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우선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나?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잘못 들은 것은 아닌 듯 했다. 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낌새. 혜인과 정 과장만이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전에 언질을 받은 것일까. “다큐멘터리요?” “네. 일단 여기 이 분들을 소개하자면…” 경민의 말이 끝나자, 잠시 멀거니 서 있던 젊은 남성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전정식 PD라고 합니다. 현재 교양국에서 다큐멘터리 제작팀에 속해 있고, 음… 약간 부끄럽긴 하지만 다큐멘터리 제작 총괄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잘 부탁드리겠구요, 여기는 저희 직원들인 박민재 촬영감독, 이준호 작가, 김하은 작가…” 한 사람씩 소개를 마치자, 아까 자신을 소개했던 전정식 피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저희가 시즌을 맞이해서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했었는데요, 명확한 소재가 없던 차에 고경민 팀장님이 저희 쪽으로 컨텍을 해 주셔서요. 상당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을 했고, 여러모로 합의를 거쳐서 이렇게 여러분과 촬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고개를 숙이는 전정식 PD. 전통적인 ‘방송국놈들’과는 다른 자세에 그의 호감도가 약간 상승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이전에 제가 전국 투어 이야기를 드렸었죠. 그 때부터 이 일을 계획하긴 했는데, 사실 이게 다른 기업과 협업을 한다는 게 상당히 불확실한 일이다보니까 확정이 나기 전까지는 멤버분들께 제대로 된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그 부분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고, 대신 사장님과 정 과장이랑 좀 이야기를 했는데…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고도 몇가지 이야기를 더 한 경민은, “이제부터는 전 피디님이 이야기를 해 주실 겁니다.” 라며 물러섰다. 그렇게 자리를 잡은 전정식 PD는, PPT부터 우선 올려놓았다. ‘왜 다들 PPT 같은 걸로 설명을 하려 할까.’ “일단 제작 취지에 대해서 조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그 취지에 대해서 이해를 하시고 계신 게 좋으니까요. 말씀을 드리자면…” 넘어간 PPT는 이미지 하나를 비췄다. 무수히 많은 K팝 다큐멘터리. “아이돌… 로 상징되는 K팝 다큐멘터리는 엄청 많아요. 심각한 것에서부터 유쾌한 것까지. 하지만 한국 음악 산업이라는 게 순수히 K팝으로만 이루어진 것인가? 전혀 아니거든요. 힙합도 있고, 일반 가수들도 있고, 밴드들도 있고. 제 취향도 그렇고 해서 저희는 그런, 대형 기획사를 바탕으로 들어오는 가수들보다는 뭔가 이런 자생하는 인디밴드의 이야기를 찍어보고 싶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한번 띄워주는 PPT는, [공중정원]과 [별이 되어가는 것]의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지금 음악 차트가 보면 아이돌 노래, 힙합, 아니면 방송에서 유명해졌다거나 이미 유명한 사람들의 노래잖아요?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은 그냥 입소문 하나로 차트를 뚫어버리고, 페스티벌도 참여하시고, 공연도 하시고… 남이 보기에는 일종의 신화같은 그런 이야기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런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찍어서 보여주는 것이, 경직된 한국 음악시장을 뭔가 타파해나갈만한 그런 힌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다큐멘터리를 찍으려고 하거든요.” “너무 거창한 거 아니야?” 피디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몸을 훅 숙여 속삭여오는 이서. 그는 귀에서 덮쳐오는 간지러움에 잠시 몸을 틀었다가, 나지막히 말했다. “원래 기획의도는 다 거창한 거지.” “그래도 우리가 뭔가 뭐 타파를 한다느니 뭐니 하는 건 좀 부담인데…” “어차피 저 사람들이 다 알아서 그림을 만들어 줄 거야. 방송국 놈들이 그렇지.” “방송국 놈들이라니, 너 뭐 방송국 사람들이랑 많이 일해본 것처럼 말한다?” 이서가 제기한 의문에 그가 입을 다무는 동안, 전정식 PD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저희는 여러분들의 라이브 투어 기간동안 동행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찍을 예정입니다. 공연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생활 모습이라던가, 무대 뒤쪽에서 준비하는 모습. 그리고 밴드 뿐만 아니라 기획사 직원분들의 모습. 그를 통해서 지금 한국 인디밴드 씬이 배출해낸 기린아, 그룹 사운드의 저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한국 음악 시장은 과연 그룹 사운드의 어떤 것을 본받아서 더 발전해 나가야 되는가. 그런 것들을 촬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네.” * * * 다큐멘터리의 촬영은 라이브 투어가 이루어지는 시점인 고등학교 여름 방학부터 시작된다. 그렇기에 첫 촬영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는 않은 상황. 정식은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촬영이 다 끝나고, 편집하는 시간에 혹시 모를 추가 촬영까지 생각하면 공개 일자까지 빡빡한 일정이었으므로. 그리고 그 활용방법은, 다큐멘터리에 삽입될 인터뷰를 미리 따놓는 것이었다. “인터뷰용 지인을 좀 추천해달라고요?” 당장 실제 촬영 자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미리 따 놓을 수는 없다. 이렇게 저렇게 하자~ 하고 인터뷰를 따 놨는데 갑자기 정 반대의 이야기가 나와버리면 그냥 그 인터뷰는 쓸모없는 것이 되니까. 하지만 주변인의 인터뷰를 따놓을 수는 있다. 이런 류의 다큐멘터리라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성장 환경’이라던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라던가, ‘주변인들의 평판’ 같은 다큐멘터리에 들어가게 되면 마치 적절하게 들어간 향신료마냥 맛을 더해주는 그런 재료들. 그를 위해서 정식은 밴드 멤버들과 회사 직원들에게 질문지를 건넸고, 거기에 대해 인터뷰를 할 수 있을만한 지인을 추천받았다. ‘얘는 좀 특이하네.’ 추천을 받아 인터뷰 제안을 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는데, 여기서 정식은 약간 특이한 점을 느꼈다. 다른 멤버 - 최이서, 정현아, 유서하 - 의 경우 가족이나, 친구, 레슨 선생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유서하가 ‘같이 음악을 몇번 했었던 홍대 씬 뮤지션들’ 몇명을 추천한 것이 전부. 하지만 하수연이 추천한 사람은, ‘평범한 고등학생’이 가질 수 있는 교우관계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테일러드 김철연에, 여기는 교수도 있고. 어디 홍대 클럽 오너, 세션 뮤지션, 김지연 가수도 있네. 들어본 사람들이 많은데…’ 정식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수연이 추천해준 리스트를 보면, 그 나이 학생이 괜한 공명심으로 “저 이런 분들까지 알거든요?”라는 말을 하며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다 불렀다, 라고 생각할만한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양반들이 다 인터뷰를 해주겠다고 했단 말이지.’ 하수연이 무슨 돈이라도 빌려준 걸까. 뭐 그로서는 좋았다. 그런 쟁쟁한 인물들이 인터뷰를 해 준다면, 다큐멘터리의 흥미도도 더 올라가는 법이니까. 그는 그런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인터뷰를 따러 갔다. “저랑 하수연 학생의 관계 말인가요.” “네. 이전에 질문지는 보내드렸는데, 인터뷰를 수락해주신 배경도 궁금하기도 해서…” “아무래도 지금은 하수연 학생과 교류를 이어나가고 있지만, 처음에는 ‘서명전’ 기타리스트 때문에 하수연 학생을 만나게 되었죠. 아무래도 그 서명전의 마지막 제자라는 타이틀이 있다 보니까.” “서명전의 마지막 제자요?” 인터뷰는 대체로 다 비슷했다. 하수연의 음악적인 재능 - 그녀가 얼마나 기타를 탁월하게 치는지, 그녀가 얼마나 작곡을 기가 막히게 하는지 - 에 대한 이야기나,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일화 등. 그런 이야기들 위주로 인터뷰가 진행되면서도, 꼭 한번은 ‘서명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아 뭐 그렇군요.” 라는 식으로 받아넘겼지만, 호원예대의 채호근 교수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굳이 서명전과 관계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내가 듣기에는 그냥 그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어요. 좀 휴먼드라마 같은 느낌이 있었지.” “휴먼 드라마요…” “관심이 있으면 이제 뭐, 글쎄. 가정사긴 하니까 뭐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 줄지 안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좀 물어보는게 괜찮을 것 같더라고. 재미있는 이야기니까.” 처음에는 그저, ‘Group Sound’라는 밴드에 대해서만 다룰 생각이었던 다큐멘터리. 하지만 정식이 찾아간 대부분의 ‘하수연이 추천한 지인’들은, 하수연의 기타 실력 뿐만 아니라 하수연의 삶까지도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는 Group Sound 이전의 하수연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Invasion from Seoul 2024]나, [정부지원사업 2024 Band Pioneer] 등에 얽힌 이야기들. 그때 당시 나왔던 기사들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관련 이야기. 해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떠돌고 있는 근거 없는 소문들 등. ‘역시 다큐멘터리의 클라이막스는 휴먼 드라마긴 하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미건조하게 사실만을 보여주는 그런 다큐멘터리는 결국 재미가 없다. 스토리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이야기에 얽매인 존재다. 펭귄을 찍는 다큐멘터리도 펭귄의 삶에 대해서만 건조하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수하고 먹이를 구하러 가는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얼마나 새끼를 위하는가, 이런 위대한 자연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런 이야기들을 하며 다큐멘터리의 흥미를 유발한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이 ‘하수연의 삶’은 충분히 다큐멘터리에 스토리텔링을 부여할 수 있을만한 소재로 보였다. 아직 다 파고들지도 않았는데, 단순히 나열된 사건만 봐도 재미있지 않은가. 불량 소녀가 노년의 기타리스트를 만나 짧은 시간동안 기타를 배우고, 스승이 죽은 이후 개과천선하여 음악계를 진동시키는 사람이 된다. 무슨 영화로 만들어도 될만한 그런 스토리. ‘이런 쪽으로도 조금 편집을 해 봐야겠는걸.’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노트에 메모를 시작했다. * * *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라이브 투어 첫 날. 서울 모처의 어느 작은 공연장. “오늘 매진이랬지?” “뭐, 홀 규모가 얼마 안 되니까.” “내가 보기에는 고팀장님이 초반에는 너무 작은 홀을 잡으신 것 같던데. 조금 큰 데 잡아도 괜찮지 않나?” “그때 당시에는… 확신이 없으시지 않으셨을까요…” 아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홀으로 들어갔다. 이미 간략하게 세팅 자체는 되어 있는 무대. 하지만 사운드 세팅은 이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제까지와는 아예 다른 환경의 그런 곳이니까. “서울에서의 콘서트는 맨 마지막에 있을 예정이고, 이번 공연은 출사표 비슷한… 그냥 조촐한 라이브 정도의 공연이라고 할까요. 프리뷰 같은 거라고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 때문에 표도 프리미엄 한정으로만 팔았다는 고경민 팀장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는 ‘이러니까 다들 프리미엄 가입하겠다고 하는구만.’ 이라고 생각했다. 고경민 팀장이나 정유영 과장이나, 팬들 돈 울궈내는데에는 아주 도가 튼 인간들이었다. ‘하긴, 그렇게까지 마케팅을 하고 장사를 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막 적자나는 공연도 할 수 있는 거고, 저런 팀들도 들어와서 우리 촬영할 수 있는 거고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세팅을 끝낸다. 세팅은 오랜만에 정석적이다. [음악편지]나 대학 축제때 보여주었던 어쿠스틱 세팅이라거나, 페스티벌때 보여주었던 페스티벌식 하드락 세팅은 아니다. 혹은 EBS Amplifier Now 당시에 보여주었던 배경이 완벽하게 갖춰진 그런 세팅도 아니다. 무대에는 옛날 락 밴드들의 공연이 그러듯이 붉은 색 페르시아 카펫이 깔려 있다. 딱 그 정도의 세팅. 마치 몇개월 전 얼마 되지 않는, 몇명 혹은 몇십명의 관객만을 데리고 하던 클럽 파라독스에서의 공연. 그것을 오마쥬하는 듯한 세팅. “오늘 무대 컨셉은 약간 카페에요. 우리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러 관객분들이 오시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저희도 사전에 입장해서 있을 거고…” 카메라 앞에서 무대 컨셉을 설명하는 서하. 그러는 사이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이윽고 공연 시간. 다큐멘터리 촬영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팬들이 속속 입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