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와 지방마다 다 다른 작위. 거미줄과 나무뿌리보다 더 복잡한 가계도. 법보다 더욱 우선되는 관습 등. 봉건제를 상징하는 것은 여럿 있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을 뽑는다면 그것은 바로 영지, 장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를 소유한 것이 귀족. 평민이 이를 가지는 경우? 작위가 없더라도 평민이 영지, 장원을 소유하면 바로 귀족이 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의 권력자라고 할 이들이 장원을 소유한 것처럼 펠윈터 가문에 속한 마법사의 탑도 영지가 있었다. 다만 이쪽은 누군가 단독으로 소유했다기보다는 마법사의 탑이라는 기관이 징수권 및 기타 등등을 가진 느낌으로 조금 달랐다. 그런 탑의 지배권을 위임받은, 현재 마법사 탑의 사실상 지배자나 다름없는 캐서린은 포상을 겸해 배당된 장원을 직접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아무렴 장원에서 세금을 징수하더라도 현재 상황을 봐야 견적이 나오는 법이니까. 서면으로 보고를 받았다고 해도 활자와 현실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 법. 하지만 쌓이고 쌓인 일이 끝도 없었기에 캐서린은 도무지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올리비에가 오고 나선 겨울이라는 계절이 문제였기에, 겨울이 끝난 후엔 옵시디언베리로의 출장. 차이가 있다면 그때보다 마차를 호위하는 병사도, 모험가도 적다는 것. 게다가 장원까지의 거리도 반나절 거리였던지라 보급품을 실은 수레도 한 대면 충분했다. 어쨌거나 카렘으로서 준비할 것은 변함없었다. 일행의 식사와 간식. 이를 위해 조리 기구와 식료품을 준비하는 것. 하물며 지난번과 지지난번의 외출 때보다 인원도 적었으니 준비할 것은 더더욱 적었다. "으응, 그래서 짐이 이렇게 다, 단출했던 거야?" "뭐, 그렇죠? 모험가들 먹는 건 자기들끼리 알아서 할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시죠. 그래도 식료품은 이것저것 잘 챙겼습니다." "그러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네?" "나, 난 대체 왜 같이 끌려온 거야?" 나르케는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어조엔 진심으로 당황했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카렘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캐서린이 고용한 모험가 몇 팀이 합류하고, 장원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납치되듯이 끌려와 합류 당했으니까. 나르케의 입장에서 캐서린은 회사의 꼭대기자 교수나 다름없는 캐서린의 행동에 저항할 권한 따위는 없었다. 캐서린은 카렘이 내민 쇼트 브레드 쿠키(Shortbread Cookie)를 물었다. 파삭 소리와 은은한 단맛을 강조하는 표면의 소금을 맛보며 버터향을 느끼던 캐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거 아니냐?" "제, 제가 끌려가는 게 당연한 건가요!?" "그야 언데드 문제는 네크로맨서니까 당연하지. 콜던 밖을 나왔을 때의 광경을 떠올려봐라." 말해 뭐하겠는가. 옵시디언베리에서 콜던으로 복귀하던 풍경과 거의 똑같았다. 물론 차이점이 있기는 했다. 언데드와 모험가의 수가 비례해서 늘어난 정도? 카렘은 갑작스러운 언데드라는 발언에 어리둥절했다. "장원이 언데드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서신을 전달하자마자 전령은 쓰러져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 서신조차 언데드와 지원을 바란다는 몇몇 내용 외엔 거의 알아보기 힘들었지. 아마 뭔가 단단히 문제가 생겼을 터.” 마법사의 탑, 어쩌면 콜던 전체에서 유일한 네크로맨서. 나르케가 등장할 시간이었다. "물론 나도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언데드는 좀 안다만." 카렘이 내민 톱날 모양 쇼트 브레드 쿠키를 통째로 문 캐서린은 쿠키를 까딱이다가 통으로 삼키며 나르케를 가리켰다. "하지만 주구장창 시체만 파고든 네크로맨서보다는 효율이 떨어지겠지." "그,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뭐라 마, 말이라도 해주셨으면-" 나르케는 작게 항변했다. 하지만 그런 저항을 캐서린은 가당찮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래서 이렇게 직접 설명하는 거 아니냐. 시체 문제는 네크로맨서에게라는 말처럼." "그, 그냥 시체랑 언데드는 엄연히 다, 다른 존재인데요...!" 그건 또 신기한 소리를. 카렘은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낙담한 나르케는 고개를 떨구고 뭐라 중얼거리며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혔다. 카렘은 궁금했던 다른 점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아타니타스님." "뭐냐. 꼬마." "지금 와서야 물어보는 게 좀 이상한데, 메리는 두고 와도 되는 겁니까?" "음? 몇 시간이나 지난 그걸 인제 와서?" "아니, 그동안 너무 당연했던 거라 새삼스러웠다고 할까요." 윈터홈에 자리 잡은 이후 그동안은 캐서린이 어디론가 움직이면 카렘은 항상 메리와 함께 세트로 움직였고, 당연하지만 거기에 이견은 없었다. 그야, 주인 가는데 종자가 따라가지 명령도 없이 어딜 간단 말인가. "겨울같이 사람 적을 때라면 모를까. 이젠 인원도 늘었는데 관리를 위해서라도 집요정이 탑을 비울 수는 없는 일이지. 무엇보다 탑의 관리인이라고는 메리 하나뿐이잖냐." "하긴, 누가 조금 일에 손만 대도 날뛸 테니까요." "뭐, 네가 잠깐이지만 날 수행한 일도 있었으니 그걸 믿고 나를 맡긴다고 하더구나. 주인한테 괘씸하긴." 카렘은 잠시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후볐다. 처음 듣는 말인데? "정작 저는 메리한테 그런 말을 듣질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놈도 한참을 고민하다 어젯밤 늦게 결론을 내린 거였으니 못 들었을 만도 하지." "며칠 동안 메리가 인상을 찌푸리고 다녔었는데 그 이유가?" 캐서린은 무심결에 피식 웃었다. 청소부터 가정일과는 담을 쌓은 마법사의 탑의 중노동 그와는 상대적으로 상대적 경노동인 캐서린을 수행하는 것. 어느 쪽이든 포기하기 싫어서 간식을 눈앞에 둔 강아지처럼 끙끙대던 메리의 모습이 캐서린이 눈앞에 아직도 훤했다. "아니, 그래도 직접 말하지 않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직접 말하기엔 자존심이 상한다며 너한테 맡긴다는 꼴이 조금 웃겼다." "자존심 때문이라고요?" "집요정이잖냐." "거 일 사랑도 좀. 줄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게 집요정의 평균이다. 평균." 카렘의 얼굴은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구체적으로는 미간이 찌푸려지고 한쪽 입꼬리와 함께 얼굴 반절이 찌그러지는 느낌. 저게 평균이라니, 대체 집요정의 세계는 얼마나 워커홀릭으로 넘쳐난단 말이지? 자발적인 노예종족? 롤링 여사의 위저딩 월드냐? 하지만 어느새 기운을 차린 나르케조차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카렘 자신보다 경험이 많을 엘프까지 저럴 정도니 적어도 캐서린의 의견은 집요정의 평균이라는 말은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에스카르나 니-" "나르케라고 부, 불러도 되는데?" "음, 아직 에스카르나님이 거기까진 저와 친해지지 않으셔서." "매정해!?" "몇 달 뒤에는 이름으로 불러드리도록 하지요." 카렘은 깍지낀 양손을 다리 위에 올리고서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카렘은 나르케와 일찌감치 내적 친밀감을 형성한 지 오래였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순전히 그녀가 놀리는 맛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례합니다." 카렘은 곧바로 손수건을 들어 캐서린의 입가에 묻은 과자 가루를 닦았다. "그래서 정확히는 장원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겁니까?" "바로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움직이는 거다." "편지에 원인이 적혀있지 않았습니까?" "내가 받은 편지는 반절 파손되어 도착했지. 그래서 내용은 부정확하지만 일단 촌장의 인(印)이 찍혀있으니 정식 문서는 확실해." "그래도 편지를 전달한 모험가든 누구든 있지 않았습니까?" 캐서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달한 모험가도 마을, 펑거스비에 갑작스럽게 언데드가 몰려든 거 말고 자세한 내용은 모르더구나." "흠, 그래서 에스카르나님을?" 캐서린은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렘이 내미는 쇼트케이크의 끄트머리를 날름 받아먹었다. 어느새 혼자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나르케는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무, 문제가 심각하면 일단 도착하자마자 결계부터 펼쳐야 하, 하려나?" "결계요? 뭐, 언데드를 쫓는 결계라도 됩니까?" "으, 응.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네." 나르케는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며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언어를 골랐다. "응, 그래. 호, 혹시 특정 몬스터나 동물을 유인할 때, 미, 미끼를 사용해서 끌어들이는 건 알아?" "어, 네. 비슷한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는데요." "조, 좋아. 그러면 설명하기 쉽겠다. 언데드도 보, 보통 일정 이상의 생명을 품은 조, 존재에게 이끌리는 경향이 있거든?" "언데드가 지나가는 동물은 공격해도 나무나 풀은 안 뜯어 먹는 것처럼요?" "그, 그래. 그거." 나르케는 허공의 무언가를 보호하듯이 양손으로 감싸는 자세를 취했다. "응, 대, 대충 요런 느낌으로 언데드의 감각을 소, 속이는 결계를 만드는 거야." "마을 하나, 아니 농지까지 생각하면 그 범위가 상당할 것 같은데요." "흐, 흐흥. 나도 나름 능력 있는 엘프거든? 자, 자연 발생한 하급 언데드정도는 코앞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마을을 지나칠 거야. 대, 대충 바위라고 인식하고 돌아가는 느낌?" "오, 그렇게 좋은 게 왜 콜던같은 대도시에는 없습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야 그런 편리한 게 있으면 당장 도시부터 뒤덮으면 좋을 텐데? "도, 도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속이는 게 부, 불가능하단 말이지? 그리고 네크로맨시는 소, 솔직히 확장성도 별로라서..." "아, 그렇습니까." 마법에, 네크로맨시는 더더욱 문외한인 카렘이 뭐라 반박할 말은 없었다. 냄새가 너무 심각해 탈취제로도 제거가 안 되는 느낌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캐서린도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다른 마법들과는 다르게 네크로맨시는 허구한 날 핍박받았으니 말이다." "그, 그만큼 잘못도 많이 저질렀으니까요." "하! 그냥 언데드를 연구하는 꺼림칙한 인식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 캐서린은 같잖다는 듯이 콧웃음쳤다. "비율로 따지면 네크로맨서보다 다른 전공의 마법사들이 저지른 민폐가 더 많은 것이 당연한데." "그런 겁니까?" "그래. 꼬마야. 너도 생각해봐라. 당장 네가 그동안 봐온 마법사 중에 네크로맨서가 얼마나 되지?" "어, 에스카르나님 말고는 없죠?" "그 정도로 수가 적은데 사고를 친다면 당연히 누가 더 많을까?" "네크로맨서 이외의 마법사들?" "그런 거다." 캐서린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카렘은 얼른 쿠키를 그녀의 입가에 가져갔다. "음, 당장 내가 모험가로 일할 때만 하더라도 토벌한 네크로맨서는 다섯 손가락이 안 돼. 반면에 마법사는 스물은 가볍게 넘지. 몬스터보다 더한 도적 기사는 더하고." 결국엔 비율의 문제였다. 안 그래도 수가 적은 네크로맨서 중에 분탕을 일으키는 이들 때문에 다른 선량한 네크로맨서가 피를 본다는 것. 그런데 선량한 네크로맨서라니, 이렇게까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카렘이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돌연 마차가 멈춰섰다. "음? 벌써 도착했나?" "반나절이면 도착한다고 하셨었죠?" "그래." 카렘이 바깥을 확인하려고 할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마차를 호위하는 모험가의 목소리였다. "실례합니다. 마법사님. 아무래도 바깥에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응? 뭔가 문제라도 있나? 한 번 보도록 하지." 캐서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렘도 자리를 정리하고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차 밖으로 나가자 무슨 상황인지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마을을 둘러싼 무리를 본 카렘은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언데드의 습격이라 하셨죠." "흠, 촌장이 거짓말을 한 건가?" "에이. 설마 어느 간 큰 촌장이 지배자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 "꼬마야.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다." "아니, 그보다 저거 뭔가요. 거대 호두?" 아이 키만 한 호두부터 성인의 키는 가볍게 넘는 호두까지. 목책 위에 올라선 사람들이 거대한 호두 무리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나르케는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자, 자연 발생한 버섯 골렘?" "예? 에스카르나님. 골렘'도' 자연 발생합니까? 아니, 그 전에 저게 버섯이라고요? 영락없는 호두인데요?" 그때, 마을을 둘러싸 공격하는 한 거대 호두알 버섯 무리가 목책에서 떨어져 나와 마차 쪽으로 지면을 울리며 다가왔다. "잡담은 그만! 버섯 골렘이 이쪽을 인식했다! 전투 준비!" 마차의 천장에 올라 현황을 살피던 엘프 모험가의 신호에 모험가들은 곧바로 무기를 꺼내 들고 자세를 잡았다. ***자료첨부*** -쇼트브레드 쿠키(aka코스트코 깡통 버터 쿠키)- 챗GPT가 그려준 그림입니닷.