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안 가요?” 유혁은 잠시 핸드폰을 보며 서 있다가, 동생의 말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미 짐을 다 챙겨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멤버들. 그는 잠시 머리를 긁다가 입을 열었다. “먼저 숙소 들어가.” “뭐 있어요? 왜 같이 안 가고.” “나는 잠시 할 일이 있어서.” 그 말에 수군수군대는 멤버들. “저거 봐 저 형 또…” 라는 말이 오간다. 그는 이마를 짚으며 멤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물론 전적이 있었긴 했다. 기사도 한번 떴었고. 그런데 그때 딱 한번 있던 일 가지고 계속 저러고 있는 걸 보면 참 그랬다. 어떻게 멤버라는 녀석들이 믿어줄 생각을 안 하는가. ‘걔들 연락처를 좀 받아놔야 할 것 같은데. 될려나?’ 멤버들에게 인사를 한 후 그는 Group Sound의 대기실로 걸어갔다. 음흉한 목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고, 그도 이제 슬슬 솔로 활동을 해야 될 시기였기 때문이다. ‘화제의 밴드에 피쳐링을 해 줬다던가, 아니면 저쪽 애들이 반주를 맡아줬다던가… 그런 식으로 나가면, 서로 좋은 일이지.’ 물론 그의 아이돌 경력을 따져보면, 굳이 그런 식의 홍보를 할 필요가 없긴 했다. 그가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해도, 페이블스 팬들이나 그의 개인팬들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딜 가든 몰려와서 사 주고 홍보를 해 줄 것이다. 그게 팬이니까. 하지만 대중예술인이란 결국 대중들의 관심을 먹는 존재다. 그냥 개인 팬, 아이돌 팬… 그런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받아가며 끼니를 잇기만 할 것이라면, 굳이 솔로 활동을 할 필요도 없다. 따뜻한 집 내버려 두고 바깥에 나가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착한 Group Sound의 대기실에는, 뜻밖에도 선객이 있었다. “그럼, 혹시 의향 있으면 한번 연락 줘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대기실을 나가는 여자.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음악은 많이 들었던 가수, 유영이다.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그는 왠지 모르게 조바심이 들었다. ‘콜라보 제안인가?’ 원래는 그렇게 급하다거나, 무게를 둔다거나 하는 일은 아니었다. 단지 그냥 ‘연락처 받아 놓고, 생각 나면 한번 연락 해보지 뭐…’ 하는 심정이었을 뿐. Group Sound의 오늘 라이브는 엄청나게 훌륭했고, 머지않아 스타가 될 것도 분명해보였다. 특히 오늘 무대가 그랬다. 출연 결정할 당시에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니, 분명 저 밴드는 기사가 떴을 즈음에 출연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어쿠스틱 무대를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 출연이 결정된 이후 무대를 준비해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게다가 무대의 퀄리티는, 그 합리적인 생각을 부정하게 만들 정도로 훌륭했다. ‘이거 예전부터 준비하던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저런 실력이라면, 안 뜨고 싶어도 몇년 안에 금새 메이저로 올라오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페이블스는 초동 몇백만장을 팔아치우는 K-Pop의 주축 중 하나. 유혁 본인은 그 페이블스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멤버로서, 본인의 솔로앨범만 해도 초동 몇십만장을 찍을 정도였다. 굳이 그가 먼저 손을 내밀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방금 그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조급함이 느껴졌다. 마치 괜찮은 옷을 마음속으로 찜해놓고 다른 걸 보고 있는데 손님이 들어와서 그 옷을 이리저리 들춰보는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안 살 수도 있고 산다고 해도 재고가 있을 수도 있는데, 괜히 지금 안 사면 영영 놓쳐버릴 것 같은 그런 이상한 느낌이. * * * 무대의 효과는 즉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피디가 극찬하고 싱어송라이터는 구애하고 아이돌은 전전긍긍’하는 무대를 펼쳤다 할지라도, 해당 프로그램을 보러 간 관객들 중 98%는 기존 출연자들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들이 “야 걔들 어땠어?”라고 하면 “진짜 잘하긴 하더라.”라고 대답하거나, 자신들의 플레이리스트에 그 곡을 올려놓는 정도의 움직임만을 보였다. 그 탓에 이번 ‘김지연의 음악편지’는 EBS Amplifier Now 정도의 선제적 파급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Group Sound의 언플러그드(Unplugged. MTV Unplugged에서 유래했으며 ‘전기를 쓰는 음악’을 ‘전기를 쓰지 않는 악기’로 녹음했다는 뜻) 공연의 반응은, 공연 당일로부터 좀 지난 방영일에나 퍼질 수 있었다. 프로그램의 방영 순서는, 공연이 펼쳐졌던 순서와 같았다. 기존 가수들이 맨 앞에, Group Sound가 맨 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할 것 없어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던 사람과 음악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 프로그램의 팬, 그리고 출연자들의 팬들만이 보는 방송이 시작된 뒤에도… 인터넷 세상은 이전과 같았다. 단지 출연자들의 팬과 일부 커뮤니티 이용자들만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뿐. 그렇게 잠잠하던 커뮤니티와 SNS는, 아주 느리지만 확실하게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음악편지] 레전드 찍고 있는 음악편지.avi] [얘네 공연 뭐임? 완전 미쳤다] [공중정원 혹시 어쿠스틱 곡도 나왔었나] [김지연의 음악편지 속보] [그냥 가만히 티비 키고 있었는데 ㅋㅋ] Group Sound의 팬들과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공연. 그게 누군지도 모르거나, 알아도 관심이 없거나 하여 기대 자체를 가지지 않았던 방송. 하지만 방송을 끝까지 본 사람들은, Group Sound의 차례 이전에 나왔던 퍼포먼스가 기억이 남지 않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빨리 노 저어!!” 라는 피디의 절규와 함께 업로드된 방송 편집본. 누구도 동작원리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알고리즘에 의하여 선택된 그 영상은, 하루도 되지 않아 몇십만 뷰를 돌파하며 인기 급상승 동영상에 여유롭게 안착했다. 댓글에서는 [제발 무편집본좀 주세요]라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기 무편집본 있어요]라고 링크를 줘서 ‘어쩌고 박사님을 아세요?’로 보내버리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Group Sound의 공식 채널이나 [White Room] 채널에도 제발 관련 영상좀 찍어달라는 댓글이 넘쳐났다. 그리고 [레이블 에코사운드]는, 정확히는 정유영 과장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김지연의 음악편지’ 화제의 공연! 그룹 사운드가 직접 알려드립니다!] [“여기 댓글이 있네요. ‘이런 식으로 곡을 편곡할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진짜 천재다’. 여기에 대해서 한 말씀?” “음, 음악을 많이 들으신 분들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언플러그드라는 개념이 있어요. MTV에서 나온 건데, 가장 유명한 언플러그드 공연은 Eric Clapton의 공연과 Nirvana의 공연입니다. 제가 이번에 편곡한 쪽은, Nirvana보다는 Eric Clapton에 가까워요. layla라는 곡이 있는데, 한번 들어보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원곡은 엄청 경쾌하게 쭉 치고나가는 곡이거든요. Eric Clapton이 Derek & The Dominos 에 있을 시절에 만든 곡인데, 당대 최고의 멤버들이 참여한 만큼 무시무시할 정도로 좋은 곡이죠. 특히 슬라이드 기타 솔로라던가, 후반의 피아노 코다라던가. 그런데 Clapton은 Unplugged에서 layla를 아예 다른 식으로 바꿔버리거든요. 메인 멜로디만 딱 들어내서 남기고, 템포도 확 낮추고. 솔로도 간결하게 넣고 피아노 코다는 없애고. 재해석이라기보다는 재창조의 느낌인데…”] ‘음악편지’에서 나온 언플러그드 공연에 대해서 Group Sound의 멤버가 설명하는 영상. 곡 자체도 잘 뽑혔는데, 편곡이 어떤 의도로 되었는지, 어떤 포인트에 힘을 주었는지… 그런 것들부터 시작해서. 곡 자체에 대한 해설(Plastic Nostalgia의 2개 곡)이라던지, 작사 방법(담당은 최이서)이라던지. 무대 연출(담당은 유서하)에 대한 이야기 등. 공연 영상을 몇번이고 돌려본 다음 ‘뽕’이 찬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달고 단 디저트라고 할 수 있는 영상. 알고리즘을 통해서 ‘김지연의 음악편지’ 영상을 보고, 무대를 몇번 돌려본 다음 해설 영상을 본다. 그 다음 다시 ‘김지연의 음악편지’ 영상을 보고, 다시 해설 영상을 보는 그런 루트. 그런 것들이 생길 정도로 ‘음악편지’ 공연은 파급력이 있었다. 원래라면 그저 ‘탑급 뮤지션들이 지상파에서 공연 했다더라’로 끝날 일. 하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듯, 그 날의 방송과 그 여파는 [공중정원]과 비슷할 정도로 불타오르며, ‘탑급 뮤지션들’이 아닌 Group Sound만의 무대를 만들어냈다. * * * 오랜만에 열린 비정기 회의. 혜인까지 참석한 가운데, 고경민은 준비된 자료를 프로젝터에 띄우며 입을 열었다. “이번의 성공은 하수연 학생의 공이 거의 99%, 아니 10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회사의 기여도는 거의 없다시피 했죠. 아티스트 본인이 스스로 방송을 따 오고, 편곡을 다 하고… 기획 쪽에 있는 입장으로서 상당히 부끄러웠습니다. 저희가 아티스트를 케어하고 기획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따라가는 입장이 되어버리니 그냥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그런 게 되어버린 게 아닌가…” “아뇨, 그러려고 한 건 아니고…” 고경민의 진심이 담긴 사과 비슷한 말에 그는 당황했다.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고경민은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지, 상당히 부끄럽다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지금 ‘음악편지’ 방송으로 인해서 하락세에 접어들었던 스트리밍 순위나 재생 수 등이 다시 상승세로 접어들었어요! 게다가 [Plastic Nostalgia] 음반도 확실히 재생수가 늘어나기 시작했구요! 이전에 찍어놓고 다 판매하지 못했던 한정판 LP도, 이번에 전부 판매를 완료했습니다!” 이번 ‘음악편지’로 인해 상승한 재생 수, 순위, 매출 등의 데이터를 보여주는 정유영 과장. 특히 음악편지 무대 해설 영상은, 별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아무 스튜디오나 빌려 들어앉아 떠오르는 대로만 이야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몇십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쑥쑥 치고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공중정원]은 우리가 의도한 대로였고 그 효과를 제대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별이 되어가는 것]의 판매량을 그만큼이나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은, [공중정원]의 홍보전략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음악편지’는 사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맞이한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정유영 과장의 두뇌를 한계까지 뽑아내다시피 해서 세워진 치밀한 계획. 우연처럼 보였지만 필연에 가까웠던 [공중정원]과 [별이 되어가는 것]의 마케팅. 그러나 지금의 ‘음악편지’에서 비롯된 사건은, 너무나도 계획 밖의 일들이었다. 그런 만큼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지금 3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요.” 그는 그 말에 뒤의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달라는 표정. “그래도 엄청나게 무리한 일정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제일 고생해야 하는 분은 아마, 수연 학생일 것 같구요.” “네?” 갑자기 그에게 돌아오는 화살. 그는 눈을 크게 뜨며 고경민을 바라보았다. 잘못 들은 것인가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확실히 그를 고생시킬 것이라는 느낌의 말투. “첫 번째는 언플러그드 음반입니다. 정규 앨범 정도는 아니고. EP 정도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그는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언플러그드 EP. 저번 정규 앨범때가 떠올랐다. 수십번을 재믹싱하고 마스터링해가며 어떤 것이 나은지 고민했던 나날. 그야말로 여가시간을 전부 쏟아부어가며 고생했던 일. 그 일을 다시 또 겪어야 한단 말인가. “두 번째는 2번째 Ep입니다. 이 쪽은 약간 가벼운 느낌으로 가고 싶습니다. 이때까지 낸, 혹은 낼 3개 음반의 경계에 있는 느낌이랄까요. 청자를 배려한 느낌의 음반을 좀 만들고 싶습니다.” 크흐흡! 하며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그는 고개를 팍 돌려 옆을 쳐다보았다. 범인일 것 같았던 이서와 현아는 그를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고, 서하만이 웃음을 참으며 그의 눈을 피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고경민의 다음 이야기에 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라이브 투어입니다. 전국을 다 돌 계획입니다.”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조용해진 나머지 세 명. 그 분위기를 깬 것은, 현아의 말이었다. “조… 조금, 무리한 것… 아닐까요… 그리고, 지방 공연도… 사람이, 많을지.” “일정이 많이 빡빡하긴 합니다. 하지만 더 늦출 순 없고… 우리가 콘서트 홀을 빌리지는 않을 겁니다. 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예정입니다.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