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로파에서 울타리, 목책, 성벽은 단순히 방어책이 아니었다. 문명과 야생의 경계를 가르는 눈에 보이는 상징 그 자체. 그 밖을 나가면 설령 대도시 주변이라고 하더라도 위험이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애초에 벽이라는 것의 역할은 바로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차단하고, 주민들의 터전과 일상을 수호하는 건축물. 당연히 호위대를 잔뜩 대동하고 펠윈터 령을 순회하던 아이오나도, 그를 호위하는 병사와 기사들도, 호위대를 수행하는 시종과 일꾼들도 아는 사실. "후우우우...하이폰 경." "예. 장로님." "지금 얼마나 남았지?" 아이스랜드는 문명보다 야만이 우세를 잡은 대지. 그랬기에 콜던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모두 지금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단단히 숙지하고 있었다. 아이오나의 물음에 하이폰 경은 스노우러너에서 내리고 투구의 바이저를 열었다. 지쳤음에도 야영지를 꾸리고, 경비 순서를 정하는 사람들을 빠르게 가늠하고 다시 닫았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부상자를 제한다면. 중경상자 합쳐 대략 7할쯤 되겠군요." "허." "일꾼과 시종들도 피해는 그 정도쯤 됩니다." "사실상 전멸이나 다름없군." "그래도 중상자는 없으니 전멸은 아니지요." 순간 아이오나는 두꺼운 목살에 파묻힌 묵주 목걸이의 존재감이 뚜렷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각오한 일. 그런데도 희생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그의 몸무게만큼이나 마음이 무거웠다. 펠윈터 가문과 아이스랜드의 대소사를 관리하다 보면 누군가의 죽음과 희생은 으레 있기 마련인 사소한 일.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그야말로 신께서 보우하셨다고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아이오나는 누군가의 죽음이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들이 너무 이른 마지막 여행을 해도 되지 않아서 다행이로고." "그나마 행운이 겹쳐서 다행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래. 정말로 다행이었지." 아이오나도, 하이폰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생각해보자면 정말 아찔한 순간 그 자체였다. 마을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습격. 몬스터 무리는 호위대의 몇 배나 되었기에 기사와 병사, 시종과 일꾼 모두가 아이오나를 무사히 탈출시키는 것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렇게 벌어진 전투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어떻게든 포위를 뚫고 탈출하려는 아이오나와 호위대와 이들을 공격하는 몬스터 무리의 양상. 하나를 죽이면 둘이, 둘을 죽이면 넷이 앞다투어 몰려오는 차륜전. 방심, 긴장, 기습 등의 이유로 호위대의 병사와 기사들의 몸엔 한둘씩 상처가 늘어만 갔다. 상황은 아이오나조차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먹을 휘둘러야 할 정도로 매우 급해졌다. "후우우. 그래도 설마 거기서 도움이 있을 줄이야." 마지막으로 지친 숨을 몰아쉰 아이오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양 허리춤의 롱소드를 만지작거리던 하이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삼신께서 보우하신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한쪽에서 늘어져 있는 용병 무리를 바라보았다. 주변의 다른 이들은 하나같이 바삐 움직이고 있어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을 타박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야 생명을 구해준 은인들을 박대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물며 그 용병 무리에 그렇게나 드물다는 소드마스터가 끼어있다면 더더욱. "용병 소드마스터라. 들어만 봤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 실력에 굳이 용병일을 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뭐, 아이스랜드까지 왔다는 건 뻔하지 않겠나?" "흐음,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당연한 게 아니냐는 투의 말에 하이폰은 동의했다. 아이스랜드는 문명 세계에서 도망자와 범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마지막 피난처. 이유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빅토르 그자도 과거가 범상치 않으니 말입니다." "으음. 확실히 그 자는..." 기실 아이스랜드 토박이가 아닌 실력자 대다수가 그러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빅토르의 과거는 독보적.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경악스럽다고 아이오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야 선대 아이스랜드 공작에 의해 밀수왕 빅토르가 봉신으로 임명되는 그 자리에서 증인으로 참석했었으니까. 그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쌓아 올린 것 대다수를 포기하고 아이스랜드에 올 정도니 빅토르도 어지간한 사정이 있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굳이 파고들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한데 고작 과거가 의심스러운 용병 소드마스터? 심지어 최소 실력이 어지간한 왕국의 기사단장급이다? 처음에 소개했던 편력 기사급이라는 내숭은 장본인을 보면 멍청한 일반 트롤조차 믿지 않을 개소리인게 당연했다. 그런 사소한 일은 등용하지 않을 이유 그 언저리조차 아니었다. 안 그래도 무력이든 뭐든 언제나 부족한 아이스랜드. "그래서, 어떻게 그자를 회유해서 등용할 수 있겠나?" 아이오나는 곧바로 하이폰에게 물었다. 장담하건대 주군인 알프레드도 그와 같이 행동할 거라 아이오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뭐, 이거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하이폰은 엄지와 검지를 말아 비비며 그동안의 감상을 내뱉었다. "용병답게 돈을 밝히는 면모가 뚜렷하니 말입니다." "흐음, 다른 이유가 없다면 그것으로 봉토와 작위가 딸린 영지로 회유할 수 있다는 것일 텐데." 바사사사삭- 그때, 덤불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소리에 정리와 순서를 정하고 휴식을 취하려던 이들이 소리 없이 기겁하며 무기를 집어 들고 경계했다. 긴장감이 현장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그리고 덤불과 우거진 나뭇가지가 꺾였고 그 너머에서- 큼지막한 이끼 멧돼지를 짊어진 용병. (아무도 안 믿는) 편력 기사급 용병으로 코스프레 중인 고든이 나타났다. "흠? 지금 나한테 무기를 겨누는 거냐?" "오, 고든 아저씨였어?" "아저씨는 무슨 아저씨. 결혼도 안 했는데." "성인식 치르면 다 아저씨지 무슨. 하물며 나이를 봐라. 나이를." 그 말에 사람들은 슬쩍 무기를 내리고는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눈치 빨리 다가온 시종들. 피와 내장은 처리했고 부위별로 자르기만 하면 된다고 당부한 고든은 냉큼 거대한 이끼 멧돼지를 넘겼다.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먹을 수는 있을걸." 그리고 아이오나의 손짓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허, 정말로 잡아 왔구먼. 고든." "뭐, 도중에 흔적을 발견해서 말이죠. 그리 멀리 있지는 않더군요." 하이폰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걸 봤다고 단번에 사냥할 수 있다면 사냥꾼들은 다 죽어야 할걸세." "이 실력에 용병 생활이 몇 년인데 당연하죠." "대체 활도, 창도 없이 어떻게 잡은 건가?" "이게 있잖습니까?" 고든은 당연하다는 듯이 허리춤을 툭툭 건드렸다. 그 충격에 롱소드가 검집 채로 흔들렸다. "이걸로 놈의 목을 노리고 단번에 멱을 따버렸죠." "허, 롱소드로 투검이라니. 과연 소드마스터라고 해야 할지." "이건 제가 멋져 보여서 그냥 익힌 기술입니다." 고든은 단호하게 하이폰의 감탄을 부정했다. 설마 부정할 줄은 몰랐고, 거기에 전혀 예상 밖의 이유에 하이폰은 투구 너머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당황했다. "아니, 그걸 그냥 멋져 보여서 익힌 기술이란 말인가?" "넵. 그런데 막상 익히고 보니 생각보다 여러모로 유용한 기술이던데요. 주로 예상 밖의 일격을 날릴 때 말입니다." "하긴." 하이폰은 무심코 수긍했다. 그야 누가 미쳤다고 롱소드를 단검처럼 투척할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세 사람 사이로 자극적인 냄새가 바람을 타고 지나갔다. 배가 텅 빈 채 입과 혀가 척박해진 세 사람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뜨거운 열기에 녹은 이끼 멧돼지의 기름이 장작불에 떨어져 강렬한 연기와 함께 피어올라 향긋한 버섯의 향기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냄새는 죽여주는데, 저 멧돼지의 몸에서 자란 버섯은 아니겠지요?" "자네가 나갔다 온 사이 주변을 탐색하던 병사와 시종들이 한아름 따온 걸세." "아, 그럼 다행이고요." 그렇게 피어오른 연기는 다시금 수많은 꼬치에 끼워진 이끼 멧돼지 고기의 다양한 부위를 감쌌다. 뜨거운 연기에 코팅된 고기는 기름이 흘러내리면서 튀겨지며 전과 같은 과정을 끝없이 반복하기 시작. 꼬치를 타고 흘러내린 기름은 같이 꿰어진 버섯에 닿아 열기로 지글지글 지져지면서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녹은 지방이 끓으며 고기가 기름과 열기에 튀겨지고 구워지는 감미로운 소리. 고작 그 뿐인 소리지만 지금 이 순간 손질하고 버려진 이끼 멧돼지 버섯을 가지고 놀던 호위대와 용병 모두의 관심을 한눈에 잡아끄는 데 성공했다. "이거 도망 중인데 이렇게 호사를 부려도 좋을지 모르겠군." 아이오나가 수많은 장작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소리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에 이렇게 불을 피우고, 요리하다니. 그야말로 뒤따라오는 몬스터 무리에게 나 잡아 잡수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이오나의 마음은 너무나도 솔직해 속마음과는 완전히 다른 말을 했는데도 다른 사람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십쇼. 아이오나님. 지금 이 자리에 반년 동안 여자는 구경도 못 한 용병 같은 그 누구보다 뜨거운 눈빛을 하고 계시면서." "감히 한 종교의 장로이자 공작 가문의 시종장에게 그런 소리를?" "제가 아닌 말을 했습니까?" "괘씸한 용병이로고. 하지만 자네는 신선한 고기를 가져왔지. 고기를 봐서 용서하도록 하겠네." "그거 정말로 감사합니다." 고든은 멋들어진 태도와 함께 예법을 모조리 틀려먹은 자세로 공손하게 감사를 표했다. 도주한 시간은 사흘. 그중에서 이틀은 밤낮없이 달렸다. 그동안 아이오나와 생존자들이 먹은 것이라고는 뻔했다. 건빵과 약간의 육포 물이 전부. 정말 아쉽게도 몬스터의 침공을 받아 가장 먼저 부서진 수레와 마차가 다름 아닌 보급품을 싣고 있었던 터라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아이오나는 그런 혼란 속에서 식량을 비롯한 각종 필수품을 챙긴 시종과 일꾼, 병사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뭐, 놈들은 지구력은 좋아도 달리는 속도는 사람보다 느린 놈들이니 내일 이맘때쯤까지는 여유롭게 쉴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좋은 소식이군." "그나저나 냄새 하나는 끝내주는군." 그렇게 지친 몸의 피로를 푸는 사이. 일부 시종과 일꾼, 병사들이 그 감미로운 냄새에 용케도 챙겼던 소금과 후추를 뿌리자 그 향은 한층 더 강렬하게 피어올랐다. 타들어 가는 모닥불의 장작과 숯의 향. 기름이 떨어지면서 끓어올라 피어오르는 연기. 이끼 멧돼지 고기에서 기름이 흘러 버섯을 그을릴수록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그 끝을 자극하는 톡 쏘는 후추의 향까지. 주린 몸에 한없이 길고 가혹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 꼬치를 이리저리 뒤집던 시종들이 다 익은 것을 확인하고는 미리 씻어둔 납작한 돌에 잔뜩 쌓아 잽싸게 아이오나의 앞으로 가져왔다. 잘 먹겠다며 시종과 일꾼들을 치하하는 동안에도 아이오나는 돌 위에 얹어진 꼬치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비단 아이오나 뿐만이 아니었다. 배를 주린 것은 하이폰, 고든 또한 마찬가지. 하물며 지난 며칠간 먹은 것이라고는 앞서 말했듯이 건빵과 육포, 물이 전부였다. "장로님? 언제까지 쥐고만 계실 겁니까?" "핫!? 어느 사이에 집어 든 거지?" "그야 한참 전에-" "정말 토막 내서 꼬치에 꿰어 소금 후추 간만 했을 뿐인데 이렇게나 요물 같다니." 그리고 아이오나는 빠르게 꼬치의 면면을 살폈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시종들답게 모닥불에 직화로 구워진 이끼 멧돼지의 다양한 고기 부위는 짙은 갈색으로 구워져 있었다. 예상 밖의 화력에 테두리가 검은색으로 그을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맛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에 있는 고기 모두 하나같이 훌륭하게 크러스트가 형성. 그 표면에 알알이 박혀있는 후춧가루. 그리고 강렬한 장작불의 향기. 귀족가의 일반적인 식탁이었다면 올라오기 이전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을 그런 단순한 요리. 하지만 공복이 최고의 조미료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아이오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참기 힘든 유혹 그 자체였다. 양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재빨리 현실로 돌아온 아이오나. 곧바로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꽂아놓은 것 같은 꼬치를 집어 들었다. 육즙과 기름이 수염에 잔뜩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한 마리의 맹수처럼 고기를 물어 뜯었다. ***자료출처*** -스테이크 꼬치- 챗GPT가 그려준 그림입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