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출대가 두 목표를 모두 달성한 후. 토벌대로 전환되어 주변의 인력을 빨아들이는 상황에서 캐서린과 휘하 마법사들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아이오나 장로의 안전한 복귀. 애초에 캐서린과 휘하의 마법사들이 동원됐던 이유는 만에 하나의 상황을 위해서였다. 소드마스터 하나 보다는 거기에 대마법사+a를 끼얹는 것이 빠른 조치를 할 수 있을 것은 당연하니까. 허나, 그 원인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그리즐리 비버? 그렇다면 굳이 캐서린과 마법사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 전력이 너무 과했다. 알프레드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구출대에 도착한 서신에는 아이오나와 함께 캐서린과 부하들도 같이 복귀하라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유는 여럿 있었지만, 특별하지는 않았다. 구출대가 집결지였던 블랙우드 마을에 도착하고 준비도 다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즐리 비버 준동. 1차 토벌을 마친 후 현장 정리가 겹친 상황에 어느새 마을에 자리 잡은 임시 모험가 길드에 의해 모험가가 몰려들면서 토벌대의 행정이 일시적으로 마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캐서린의 스케쥴은 허공에 붕 떠버렸다. 이는 휘하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 덕분에 캐서린은 블랙우드 마을에 도착하고서 며칠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지만. "그래, 대륙의 북쪽에서 그리즐리 비버의 그걸 여성용 화장품에 사용하는 걸 본 적 있었지. 예전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은 형편없이 구겨졌다. 몹쓸 것을 봐버린 지성인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그런데." 캐서린은 주방의 테이블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달콤한 냄새를 은은하게 흩뿌리는 말라 비틀어진 무더기를 떨떠름하게 가리켰다. "이...것들이 전부 그리즐리 비버의 생식선이라?" "옙." 카렘은 캐서린과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향신료란 보존의 용이성과 편리함을 위해 건조 시켜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 그것은 그리즐리 비버 산 생체 바닐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카렘이 아는 비버였다면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에우로파는 달랐다. 그리즐리 비버의 크기는 어지간한 곰에 견줄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전통적인 건조 방식은 하루 이틀로 끝나는 작업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 크기가 크기기도 했고. 윈터홈으로 복귀하고 나서 먹을 거라면 상관없겠지. 하지만 카렘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이미 카렘의 인내심은 고든의 발길질과 함께 날아가 버린 지 오래. 진정한 요리사란 부족한 상황과 재료에서도 방법을 찾는 법. 카렘은 곧바로 더욱 빠르고 간단한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 난데없이 찾아와서 이런걸 부탁하는 거야!?' '자, 이 냄새를 맡아보시죠. 끝내주지 않습니까?' '응...확실히 다, 달콤하기는 한데.' '여기에 크림이랑 우유를 첨가해서 디저트를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아, 아무튼 바싹 말리면 되는 거지?' 카렘은 곧바로 나르케를 찾아가 부탁했다. 네크로맨시는 시체를 다루는 마법. 그러면 생체 물질을 건조하는 마법도 있겠지. 지극히 편파적인 생각이었지만 약간의 설득과 함께 나르케는 순순히 카렘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고, 캐서린이 차마 입에 제대로 언급하지 못하고 있는 주방에 잔뜩 쌓인 무더기는 그 결과물이었다. "뭐, 채취하는 위치가 거시기 뒤숭숭해서 그렇지. 동물 부속 요리는 위아래 가릴 것 없이 많이들 먹잖습니까?" 경악하는 캐서린과는 달리 고든은 카렘처럼 무척 태연했다. 험악한 용병 생활은 더하면 더했지 덜한 상황은 결코 없었기 때문에 당연했다. "아니면 귀하신 마법사님답게 이런 것에 내성이 없으신지?" "그건 동물 부속이지, 몬스터 부속이랑 같을 리가." "몬스터 내장 따위의 부속은 자주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X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네 눈엔 저게 생식선으로 보이냐? 아니, 그 전에 몬스터 부속을 요리, 그것도 디저트에 사용한다는 말은 넌 들어봤냐?" 고든은 항복의 표시로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런데 X알, X알 겁나 적응 안 되네. "자, 잠시만 집중해주시죠." 카렘은 손뼉을 쳐 두 사람의 관심을 모았다. "부속이니 X알이니 생식선이니 찜찜하니까 앞으로 바닐라로 통일하죠." "음? 난데없이?" "디저트로 만들면 나중에 고귀하신 분들 입에도 들어갈 텐데 X알이니 생식선을 넣었다고 잘못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오우..." 고든은 단번에 이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카렘은 이번에는 캐서린을 돌아봤다. "이 말린 물건을 화장품으로 사용한다고 하셨죠?" "그래. 마찬가지로 그리즐리 비버가 출몰하는 대륙의 북쪽 나라에서. 그런데, 알아보지도 않고 냅다 가져온 거냐?" "어, 솔직히 냄새 맡고서 눈이 뒤집혀버려서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솔직하게 카렘은 할 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캐서린은 기가 막혀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지, 생각해보니 매번 이런 식이었기는 했지.' 카렘은 그리즐리 비버의 바닐라 껍질에 칼집을 넣고 벗기며 생각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카렘이 캐서린에게 고용된 지 1년.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소년은 잊을만하다 싶으면 크고 작은 사건과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물론 큰 사건이라고 해봤자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붉은 마녀의 손가락 하나가 지금 아이스랜드 전역으로 뻗어 나가 지역에 깊게 뿌리 내린 식문화를 통째로 바꾸고 있어서 그렇지. 붉은 마녀의 손가락을 대유행시킨 것 뿐이지만, 지금 그 유행은 봄, 여름이 되자 아이스랜드 전역으로 퍼져나가 아이스랜드의 식문화를 바꾸고 있었다. 거기에 윈터홈의 요리사들에게 뿌리는 각종 레시피.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휘어잡는 기상천외한 요리들. 거기에 아이스랜드 권력의 핵심들과 다소 강제적으로 쌓은 친분까지. 그렇다면 지금 캐서린이 물어볼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일단 말린 저거의 내용물을 그대로 기름에 녹여 향유로 쓰거나, 아니면 그대로 작은 주머니에 소분해 향주머니로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지." "음. 정제하거나, 불순물을 거른다거나 하는 작업은 필요 없나 보죠?" "그래. 내가 알기로는 필요 없다." 그렇다면 카렘도 더는 거리낄 것 없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만들 것들은 정해져 있었다. 카렘은 곧바로 냄비에 우유와 설탕, 가루 낸 까만 바닐라를 풀어 넣고 불을 올린 후, 곧바로 차갑게 식힌 반죽에 버터를 넣고 접고 펼치기를 반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했다. "카렘. 그래서 뭘 만들려고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거야?" "커스터드 타르트. 그리고, 아이스크림이요!" "....아이스크림? "아, 아이스크림이 뭔지 모르시죠?“ “놀리는 거냐? 당연히 모르지. 그게 뭔데?” "과즙이나 와인 대신에 크림을 얼린 빙과요." 빙과라면, 셔벗? 대체 어떻게? 지금 한겨울도 아니고, 얼음도 없잖아. 그런 의미를 담은 고든의 시선에 카렘은 척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캐서린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고든의 시선은 당연하게도 묘해졌다. "마법사님. 자주 이럽니까?" "그래. 분명 내가 꼬마의 고용주인데 종종 저 녀석이 날 부려먹는다는 말이지." "그리고 마법사님은 그걸 또 그대로 들어주시고요." "어쩔 수 없다. 결과물이 별로라면 모르겠지만, 또 그것들이 신기하고 맛있기까지 하니." 뭐지, 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분명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달리 캐서린이 카렘의 행동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고든의 생각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카렘은 곧바로 고든에게 큰 그릇 하나를 떠넘겼다. 그릇에 담긴 것은 생크림. 그리고 거품기가 하나. "이건 뭔데. 나보고 뭘 하라고." "이걸로 거품을 쳐주시면 됩니다." "뭐?" "그러니까 이렇게요." 카렘은 직접 그릇과 거품기를 쥐고 시범을 보였다. 고든에게는 딱히 별로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이라는 것이... 하지만 반박할 틈은 없었다. 카렘은 곧바로 크림과 설탕, 바닐라를 넣고 끓인 바닐라 액을 캐서린에게 내밀었다. "이거 미지근하게 좀 식혀주실 수 있으실까요." "뭐, 별 어려운 일은 아니다만. 조금 뜻밖이구나." "네, 네? 뭐가 말입니까?" "꼬마. 네가 보통 뭔가 기상천외한 재료를 들고 오면 언제나 들어본 적도 없는 요리를 해왔는데." 캐서린은 주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커스터드 타르트에 아이스크림? 익숙한 물건들인데." "아, 한번 먹어보면 생각이 달라지실걸요." "흐음, 냄새는 확실히 좀 더 풍부한데. 그렇게 호언장담할 일이냐?" "아무렴요." 카렘은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냄새 때문에 먹기 힘들 때 숨을 참으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맛볼 때 후각은 생각보다 큰 비중을 차지했다. 향신료 하나 때문에 전 세계에 온갖 사건·사고를 일으킨 대항해시대 상인들의 자본주의적 행동이 이를 증명했다. 아니, 그 이전에 후각이 마비된 상황에서 사과와 양파는 맛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만 보더라도. 애초에 현대 지구에서도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1등 사프란만큼은 아니더라도 2등은 차지하는 것이 바닐라. 그리고 그리즐리 비버의 바닐라는 카렘이 전생에 종종 접했던 바닐라콩보다도 향이 진했다. 캐서린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냄비를 식히자 카렘은 곧바로 고든으로부터 거의 휘핑이 끝난 그릇을 회수해 바닐라 액을 넣고 골고루 섞었다. 타르트 용기에 반죽을 넣고, 커스터드를 채워 넣은 다음 오븐에 집어넣은 카렘은 이제 곧 아이스크림이 될 액체가 담긴 그릇과 주걱을 집어 들었다. * * * "쓰흡." 그 모든 광경을 보고만 있던 고든은 뭔가 찜찜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에도 생각했던 건데. 대체 거의 1년 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이에 비해 요리 실력이 범상치 않던 꼬마. 카렘의 실력이 상상 그 이상인 건 억지로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더 빠르게 식혀도 될 것 같은데." "그랬다간 깡깡 얼어서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그냥 아이스가 될걸요." "음, 그래서는 안 되겠지." "지금 같은 냉기로 타르트가 다 익을 때까지만 치대주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광경은 뭔가. 이 말만 공손하지 숫제 종자가 주인을 부려먹는 광경은 대체? 하지만 주종관계의 역전이 일어난 게 한, 두 번이 아닌지 카렘의 요구는 매우 자연스러웠고, 캐서린은 또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고든은 그 이유를 두 가지 알 수 있었다. 그저 그릇에 담겨 주걱이 휘저어지는 대로 찰랑거릴 뿐이었던 액체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성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릇의 액체는, 고든의 어휘력으로는 뭐라 설명하기 모호하게 돌변했다. 고든 또한 오랜 시간 에우로파 대륙을 떠돌아다녔던 만큼 다양한 요리를 먹어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눈에 과즙, 와인과 꿀을 얹어 먹는 빙수도 있었고, 혹은 과즙과 와인 그 자체를 얼려 먹는 달콤한 샤베트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그릇에 담긴 물건은 그 어느 것과도 달랐다. '이걸...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그래, 폭설이 내려앉은 설원.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작은 설원이 주걱이 움직일 때마다 그 형태를 바꾸며 부드럽게 파도치고 있었다. 하지만 파도와는 다르게 그 형태가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방 안에 은은하게 흐르는 달콤한 향기. 안그래도 매혹적인 그리즐리 비버의 바닐라 냄새는 뽀샤시한 우유 냄새에 섞여 한층 더 부드럽고 달콤한 냄새로 화했다. "꼬마야. 이쯤 하면 된 거 같은데?" "넵. 슬슬 타르트도 다 구워졌네요." 끼익- 화아아아악 그리고 오븐의 입구가 열렸다. 그간의 향기는 장난이었다는 듯, 코에 혀가 달린 것처럼 느껴지는 진한 달콤함이 열기를 따라 주방을 완전히 점령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