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밴드 Group Sound, 그리고 리더를 맡은 기타 하수연입니다.” 반쯤 깐 이마, 찰랑거리는 머리. 두께감이 있는 맨투맨과 체크무늬가 들어간, 길이가 허벅지 반 정도 되는 플리츠 스커트. 종아리를 살짝 가리는 흰색 양말과 앙증맞은 흰색 신발. 관객들에게서 쏟아지는 박수. “이쁘다!” 같은 류의 환호성도 외쳐지지만, 기타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신경쓰지 않으며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어지는 밴드 멤버의 소개. 베이스 최이서, 키보드 정현아, 드럼 유서하. ‘이미 듣긴 했지만 진짜 죄다 이쁜 아이들 뿐이군.’ 외모로 뽑고 연습을 혹독하게 시키기라도 한 것일까? 하고 수렬은 생각했다. 리더로 보이는 아이가 제일 이쁘고, 나머지는 살짝 편차가 있긴 했지만. “그리고 트위터로 공지드렸듯이, 오늘은 저희가 신규 발매할 EP의 선공개곡인 [잿빛의 나날들]과… 그 외 미공개곡을 위주로 공연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죠? 라는 말에 환호성으로 답하는 사람들. 수렬은 그런 관객들을 슥 훑어보았다. 이미 야외공연장은 공연을 볼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다. 미리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 같은 팬들과, 뭔지도 모르고 일단 구경이나 하자고 온 것 같은 행인들. 영상을 찍고 있는 것 같은 여고생들 등. 팬들인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인파를 정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을 정리하고 있는 골수팬들은… 전혀 인디 밴드씬이랑 관계가 없을 법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신기하구만.’ 수렬은 음악 평론가지 인디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인디 밴드 씬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수렬이 평가하기에, 인디씬의 가장 큰 문제는… 즐기는 사람만 즐긴다는 것이다. 밴드는 신인이 나오는데 소비자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룹 사운드’는 그 명제를 거스르고 있었다. 인디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을, 홍대의 허름한 인디 밴드 공연장으로 끌어온다. 파라독스 사장이 “이대로 가면 빌딩 사겠다!!” 라고 환호성을 질렀다는 말은 아마 과장이 아닐 터.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수렬은 생각의 화로를 태우다, 덮어서 꺼버렸다. 평론가는 씬의 구조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음악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일. “공연 시작하겠습니다~!” 그 사이, 전면에 나온 베이스가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시작되는 음악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일본의 밴드곡. 발랄한 가사와 율동, 기괴한 뮤비의 내용으로 틱톡에서 인기를 끈다던 그런 노래. ‘첫 곡은 커버곡인가.’ 음악 평론가인 수렬의 입장에서는 약간 실망스러운 선택이다. 하지만 관객을 끌어들여야 하는 야외공연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선곡. “뭐야?” “공연이라도 하나?” 원곡보다 좀 더 화려한 연주 때문일까. 이미 발디딜 틈 없이 빼곡함에도 불구하고 이끌려오는 사람들. 기웃대던 커플은 어느새 나무에 기대서 음악을 듣고, 보드를 타고 가던 젊은이는 보드 위에 올라서서 목을 쭉 빼고 있다. “그럼 이제 저희의 신곡이자, 첫 곡을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주세요, [잿빛의 나날들].” 커버곡 몇 개가 끝난 후, 드디어 시작된 선공개곡의 연주. 드럼스틱이 4번 쳐짐과 동시에 악기들이 음을 발한다. 음원보다 살짝 더 낮은 템포. 더 리드미컬한 베이스. 과하다고 생각해서 덜어냈던 것일까? 아니면 대중성의 문제로?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실력 문제로 발생한 일은 아닌 듯 했다. 하지 않았던 숙제 사물함 속에는 거북이가 있어 그날의 나는 매점 앞에 서서 뛰어가는 토끼를 바라보았네 저 멀리서 읊조리는 듯한 음성. 살짝 난해한 가사는, j-rock의 감성을 살리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일까. 야외 공연을 위해 설치된 포터블 앰프로도 확연하게 느껴지는, 아득하고도 아련한 감정이 그를 약하게 휘감았다. 수렬은 '그룹 사운드'의 평가를 한단계 위로 조정했다. 음원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도 못해, 열화판 수준의 공연을 선보이는 어중이떠중이 밴드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 거북이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너와 나는 내일의 열차에서 새하얀 사과를 베어물었지 음원에서 들려주었던 풍부한 fx는 없지만 수렬은 그 공백을 느끼지 못했다. 음원보다 더 활발히 움직이는 기타와 키보드 때문일까. 비교하자면… 담백하고 깔끔한 원본, 그리고 끈적하지만 풍부한 라이브. 거북이는 사흘 전에 떠나버렸어 그 애는 어딜 가는지 모른 채로 이미 내린 첫 눈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더 네게 찾아올 때 “잿빛이여, 내게로 돌아와.” 노래의 끝에, 모든 악기가 다 멈추고. 간결하게 멜로디만을 연주하던 기타만이 독백과 같이 끝을 맺는다. 울려퍼지는 박수. 수렬은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박수를 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공연 보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미공개 곡을 들려드리도록 할게요. 아직 제목은 따로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작게 울리는 환호성. 기타는 고개를 끄덕이자, 드럼이 빠른 템포로 스틱을 4번 친다. 그리고 시작되는 연주. 이제까지 연주되었던 낮은 템포의 곡들과는 다르게, 확 올라가는 bpm. 앰프를 통해 뿜어지는 기타의 톤도 다르다. 미들로우를 확 날려버린 경쾌한 소리. 그리고 그에 맞춰 달리는 드럼과, 베이스, 키보드까지. 너를 만난 그 날의 내 마음은 마치 파도와도 같이 오늘의 나를 조금 더 나아가게 만들어 베이스를 맡은 아이가 내는, 발랄하면서도 귀여운 목소리. 사랑빛 노래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느낌의 창법과 가사. 너를 만난 오늘의 내 마음은 물 위의 종이배처럼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끊임없이 요동쳐 수렬은 격동하는 한국에서, 대쪽같은 소신을 지켜가며 살아왔던 사람이다. 그의 삶은 전투적이었고, 평화롭다기보다는 쪽배에 의지해 격랑을 헤쳐나가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인생을 살아온 수렬에게도, 이 노래는 뭔가 간질간질함을 느끼게 했다. 왠지 자신도 어릴 적, 자신의 아내와 여름 밤길을 걸으며 사랑을 속삭였던 것 같고. 청춘을 노래했던 것 같고. ‘물론 나는 선을 보고 결혼했지만.’ 선공개곡을 릴리즈하면서, 이 밴드는 [이번 EP에서는 우리가 지금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노래하겠다] 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수렬은 [잿빛의 나날들]을 들으면서 ‘이게 과연 그런 노래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이 노래는 그런 수렬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나는 이제 이 미묘한 거리를 너와 뛰어넘고 싶어 흔들리며 떠도는 이 마음을 너에게 선물하고 싶어 “감사합니다!” 연주가 끝나자, 베이스가 그렇게 외치며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박수. 팬들이 외치는 환호성과, 행인들의 “얘들 뭐야?”, “혹시 이 밴드 이름이 뭔지 아시나요?” 같은 이야기들이 섞여 잠시 아수라장이 된 공연장. 수렬은 자리를 뜨며 장문평의 이름을 어떤 것으로 정할지 고민했다. 신인 천재 밴드 등장! 은 너무 상투적인 느낌이고. 인디 밴드에 혁명이 시작되다! 같은 것은 너무 거창하다. 하지만 수렬은 그렇게 쓰고 싶은 마음이었다.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 * * [최근 인디씬에서 주목받고 있는 밴드라고 하면, 꽤나 많은 밴드를 꼽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과감하게 그 중 필두를 ‘그룹 사운드’라고 하고 싶다. 정식발매한 음원 하나 없이 클럽 파라독스를 매진시킨 전력이 있는 밴드. 천상의 실력을 가진 기타리스트가 있기로 유명한 밴드. 밴드 구성원들이 모두 상당한 미모를 가진 밴드. 하지만 그들이 누리는 유명세에 비해, 실제의 성과는 매우 미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정식발매한 음원 하나 없다는 것은 … … 뿐만 아니라, 편곡과 연주 역시 훌륭하다. 기타의 연주는 훌륭하지만, 밸런스를 해치지 않을 정도로 들어가 있다. J-Rock의 문법에 영향을 받되,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면 또한 신인 치고는 과감한 행보. 단지 아쉬운 것은 믹싱과 마스터링 정도로… … 이 곡을 듣고 누가 이들이 신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대가의 경지에 이르른 기타 연주와, 적절하게 배치된 베이스, 키보드, 드럼. 감히 말하건데, 이들이 2024년 한국 밴드씬에 등장한 것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수렬 ★★★★☆(4.5 / 5)] “아주 극찬이구만, 극찬.” 명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인터넷 탭을 껐다. 그의 노림수가 분명 먹힐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잘 먹힐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무엇이 김수렬의 감정을 이렇게 자극했을까. 그가 채호근 교수에게 부탁했던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라이브 공연이 있다고 말해달라, 단지 그 정도. 채호근 교수는 “수렬이가 그런 습관이 있긴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아는 건가요?” 같은 질문을 했지만, 명전은 얼버무리며 넘겼다. 뭐 어떻게 설명을 하겠는가. “제가 전생에 서명전이었는데요, 김수렬 평론가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라고 할까? ‘그런데 참…’ 이렇게 호평을 써주니까 좋기는 하다만, 김수렬 평론가는 그가 ‘서명전’이던 시절에 항상 그의 앨범에 악평을 하던 사람이었다. 1.5점 내지 2점을 주는 게 보통이었던 평론가. 기억에 남는 문장은 [대가의 솜씨로 빚어낸 80년대 싸구려테이프 멜로디], [기타만 잘 쳐서 되는 일이 아니다] 등. 평을 볼 때마다 분노해서 전화를 걸고는 했었다. “나는 평론가니까 솔직하게 쓰는 게 맞는 겁니다.” 라는 정론을 듣고 화만 났을 뿐이지만. 뭐, 전부 이전의 일이다. 결국 지금 낸 곡이 4.5점을 받았으면, 그걸로 족한 것 아닌가? “수연쓰. 그거 봤어?” “방금 봤지.” “대박, 대박. 막 그 이런 거 어디 기사 같은 거로 뜨는 거 아냐? 그런 걸 우리가 받아보니까 신기하네. 잡지 같은 데 실리는 거지?” “이제는 잡지는 안 나오고, 아마 인터넷에 실리겠지. 뮤지카가 이제 실물로 나오나?” 명전은 이제는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는 ‘서명전’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2000년대까지는 실물로 나왔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 이후로는 사보지를 않아서 잘 모르겠다는 느낌. “아직 나온대. 나 연습 끝나면 서점 좀 가야겠어. 사서 들고있어야겠다.” “어차피 평론 받을 일 많을텐데 그런 거를 굳이 들고 있어야 하나?” 명전의 말에 이서는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라는 표정으로 명전을 쳐다보았다. 너무 영감 같은 소리였나 싶어, 명전은 고개를 돌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척을 했다. “아무튼 이제 EP 작업도 슬 다 끝나가는 상황이고. 발매가 되면, 그때 다시 또 리뷰가 뜨겠지…” “그럼 그거도 사지 뭐. 첫 싱글! 첫 앨범! 기념할 거는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고.” 긍정적이어서 좋구만. 명전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이제는 EP를 완성하고, 믹싱과 마스터링을 하고, 발매하는 일만 남았다. ‘앨범이 발매될 날이 기다려지는걸.’ 믹싱과 마스터링을 맡길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도 문제고, 이제부터는 쉴 틈이 없이 달려야한다는 것도 문제다. 그 다음 홍보를 하는 것 또한 문제다. 마지막 단계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명전과 아이들 앞에 놓여있는 문제는 아직도 많았다. 하지만 명전은, 그런 것들은 지금 당장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잿빛의 나날들]의 리뷰를 보며 웃고 떠들고 있는 세명을 보고 있으니 더 그랬다. 아무튼 즐기려고 하는 일 아니겠는가. 총천연색의 나날들이 눈 앞에 가득한데, 굳이 그 순간을 지나친 후… 잿빛의 기억을 돌이켜 되살려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