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성이는 밴드들. MC는 밴드의 반응을 무시한 채로 스크린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시점에서 두개 궁금하신 점이 생기겠죠. 첫째! 멘토에게 선택받지 못한 밴드는 어떻게 되는가?” 스크린에 떠오르는 문구는, REPECHAGE. 문구 밑에는 [레파차지 : 패자부활전]이라는 내용이 적혀갔다. “이번 라운드에 선택받지 못한 밴드는, 이후에 있을 패자부활전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작곡을 하라는 것은 좋다. 그런데 ‘주제’는 무엇인가?” MC는 잠시 뜸을 들이다, 큐카드를 든 손으로 카메라 정면을 가리켰다. “주제는 바로… ‘이상향’입니다.” “이상향?” MC의 말에, 여지껏 잠자코 있던 수연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 하냐는 듯 중얼거렸다. “어떤 장르이던, 양식이던 좋습니다! ‘이상향’을 나타낼 수 있는 음악을 가지고 오십시오. ‘우리는 이런 음악을 하고 싶다! 우리의 목표는 이것이다!’ 라고 한 곡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바로 그런 곡!” ‘그런 게 가능한가?’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현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말을 마친 MC가 무대에서 내려갔다. 그 다음 올라오는 스태프들. “오늘 녹화는 0화, 1화 분량이구요. 다음 주는 오늘 말씀드린 미션을 바탕으로 2화 분량을 촬영할 겁니다. 그 점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구요…” 현아는 어느새 올라온 메인 PD를 바라보았다. 윤동욱이라는 이름이었던가. “작곡 주제는 말씀드렸다시피 ‘이상향’입니다. 설명을 더 돕자면, ‘여러분들이 현 시점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음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물론 다른 해석도 좋습니다. 간단해도 좋고, 복잡해도 좋습니다. 극단적으로는 “나는 떴다떴다 비행기를 하고 싶어” 라고 하면서 그걸 가져오셔도 됩니다.” 피디의 말에 밴드들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웃음. 그러나 실제 웃음보다는 리액션에 가까운 반응이다. “물론 채점 자체는 절대평가로 이루어지니까 떴다떴다 비행기를 가져오시면 당연히 낮은 점수를 받겠죠? 감안하셨으면 좋겠구요.” “발표한 곡만 아니면 된다는 건가요? 예를 들어서 다른데서 공연을 했는데, 뭐 정식 음원으로 발매한 적은 없다던가.” 피디의 말이 끝나자, 웅성대는 밴드 속에서 누군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피디는 슬쩍 웃더니 대답했다. “뭐… 가능은 하지만, 적발시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 말씀드리고 싶네요.” 피디의 기분나쁜 빙글거림에 움찔하는 밴드맨. 피디는 설명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다음 주에는 멘토들이 4팀씩 픽을 하고, 선택받지 못한 6팀은 아까 안내받은 것과 같이 패자부활전 그룹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웅성대는 밴드들. 2화만에 6팀을 떨군다니 너무하지 않나? 하는 발언도 새어나온다. 하지만 크지는 않다. 다들 각오했기 때문일지, 패자부활전이라는 마지막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인지, 30팀 중 6팀이면 비율상으로는 적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지… “무섭네.” 옆에서 들려오는 이서의 말. 표정을 보면 근심걱정이 가득해보인다. 현아는 “그렇네요~” 라고 대답을 하며 생각했다. ‘작곡 미션… 이라는 거겠지?’ 한국 방송보다는 애니메이션을 더 많이 보는 현아지만, 어찌됐든 오디션 프로그램의 구조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 지식에 비춰보자면, 이번 미션은 참가자들의 역량을 테스트하는 미션으로 보였다. ‘수연님이 그랬던 거 같은데. 오늘 곡은 제일 자신있는 거로 가지고 오라 했다고.’ 밴드가 가장 잘하는 것과, 밴드가 가장 하고 싶은 것. 이 둘을 번갈아 보여주는 것이 제작진의 의도가 아닐까 하고… 현아는 생각했다. * * * 콜로세움과도 같은 세트 중앙에 악기들이 설치된다. 보통의 공연처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올려다보는’ 형태. 관객은 위에 있고, 밴드는 아래에 있다. 이는 역전을 말한다. 이전까지 이들은 팬들을 몰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에게 선택받아야 하는 처지이다. 관심을 받던 우상에서 관심을 받아야만 하는 대상으로의 변화. 그런 아이러니함이, 대중들이 오디션 프로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동욱은 그런 잡생각을 하며 팔짱을 꼈다. 락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윤동욱에게 경영진이 느닷없이 꽂아버린 프로그램, [인베이전 프롬 서울]. 수단과 방법을 (최소한의 선은 지키면서)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흥행시키라는 말에, 동욱은 몇개월 동안 프로그램 구성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선. 이 또한 난관이었다. 심사야 일반인+전문가가 해준다지만, 동욱 또한 메인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어떤 밴드가 유망하니 분량을 더 줘야 하고 어떤 밴드가 글러먹었으니 분량을 안 줘야 하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코피가 터져가며 밴드들의 음악을 들었고, 밴드 음악과 장르에 대하여 공부를 했으며, 예선 영상도 봤다. 그렇게 밤을 수도 없이 샌 끝에, 동욱이 내린 결론. ‘싹수가 보이는 애들은 드물군.’ 1회가 18개 밴드라고 했던가. 하지만 2회는 30개 밴드다. 그 중 1회와 중복되는 밴드는 몇개 되지도 않고. 이에 대해서 인베이전 2회를 기획한 경영진은, 대책없이 “규모가 크면 아무튼 흥행이 되겠지!” 라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참으로 정신나간 생각이 아닌가? 아무튼 뭔가 늘리면 다 될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미친 사람의 발상이다. ‘낙하산 새끼가 그렇지 뭐.’ 동욱은 그렇게 푸념하면서 공연을 시작한 밴드를 바라보았다. 현장에서 라이브로 들으니 색다른 맛이 있긴 했지만, 쟤들은 여전히 별로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여기 나온 밴드들은 대충 4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 괜찮아보이는 녀석들. 음악과 비주얼이 둘 다 좋거나, 한쪽이 모자라긴 해도 약간 모자란 정도. 예를 들어 저기 보이는 [쿠바미사일위기], [설가향], [4인조도적단], [Muzaku] 같은 밴드. 둘째, 실력은 좀 낮아도 팬덤이 공고한 녀석들. 주로 기획사를 등에 업은 보이밴드들이다. Projeckt 6의 후배를 자처하면서 나온 [TWR]라거나, 중소 기획사였던 [2MAJOR], 대형 기획사 소속의 [WEKIDS] 같은 밴드. 이런 쪽은 그래도 팬덤빨로 길게 갈 수 있겠지. 셋째, 아무것도 안 되어보이는 녀석들. 딱 봐도 1라운드 2라운드쯤에 광탈할만한. 오디션 프로 본선에 올라올 정도로 음악을 잘 하긴 하는데… 그 이상은 안 되는. 특출나지 않고 비주얼도 마찬가지인. 예를 들어 지금 공연하고 있는 [울림 스톤즈]라거나 [NOTK], [N8 R1der] 같은 어정쩡한 부류.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 제일 골치아픈 부류. ‘저런 애들이 제일 다루기 골아프지…’ 동욱은 세트 중턱쯤에서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있는 여고생을 보았다. ‘하수연’이라고 했던가. 저 애가 소속한 [Group Sound]라거나, 저기 밑에 몰려 있는 [Mystica] 정도가 4번째 부류에 속했다. 이들의 문제점은 음악을 잘한다는 것이다. 음악프로에서 그게 뭐가 문제가 되겠냐만은, 실제로 문제였다. “되도록이면 비주얼 좀 되는 남자 밴드 애들로. 어? 동욱아.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를 메인 피디로 꽂아넣었던 박 이사가 했던 말. 2회 인베이전의 제작을 지원한 기업인 [C:RSKY]가 ‘음악성’과 ‘비주얼’을 다 잡는 보이밴드를 원하며, 그 때문에 이 프로그램 제작을 지원했다던 이야기. ‘대놓고 조작 같은 건 취향이 아닌데.’ 동욱은 그렇게 생각하며 [Mystica]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저 쪽은 비주얼이 너무 아니라서, 실력이 좋아도 금방 떨어져나갈 것 같긴 했지만… [Group Sound]는 비주얼도 출중하다. 여고생 4명으로 이루어진 팀이라니! 제작 발표회때 이 소식이 기사로 나가면 도대체 어떤 반응이 몰려올지. 게다가 실력 또한 문외한인 동욱이 듣기에도 좋았다. 그래서 더 문제였고. “다음 팀 들어가겠습니다!!” 스태프의 말에 다시금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밴드들. 동욱은 생각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다가 이내 놓아버렸다. 제작지원사한테 청탁을 받은 사람은 '박 이사'고, '윤동욱'은 이 프로그램을 흥행시키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다. 회사에 대가리가 깨져도 박 이사가 깨지겠지, 그는 아닐 것이었다. * * * “룰이 복잡해.” 명전은 룰이 적혀진 책자를 들여다보다가 책상에 내팽겨쳤다. 경쟁을 유발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룰을 추가할 것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뭐가 많아도 너무 많지 않은가. “그렇긴 하죠. 프로그램 진행 쪽에서는 변수를 최대한 만들 수 있는 룰이 좋으니까요.” 현아가 책자를 집어들며 말했다. 명전도 그런 점은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단순화하는 게 시청자에게 좋은 방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기존에 발표된 곡이 아니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을까?” “제 생각에는 이거 때문인 것 같은데…” 이서의 중얼거림에, 현아가 프로그램 참가 당시에 썼던 계약서를 꺼내들어 한 곳을 짚어주었다. [프로그램 참가자가 특정 조건 내에서 제작한 음원의 저작권은 아래의 조건 하에서 당사에 양도될 수 있습니다] 밑에 설명이 잔뜩 적힌 문구. “곡 수입 때문인 거 같아요. 기존에 만들어놓고 묵혀놨던 곡 같은 경우는 저작권 양도가 애매해지는 것 같으니까…” “이런 건 또 언제 봤어. 대단하네.” “흐헤헤.” 명전의 중얼거림에 현아는 흐물흐물하게 웃었다. 몇장이 넘는 계약서 언저리에 적혀 있는 문구를 다 읽었단 말인가. 명전은 이런 세부 조항 같은 건 ‘서명전’ 시절에도 잘 안 읽었다. 때문에 실연비 편곡비 못 받은 곡도 많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버릇이 고쳐지지도 않았다. “유서. 혹시 아는 밴드들 있었어?” ‘언제 또 그런 별명이 생긴 거냐?’ 말이 잠시 끊긴 틈을 타 이서가 서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많던데. Mystica 같은 경우는 메탈계에서 실력으로 알아주는 밴드였고. 4인조도적단도 하드락 잘 친다고 유명하고.” 서하가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명전은 참으로 흉흉한 별명이라고 생각하며 천장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이상향이라.’ 살 만큼 살아 본 명전으로서는 ‘음악적 이상향’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그 또한 옛날 음반을 들으면서 ‘Good old days’를 떠올리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날 음악이 좋다’를 ‘옛날 음악이 최고다’로 바꾸어서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이상향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닿지 못하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자는 살아있기에 이상향이 계속 움직이고, 죽은 자는 죽었기에 이상향에 영영 도달하지 못한다.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데. 그냥 아무거나 만들어야 하나? 잘 만들 수 있는 걸로?” “[현 시점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음악]이라고 보면 좀 명확하지 않아? 예컨데 수연이 너는 블루스라던가.” “나라고 매일 블루스를 치고 싶은 건 아니지. 일년으로 치면 한 300일 정도일까.” “그 정도면 그냥 매일이잖아…” 명전은 잠시 헛소리를 한 다음, 황당해하는 이서를 두고 생각에 다시 빠졌다. 어떤 곡이 좋을까. 선호로 따지자면 명전이야 블루스를 하고 싶긴 하지만, 그것은 ‘서명전’으로서의 선호이지 [Group Sound]의 것이 아니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최소한 명전은 그렇게 생각했다. “첫 경쟁이니까, 좀 힘을 빼고 하는 게 좋을까? 얕보고 들어오면 잡아먹게…” “아뇨.” 고민에 빠진 명전의 중얼거림. 그를 끊은 것은 현아의 단호한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 갑자기 조용해진 테이블. “뭐?” 그리고 무의식적인 명전의 반응에, 현아는 자신이 목소리를 내놓고도 금새 주눅이 든 표정이 되어버렸다. “아니, 성질낸 거 아냐. 말 해봐. 아니 진짜 성질낸 거 아니라니까.” 일순간 소라게가 되어버린 것 마냥 쏙 들어가버린 현아. 잠시간의 실랑이 끝에, 명전은 그런 현아를 다시 끄집어내고는 말했다. “어… 제 생각에는.” “제 생각에는?” “이번 주제는 사실상 자유 주제인데, 초반 라운드에 이런 주제는 더 안 올거라고 생각해요…” “근가? 그럴 거 같기도 하고.” 현아의 말을 들은 이서가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현아는 탄력을 받은 듯, 살짝 더 높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1등 어드밴티지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고, 다음 진행방식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강하면 강할수록 다른 밴드들이 우리를 선택할 확률이 낮아지니까.” 명전은 현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배틀로얄' 같은 거라면 약자들이 뭉쳐 강자를 이기는 경우도 존재하겠지. 하지만 명전이 참여한 것은 밴드 오디션 서바이벌.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럼 초장부터 박살을 내 놓을까. 오늘은 얌전했으니까.” “초장을 왜 박살을 내?” 뜬금없는 이서의 질문에, 명전은 이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순진무구한 그 표정. 그는 그저 '얼마 전에 신문에서 문해력이 감소하고 있다느니 뭐니 그러더니, 산증인이 여기 있었구나…' 하고 탄식 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