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의 인테리어는 온통 하얀색이었다. 하얀색 의자, 하얀색 가구, 하얀색 벽면. 다른 것은, 보랏빛 계열의 조명. 최근 유행하는 인테리어 방식. 음향 설비라거나 하는 것들은 중간정도는 하지만, 나머지는 다 부족하다. 의자도 몇개 없고(인테리어를 망친다는 이유로) 주위에 편의시설도 부족하고, 교통편도 좋지 않다. 스튜디오 내에 들어와 있는 악기도 몇개 없다. 그렇기에 평상시에는 그런 사정을 잘 모르는 신생 밴드들과, 규식의 밴드 정도만이 이 스튜디오를 이용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목때에는, 나름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비주얼이 되니까. “미안해.” “뭐가?” “저 사람들. 괜히 인사했다가…” “사람들이 있는데 인사 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일이 귀찮아진다 한들 봤다면 인사를 하는 게 도리지. 상태 안 좋은 사람이 난리치는 걸로 너무 신경쓰지 마라.” 서하의 대답에, 수연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이야기했다. 괜히 이상한 사람들 끼어들어와서 뭘 본다니 참관한다느니 신경이 쓰일 법 한데도, 수연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가끔 쟤를 보면 보면 진짜 인생 2회차라도 되는 것 같은 느낌이야.’ 상당히 정확한 추리지만, 서하는 그를 말도 안되는 상상이라고 치부했다. 그러고는 기자재들을 준비하다가, 입구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세 사람. 원래도 그다지 좋아하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서하가 메탈이 최고의 음악이라고 하던 시절에나 교류가 조금 있었던 사람들이지, 이제 와서는 그냥 클럽 오며가며 술 몇잔 받아마신 게 전부인 사람들. 하지만 오늘은 강제로 밀고 들어오질 않나, 팔짱을 끼고 무슨 심사라도 하는 것 마냥 저러고 있질 않나. 밴드 파이오니어 참가라고 하니까 더욱 더 달라붙는 그런 느낌. ‘혹시… 저 사람들도 참가하는 건가?’ 머리를 굴리던 와중에 서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니, 꽤나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왜 기분이 나빠졌는가는 잘 모르겠다만, 기분이 나빠졌다고 해서 남의 밴드 음악을 꼭 듣고 싶다고 하겠는가? 물론 서하 또한 여자였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알고는 있었다. 그렇기에 어느 측면에서는 왜 화를 내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저러고 있는 건 그거랑은 전혀 별개의 문제 아닌가. 경력이 쌓인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무례하게 저렇게 밀고 들어온다는 것은, 분명 목적이 있어 보이는 행동이었다. “저 사람들 누구야?” “어, 내가 아는 사람들.” 서하는 인사하고 와야겠다는 이서를 붙잡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이서의 시선과, 처음보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현아의 표정. “그런데 저 사람들 계속 있는 거야?” “뭐, 몇곡 듣다 나갈 거라던데.” 서하의 말에, 이서는 머리를 긁었다. “지금 그 우리, 유튜브 찍고 있잖아. 저 사람들 나와도 되나?” 그러고 보니, 이서가 그런 말을 했었더랬다. 나와도 될까? 서하는 고민을 잠시 하다가, “그냥 들어내면 되지 않을까?” 라고 대답했다. 뭐, 찍는게 큰 문제가 되겠는가. 어차피 최종 결과물로만 안 나오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지?” “뭐, 그러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와중에 평온하게 기기들을 조정하고, 녹음 준비를 하고 있는 수연. “일단 손부터 풀자.” 수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기타를 잡았다. * * * 규식은 팔짱을 낀 채로 돌아가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숙련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어보이는 아이들의 움직임. 이것저것 바쁘게 돌아다니며 부산을 떠는 베이스와 키보드, 그리고 자신들이 불편한지 자꾸 쳐다보는 서하. 아이들이 준비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기타. “개판이네.” 규식의 말에, 희성과 경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정돈되지 않은 모습. 스튜디오든 연습실이든, 돈을 아끼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정리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 “오래 가기는 글른 거 같지 않아요? 오빠.” “뭐, 그렇긴 하지. 좀 보다가 서하한테 밴드 터지면 우리 쪽으로 오라고 해야겠어. 이준성이 그놈, 드럼도 좆도 못치는데 자꾸 처 늦기만 하고. 걔 쫒아내고 서하 넣으면 딱이겠지.” “그러게. 서하 들어오면 딱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준성 오빠 너무 음침하고 좀 별로야.” 서하 본인은 하겠다고도 말하지 않았는데, 이미 그녀의 미래는 결정이 되어버린 상황. 희성은 참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연주 준비를 갖춘 밴드를 바라보았다. ‘뭐, 규식이 형 말이 맞긴 해.’ 저 애들이 어떤 음악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딱히 음악을 잘할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딱 봐도 그렇지 않은가. 희성의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세상에서 밴드와 가장 거리가 먼 인종을 꼽아본다 하면, 한국 여고생은 무조건 들어가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서하도 한국 여고생이긴 하지만 좀 별종인 케이스고. “기타랑 베이스 자세부터 봐라. 기본이 안 되어있네.” 스트랩을 최대한 축 늘어트린 채 연주를 하려는 기타, 자기가 지미 헨드릭스라도 되는 것 마냥 왼손잡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손 베이스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베이스. 사소하다면 사소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트집을 잡고 궁시렁거리는 규식과 경윤. 희성은 또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굳이 저렇게 트집까지 잡을 건가 싶긴 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연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180도 바뀌었다. 아니, 바뀔 수 밖에 없었다. 가볍게 손을 푸는 듯한 표정으로, 아무런 징조 없이 갑자기 시작된 기타의 연주. 구름 위를 떠도는 듯 평온하게 오가는 손가락과는 달리, 기타에서 연주되어 앰프로 뛰쳐나오는 소리는 명확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연주에, 희성은 저도 모르게 규식을 바라보았다. 기타리스트로서 저 연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해서. 그리고 규식의 반응은 희성이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여고생 나잇대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연주를 듣고 충격을 받은 모습. 살짝 벌어진 입과 커진 눈동자는, 그의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했다. ‘저게 말이 되나?’ 여러모로 파락호적인 삶을 살고 있었으나, 규식 또한 꽤나 이름 있는 밴드의 기타리스트다. 나름 재능도 있고, 기타를 오래 치기도 해서… 레슨과 밴드로 밥벌이를 하며 ‘나 정도면 기타 잘 치지’ 라고 할만한 실력의 소유자. 하지만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그런 규식의 상식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여고생이라곤 믿기 힘들 연주를 선보이며, 유려한 터치로 멜로디를 이끌어나가는 소녀. 규식은 그를 보며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그냥 저 프레이즈만 연습한 것일 수도 있어. 요새는 기본기 없이 그냥 프레이즈 연습을 하는 애들이 많다고 하니까.’ 규식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 저런 어린 아이가 자신보다 잘 친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의 세월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질 것 같았기에. 그리고 그런 생각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도 있었다. 아무도 연주에 들어오지 않고 있지 않은가. 밴드원에 대한 아무런 배려 없이, 자기 프레이즈만 연습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생각은, 타이밍을 맞춰 베이스가 슬쩍 들어오면서 깨졌다. 음악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던 화려한 화장의 여고생이 보여주는 정석적이고 깔끔한 베이스 연주. 그 다음은 키보드, 드럼. 순차적으로 들어온 악기들은, 살짝씩 맞지 않는 구석이 있긴 했다. 그러나 불협화음을 내며 그대로 연주를 하기보다는, 음량을 줄이거나 박자를 늦추거나 하면서 서로에게 자신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조율하는, 기타의 지휘에 따라 물 흐르듯 흘러가는 연주. 지휘라거나 몸짓이라거나 말이라거나,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규식 또한 기타리스트였기에, 기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연주를 하고 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곡 자체는 난잡하다. 완전 쌩 라이브로 들어간다, 이것 하나 외에는 그다지 볼 일이 없는 연주야.’ 규식은 이를 악물었다. 이것이 자작곡이다… 라고 한다면, 작곡 실력은 영 기대만 못하다. 실력이 뛰어나면 뭐 하는가. 결국 중요한 것은 곡이다. 그들이 있는 곳은 밴드씬이지 세션 씬이 아니다… 같은 생각으로. 눈 앞의 여고생 밴드를 폄하하고 있던 규식. “잼(Jam, 밴드의 즉흥합주)도 끝냈고, 손도 풀었으니까… 이제 카피 곡 한번 쳐 보고, 녹화 들어가자.” 하지만 연주가 끝난 후, 기타를 맡은 아이가 건넨 이야기에… 규식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저게 잼이었다고?’ ‘다른 애들은 죄다 기타가 끌어준 느낌이니 그렇다 치고, 기타가 저걸 잼으로 쳤다고?’ ‘그게 가능한가? 얼마 나이도 되어보이지 않는데? 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기타를 잡았던 걸까? 아니면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인가?’ “왜 그러세요?” 그렇게 번민하던 와중, 앞쪽에서 들려온 물음. 규식은 자신이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나 앞쪽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규식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다. 어디 연주 틀어놓고 그냥 핸드싱크 한 거 아니냐? 우리 밴드에 들어오지 않을래? 기타 너무 잘 친다. 혹시 작곡 할 생각 있어? 남자친구 있냐? 등등. 하지만 규식의 뇌를 거쳐, 입으로 뱉을 수 있는 이야기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 기타 배운지 얼마나 됐어요?” 저열한 의도가 느껴지는 질문이라고 규식은 스스로 생각했다. 배운지 얼마나 됐겠는가. 그래도 오년 십년은 넘지 않았겠는가. 그 기간과 자신의 기간을 비례해서, 그냥 저 아이는 나보다 약간 재능이 높을 뿐이다. 나와 재능이 비슷한데, 다른 영역으로 발전시켰을 뿐이다… 그렇게 자신을 위안하기 위해서. “글쎄요…” 의도를 알 수 없는, 혹은 알 수 밖에 없는. 그런 규식의 질문에 희성과 경윤은 규식을 당황한 듯 쳐다보았고… 수연은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질문에 대답했다. “한 일년 됐나요.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 * * “저 사람들은 왜 왔던 걸까?” “글쎄…” 명전은 쓰게 웃었다. 끝까지 의도를 알지 못하는 이서와, 대충 짐작만 하고 있는 현아와 다르게… 명전은 상대를 보자마자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딱 봐도 시비걸고 싶은 거 아닌가. 저런 사람들은 옛날에도 있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을 깎아내리는 것에 주력하는 사람들. ‘안타깝긴 하지.’ 물론 명전 또한 재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로 인해서 느껴지는 벽이라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현재 한국에서 가장 재능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저러는 건 좀 그렇지 않나…’ 평범하게 생각해보면… 자기들끼리 재밌게 놀기 위해서 만든 밴드를 보고, 갑자기 심술이 나서 쳐들어온 프로 놈들 아닌가. 자기들은 어떻게 생각했을 지 모르지만, 문자로 써놓고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냥 미친 행각일 뿐이다. 그리고 명전은 그런 사람들을 얌전히 달래서 돌려보낼 성격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 사람들 갔어?” “응. 미안해.” 문을 열고 들어온 서하에게 이서가 질문을 던졌다. 보내고 왔는지, 사과부터 하는 서하. 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고는 입을 열었다. “너한테 뭐라고 안 하든?” “뭐… 별 말 안 했어. 그냥 미안하다던데.” “미안할 것 까지야 없고.” 명전은 생각했다. 서하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잘못이 있다면, 그냥 친하게 지낼 사람들을 잘못 선택한 것일 뿐이지. 물론 서하의 옛날 모습을 생각해보면, 원래는 서하도 저렇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초반에 내가 버릇을 고쳐준 게 의외로 효과가 있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명전은 다시 기타를 집어들었다. 이미 시간을 많이 낭비했으니, 이제는 진짜 지원사업 제출용 녹화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