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한 곡이 끝나려나 싶었더니, 소녀는 연속해서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마치 하나인 것 처럼 느껴지는, 그러나 상반되는 두 곡. 구성은 비슷하다. 어떤 사건이 있었음을, 그럼으로써 달라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곡. 질척이는 과거에 대한 이별과, 새로운 미래에 대한 찬사. 찰랑거리는 기타 소리는, 몇 분간 끊임없이 노래하다 이내 잠든다. 우레와도 같은 박수가 터져나오기 직전, 소녀는 손을 살짝 들었다. “죄송하지만 곡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박수는 그 다음에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연은 걸어가 일렉 기타를 다시 잡고는 앰프 세팅을 했다. 기대감이 섞인 침묵 속에서, 조금씩 이어지는 기타 소리. 재가 내린 밤 하늘에 비쳐오던 수많은 별들이 하나 둘씩 일렁이며 내일 밤의 창문을 열었네 “이건…” 준홍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명전 선생님의 노래 중 유일하게 노래방에 수록되었던 곡. 아주 가끔 술자리에서 같이 노래방에 가면,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었던 노래. 그 곡은 별다를 것 없는 올드 블루스였다. 슬픔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의 노래. 은은하게 비치는 감정의 편린 외에는, 흥겨운 기타와 드럼 소리만이 있는. 어제의 난 그립게도 저며가던 행복을 맞으며 그 언젠가 수없이도 바라왔던 시간을 좇았네 준홍이 느끼기에, 그 시절의 노래들은 대부분 그랬다. 물론 그가 그 시절을 살지는 않았지만… 창자가 끊어질 정도의 슬픔조차 시간의 모래에 묻으면 언젠간 사라지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혹은, 나타내지 않는 것이 성숙이라고 생각했을지도. 적어도 명전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슬픈 노래도 슬프지 않게, 옛 것을 그대로 따르던 사람. 과거를 존앙하고 미래를 사양하던 자. 난 오늘도 또 내일도 언제나 이러고 있을지 몰라 난 어제도 또 모레도 바라고 또 바랬던지 몰라 하지만 저 아이는 다르다. 감정을 솔직하고 과감하게 표현한다. 격류와도 같은 연주와 노래. 치솟아오르는 회한. 불타오르던 후회는 어느새 재가 되어간다. 그날 아침 봤었던 건 어쩌면 집 앞의 새였을지도 사람들은 그저,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 * * “감사합니다.” 노래를 마치고 내려온 수연. 잠시 콘서트가 쉬는 틈을 타, 수연에게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곡 너무 잘 들었어요!!”, “기타 언제부터 쳤나요?”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은 것 같습니다.” 등등. 그는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해 짧게 대답하거나, 웃어 넘기며 대기실로 향했다. 하지만 대기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아까와는 좀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수연’의 기타실력과 ‘서명전’의 가르치는 실력을 칭찬하는 가운데, 몇몇에게서는 의심에 가득찬 발언이 나왔다. “저거 명전 형님이 작곡한 거 맞나?”, “쟤가 작곡한 거 아냐?” 같은 의문 섞인 이야기나, “스승님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극진한데” 같은 비꼼 등.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의심을 하지 않겠는가. 몇십년 동안 작곡에 소질을 보인 적 없던 사람이 갑자기 죽기 직전 제자를 들이면서 각성해서 괜찮은 노래를 만들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일반인이라면 믿을 이야기지만, 그들은 뮤지션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상당히 힘들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그런 이야기를 믿는 것보다, 늙은 스승이 늘그막에 탐욕이 도져 제자의 것을 뺏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간편했다. “아가씨. 내가 정말 미안한데, 자네 스승님을 욕보인다, 이런 건 아니고. 진정하고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젊은 시절 ‘서명전’과 친했으나, 어느 날부터 대립하게 되었던 늙은 뮤지션. 그 뮤지션은, 떨리는 목소리로 수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명전이가 그 곡을 만든 게 맞습니까?” 그의 눈빛에는, ‘사실 네가 만들거나 관여를 한 게 아니냐?’ 라는 질문이 어려 있었다. 그 질문에 수연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러면서 그녀가 기타에서 꺼낸 것은, 상당히 낡은 작곡노트. 이것이 '서명전'의 글씨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상당히 오래 전 글을 배웠다는 게 느껴지는, 세월과 연륜이 가득한 고풍스러운 필체가 빼곡히 담긴 노트. “선생님께서 완전 다 만드신 건 아닙니다. 여기도 보시면 제가 부른 곡과 좀 다른 부분이 많긴 하죠. 여기도, 여기도.” 수연이 짚어주는 부분은 실제로 수연이 다르게 불렀던 부분. 둥글둥글한, 딱 봐도 ‘여고생 글씨체’인 것이 적혀 있는 곳이다. 하지만 메인 멜로디는 아니다. 메인 멜로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다른 곡도 같아요. 제가 수정한 부분은 일부분입니다.” “이… 이걸 언제 만들었다고 이야기를 들은 적 있나?” “아니오, 따로 들은 적 없습니다. 애초에 이 노트도…” 수연은 자신이 들고 온 기타 케이스를 가리켰다. 케이스 안쪽 숨겨진 비밀 주머니. “저 안에서 꺼낸 거라서요. 저 안에 뭔가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선생님 추모 콘서트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것저것 뒤져보다 보니 나온 거구요.” 수연은 그런 말을 하고 노트를 바라보았다. 상당히 낡아버린 노트. 살짝 눈시울이 붉어진 수연의 눈동자를 보고, 사람들은 누군가의 말년을 떠올렸다. 잘못된 길을 걸어왔던 세월. 자신이 옳은 줄만 알고 기고만장했던 초반과,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고도 인정하지 않던 중반. 더이상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후반의 인생. 그리고 그 말년에 제자를 거두고 제자의 재능에 자극을 받았다. 수십년 동안 걸어왔던 자신의 길에서 내려와, 아무도 모르게 틈틈히 새로운 곡을 썼다. 하지만 그 곡은 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다. 스승은 죽었고, 노래는 그대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어갔다. 제자가 다시 그것을 들추고, 지금 이 자리에서 연주하기 전까지는. 그에게 영감을 준 당사자가 연주하기 전까지는. 누군가가 숨을 킁 들이쉬었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아닌 듯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거나, 눈을 세차게 깜빡이거나, 아무도 모르게 눈가를 훔쳤다. 왠지 모르게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서, 수연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스승의 마지막을 추억하듯이. * * * ‘너무 심했나?’ 처음에는 그저 ‘아무리 그래도 작곡 실력이 보통은 됐다’ 라고 말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었다. 죽은 사람의 명예 같은 거 챙겨봐야 뭐 하겠냐만, 아무튼 명전이 ‘서명전’이었던 것 자체는 사실이니 화가 날 법 하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가 의도한 부분은 이미 한참 전에 넘어선 상태였다. 유튜브에서 방송을 하거나 영상을 올리는 늙은이들 대부분이 “우리가 명전이를 저평가했는데, 말년에 그런 곡 쓴 거 보니까 정말 살아만 있었다면 싶더라. 명전이가 그립다.” 같은 말이나 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살아 있었으면 그런 곡 못 썼지…’ 명전은 노트북을 덮고는 머리를 꼬았다. ‘서명전’으로 살아 있던 때의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머리가 살짝 굳어 있던 것 같았다. 이건 이런 장르이니까 이런 느낌으로 이렇게 써야 해. 쓰다가 좋은 느낌의 뭔가가 튀어나와도, 아니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니까 버리고 원래대로 가자… 뭐 이런 일들의 반복. 하지만 ‘하수연’이 되고 나서는, 이 아이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창의력과 재능… 뭐 여튼 그런 것들과 함께, 머리가 말랑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는 거북했거나 혹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그가 ‘서명전 추모 콘서트’에서 보여주었던 곡은, ‘하수연’이 되었기에 쓸 수 있었던 곡인 것이다. ‘서명전’이었다면 절대로 쓰지 못했을 곡. ‘뭐,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렇고, 명전은 요즘 뭔가 충동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이었다면 확실히 하지 않았을 일.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 애의 재능이 나에게 영향을 준다면, 이 애의 성격 또한 나에게 영향을 주는 걸까.’ 명전은 노트북을 덮은 채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 * * “하수연!” 옆에서 어깨를 치는 충격에, 명전은 “크헉.”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그를 노려보는 음악 선생과, 옆에서 꼴 좋다는 표정을 하며 그를 비웃고 있는 다인.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그렇게 자고 있는 건 좀 아니지 않니?” “어… 아… 죄송합니다.” 명전은 고개를 한번 푹 숙이고는, 음악 교과서를 붙잡았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음악도 배우나? 수능이니 뭐니 하느라 바쁘지 않나. 어차피 자신 외에 다른 애들 또한 죄다 딴짓 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왜 나만 잡고 있는 건지. “그럼 다음 시간에는 악기 수행 평가를 볼 거에요. 곡은 아까 정해준 곡 중에서 골라서. 악기가 없는 사람은 리코더나 단소,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은 본인 악기를 가져오면 돼요.” 수업이 마칠 무렵, 음악 선생은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대충 리코더나 가져와서 불어야겠군…’ 이라고 생각한 명전과 달리, 다인은 완전 신난 기색이었다. “수연아 너 기타 가져와서 쳐 봐!” “내가 왜.” “어 그럴까? 헣헣ㅎㅎ헣” 하며 수연이 자신의 실력을 뽐낼 기회를 받아들일 줄 알았던 다인. 하지만 돌아온 수연의 대답은 너무나도 달랐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는 눈빛. “아니 왜! 이럴 때 한번 보여 줘야지.” “귀찮은데… 기타 엄청 무겁고, 게다가 뭐 그렇게까지 점수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며 중얼거리는 명전. 그러나 다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을 때까지 명전에게서 떨어질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