도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는 듯. 그녀는 핸드폰의 스크롤을 쓱 내려 읽어보았다. 밴드의 설명이 써 있었다. [2024년 데뷔한 밴드. 보통 밴드들이 2~3년은 굴러야 가능한 앨범 발매, 클럽 정기공연, 페스티벌 데뷔 등을 1년만에 몰아서 도장깨기중인 밴드. … 현재 홍대 밴드씬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애들. … 이 밴드 기타 치는 거 듣고 넥부수고 기타접었다는 기타리스트들이 한둘이 아닌 수준임] 그 밑으로도 휘황찬란한 미사여구가 잔뜩 붙어 있는 그런 내용. 그녀는 홀리기라도 한 것 마냥 스크롤을 다시 올려 밴드의 이름을 쳐다보았다. ‘밴드의 이름은…’ 어느새 끝난 세팅. 무대 중앙에 선 기타리스트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그룹 사운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