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치다가도, 문득 드는 생각.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게 맞았나? 그냥 나도 못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어야 됐나?’ 그런 생각이 들면, 또 머리를 박고 “아 괜히 말했어…”라고 자책을 한다. 몇분 정도 있다가, 다시 “아니, 해볼 만 하니까 했지!” 라고 말한다. 그 다음 멜로디를 짜 보고, 다시 후회해서 머리를 박는다. 최근 현아의 생활패턴이었다. 학교에서는 멜로디를 고민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연습은 제대로 집중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에게 말하자니? 현아 본인이 호기롭게 해보겠다고 나선 일이라 도움의 손길조차 요청하지 못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지만 생각해보라. 다른 아이들은 전부 다 밴드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있다. 이서는 특유의 쾌활한 성격으로, 서하는 인디 밴드에서 쌓인 노하우로. 수연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현아 본인은? 물론 실제의 그룹 사운드 밴드원들이 현아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현아는 자존감 낮은 사람 특유의 착각으로 인해… 왠지, 자신이 존재감 없이 제 자리만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살짝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활약할 수 있는 분야인 것을 알자, 과감하게 지원을 했다. 물론 그 결과는, 수십 수백번의 후회로 돌아왔지만. ‘뭐, 한스 짐머 같은 사람도 의뢰 받은 다음 이걸 내가 왜 했을까 하면서 후회한다니까, 나 정도는 괜찮겠지…’ 현아는 그렇게 자신을 달랬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음악감독 박휘석입니다.” “안녕하세요…” 며칠 전, OST를 만들기 위해서 음악감독과 미팅을 했을 때. 그때 당시 음악감독은, “원래 이렇게 작곡하는 팀이랑 컨택을 하는게 흔하지 않은 일이긴 해요.” 라는 대답을 했었다. 그냥 이메일이나 메신저 정도로 주고받는게 보통이라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직접 미팅을 하러 온 이유는…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음악감독 뒤에 붙은 촬영 카메라. 수연이 말했던 것처럼, ‘4인조 여고생 밴드’를 OST의 마케팅으로 써먹으려 한다는 이야기. ‘뭐, 어쩔 수 없지.’ 현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유튜브나 어디 공개를 못 할 외모도 아니고, 유명해지면 유명해지는 대로 예대 입시에 플러스가 있다. 아무튼 좋은 거 아니겠는가. “일단 드라마는 프리프로덕션 단계가 끝났어요. 저희는 쪽대본으로 나가는 제작사는 아니라서 대본도 이미 다 나왔고. 어떤 파트에서 여러분의 음악이 들어갈지도 대충 나왔습니다. 물론 대본 전체를 보여줄 순 없지만요.” 휘석은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꽤나 잘 꾸며진 양식에, 어떤 장면에 대한 정보가 이것저것 잘 적혀 있는 문서.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대립하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뭐 어쩌고 저쩌고. “그러면 저희는 어떤 식의 곡을 만들어드리면 되는 건가요?” 수연의 질문에, 휘석은 턱을 살짝 긁다가 입을 열었다. “음… 멜랑꼴리하고, 그 약간 달콤쌉싸름하면서도, 살짝 위기감도 있으면서도 쫀득하고 간질간질하게 사랑싸움을 하는 그런 재즈곡이었으면 좋겠는데.” “네?” 휘석의 입에서 나온 말에, 현아는 순간 외계어를 들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멜랑꼴리하고 달콤쌉싸름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게 뭔데 씹덕아. “어… 이해가 잘 안 되네요.” “그러니까 이 상황이 있잖아. 남주랑 여주가 은근슬쩍 코믹하기도 하고 약간 긴장되는 느낌으로? 그러니까 이제 막 서로 좋아하면서도 서로 좋아하는 걸 모르고, 어떻게든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그런 느낌인거지.” 현아는 “그렇게 말해도 잘…” 이라고 대답하려 했으나, 그런 현아의 대답을 막는 수연. 그녀가 상대 감독과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사이, 현아는 ‘소맛님이 왔으면 이해를 잘 했으려나?’ 같은 생각을 했다. “뭐, 대충 그렇게 만들어주면 돼요. 금액은 멜로디 + 컨셉이 나오면 컨펌 1회 거치고 선금 지불될 거고, 완성되면 곡 받고 잔금 지불하는 걸로. 시간은 많이는 못 줘요. 일정 말해준 그대로 가니까 참고하시고.” “네 알겠습니다. 저작권은 어느 쪽으로 귀속되나요?” “크레딧은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재산권은 우리로 귀속되는 걸로. 음원 수익은 알죠? 기본 디폴트로. 여러분은 저작/실연자니까 16%.” 그 외 뭐 잡다한 조항들을 이야기하더니, 휘석은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가 있다며 무게를 잡고 입을 열었다. “나는 밴드에 대해서 잘 몰라요. 밴드 같은 건 여러분이 잘 알겠지. 근데 나는 이런 드라마 OST에서는 전문가야.” “네.” 그래, 사람은 물 안먹으면 죽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냐는 듯 현아는 속으로 빈정댔다. 그에 반해 수연은 착실히 대응하는 모습. 그런 자세가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휘석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드라마 OST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요?” “어… 몰입을 시켜줄 수 있는 요소?” “그것도 괜찮네. 하지만 그보다는 말이죠… 이 주인공들이 차마 입으로 꺼내지 못하는,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그런 감정을 보여주는 거에요.” 의외로 제대로 된 이야기에, 현아는 반쯤 닫고 있던 귀를 은근슬쩍 다시 열었다. 희석은 목이 살짝 탄다는 듯 커피를 홀짝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뭐 저런 장면 있잖아. 저 장면에서 등장인물의 심리는 어떻겠어? 나는 가기 싫어. 그런데 네가 와 줬음 좋겠어. 근데 그걸 대본에 쓴다? 너무 유치해져. 하지만 배경에 흐르는 OST라면 어떨까? 관객들은 OST와 드라마 장면을 분리하면서도, 또 의외로 동일시해서 보는 그런 면이 있단 말이지.” 휘석은 그런 식으로 설명을 몇번 더 하고는, 카페를 나갔다. 이제까지는 대부분 뜬구름 잡는 소리였으나, 마지막에 설명한 이야기 덕에 현아는 약간 감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어때? 할 수 있겠어?” “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현아를 보고, 명전은 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피디가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어떻게 잘 알아들으니 다행이네. “그렇지만, 좀 걸리는 게 있어요.” “뭔데?” 명전의 말에, 현아는 살짝 망설이는 표정을 보였다. 왜 저러는 걸까. 혹시 휘석 저 양반이 무슨 좆같은 눈빛이라도 보낸 건가? 여고생한테 수작 좀 부려보려고? “서로 좋아한다, 멜랑꼴리한 사랑… 그런 게 뭔지 잘 감이 안 오네요.” “그게 왜?” “누굴 좋아해본 적이 없어서요…” 그런가. 명전은 머리를 꼬았다. 하긴, 사랑이라는 감정이 경험하지 못하면 좀 뭐라하기 쉽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저 나이쯤 되면 사랑이니 연애니 그런 것들은 한번쯤은 경험해보지 않나? 누가 했는지 모를 명언 하나. ‘사랑이란 악마이며 불이며 천국이며 지옥이다. 쾌락과 고통, 슬픔과 후회가 거기에 함께 살고 있다’. 딱 명전이 살아왔던 삶 그 자체. 그렇게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의 자신은 자거나 기타를 치거나 연애를 하거나 그것밖에 안 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명전은 자신의 풍부한 연애경험에 근거해 조언을 해주려다 급하게 입을 닫았다. ‘이 애가 연애를 해 봤던가?’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떠올린 기억들 중에, 딱히 그런 기억은 없었다. 그냥 남자들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했다 그 정도? 외모로 농락하는 것을 즐겼을 뿐, 진지한 관계까지는 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수연 님은… 그런 경험 있으세요?” “응?? 어, 아, 음… 음, 어, 음, 어…” 갑자기 들어온 급습에, 명전은 당황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과거의 삶을 기반으로 있다고 해야 하는가?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고. 근데 조언은 해 줘야 할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려면 또 거짓말을 하게 되고. 진퇴양난인 상황이었다. * * * 간단한 멜로디로 구성된 곡이 끝나자, 명전은 버튼을 눌러 마이크를 켰다. “좋은데?” “정말요? 감사합니다…” 현아가 완성해왔다고 보여준 라인은, 명전이 보기에는 꽤나 괜찮았다.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살짝 간드러지며 속삭이는 듯한 멜로디. “문제는, 이걸 어떻게 곡으로 완성하냐는 거에요.” “그냥 완성하면 되는 거 아닌가? 뭐 특별한 문제가 있나?” “제가 클래식이랑 재즈를 좀 들어보긴 했지만… 제가 만드는 게 클래식이고 재즈인가? 약간 그런 느낌이네요.” 명전은 현아에게 들리지 않게 살짝 웃었다. 현아의 고민은, 창작자에게는 흔히 있을 법한 것이었다. 이게 맞나? 뭐 그런 느낌. 이게 락이 맞나? 이게 블루스가 맞나? 이게 메탈이 맞나? 기타 등등. 젊은 애들이 하는 가장 대표적인 고민이 저게 아닐까. “장르라는 건… 붙이고 만드는 게 아니야. 만들고 붙이는 거지.” “네?” 명전은 자세한 설명을 위해 책상에 살짝 땡겨앉았다. 숨결이 마이크에 다가가 바슬거리며 부서졌다. “박휘석 그 양반이, 클래식/재즈 풍의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한 건… 진짜 그 장르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한 게 아냐. 시청자가 듣기에 그렇게 들리는 음악을 만들어달라는 거지. 그러니까 그런 것에 지나치게 몰두할 필요는 없어. 다른 사람이 듣기에 좋다, 이러면 그냥 그걸로 충분한 거야.” 명전의 말에 “오…” 하며 대답하는 현아. 그리고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건 그렇다 해도, 편곡적인 부분에서… 제가 약간, 뭐라 그래야 하나. 이걸 어떻게 진짜 곡으로 완성시켜야 할지 잘 감이 안 와서요.” “편곡이야 뭐, 어차피 밴드 일이니까… 우리가 단체로 하면 되겠지?” 명전은 그렇게 대답했다. 뭐, 실제로는 명전이 대부분을 도맡아서 하게 되겠지. 이서나 서하에게 맡기는 것도 재밌겠지만, 이건 밴드 차원에서 이뤄지는 첫 외주 작업이다. 명전은 다른 아이들에게 맡겨놨다가 말아먹거나 평가가 안 좋아진다거나 하는, 그런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아이들이 재능을 발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믿고 맡기는 것 보다 명전 본인이 직접 손을 대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제일 깔끔한 법. “걱정하지 마. 어떤 사람이 들어도 좋다는 평이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 * * “오… 곡 좋은데?” 리얼 밴드 사운드로 녹음되지는 않은, 미디로 찍은 것이 선명하게 들리는 곡 초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데군데 적절하게 꽂혀주는 드럼과, 부드러운 터치를 보여주는 베이스, 기타. 라인을 명확하게 잡아주는 키보드까지. 가이드 보컬로 들어간 목소리는 살짝 낮아 더 마음에 들었다. 백밴드의 연주, 기승전결이 뚜렷한 멜로디… 휘석이 주문했던 그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듯한 목소리. 만약 내정된 가수가 없었다면, 이 목소리의 주인을 보컬로 쓰고 싶을 정도였다. ‘이거 참, 기대 이상인데…’ 휘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세션에서 보여준 실력과, 들려주었던 밴드 곡을 들어봤을 때… 어느정도 퀄리티가 나올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하지만 사실 그게 전부였다. 그냥 무난한 밴드 곡 하나 나오고, 그게 끝. OST 메이킹 과정에서 찍은 영상들을 공개하고, 여고생 밴드의 녹음 현장과, 아이들의 인터뷰까지. 그런 쪽에서 화제를 좀 끌어오려고 했던 휘석이었는데. “괜찮은데요? 이게 진짜 그 감독님이 말했던, 그 여고생 애들? 메이킹 필름 찍는다는 그거? 걔들이에요?” “맞아. 이거 미디로 찍기만 한 건데, 기대 이상인데.” 세션에서 그 기타 여고생이 보여주었던 실력은, 가히 충격에 가까웠다. 본인이 자제하지만 않았어도, 몇십년 경력의 채호근 교수까지 잡아먹을 정도의 기타 실력. 게다가 밴드의 베이스(얘는 좀 부족했다)나 키보드, 드럼들도 꽤나 잘 치는 편이었으니… 그런 연주가 더해지고, 좋은 가사만 붙는다면. “이건 확실히 뜰 것 같다. 수형아.” “네?” “그 이감독한테 이야기해서, 아니 아니다. 내가 전화할게.” 휘석은 스태프가 전화하면 무게감이 좀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본인이 직접 전화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몇번의 신호 후에, 들리는 것은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 “어~! 이감독님! 저 박휘석입니다. 오늘 뭐 촬영 잘 안되세요? 아니아니, 뭐 그런 게 아니고. 이번에 우리가 OST 만들잖아요? 이거 완전 대박이 하나 있는데. 벌써 녹음 들어갔냐고요? 아니 그건 아니고. 초안이 들어왔는데, 어? 이감독님 직접 이야기 들어보면 난리날 정도라니까.” 휘석은 이리저리 이야기를 떠들며 간을 살짝 보았다. 어찌됐든 여기가 오케이가 돼야, 그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는 거니까. “아니 그래서 제가 전화를 왜 했냐면, 이번에 우리 뭐 OST 선공개 곡 지금 찾고 있잖아요? 이 곡으로 가면 어떨까 싶어가지고. 네. 아니, 가수는 미공개로 아니 이거 곡만 들어도 좋아요. 근데 왜 공개 안하냐고? 아니 미공개를 해야, 가수랑 딱 이제 이거 오픈 됐을때 진짜 빅 쇼크를 줄 수 있다니까. 어디세요? 지금 시간 되면 제가 가서 직접 말씀드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